백고좌대설법회 일진 스님 (前 운문사 주지)

▲ 일진 스님은 … 1970년 재석 스님을 은사로 출가 벽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운문승가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승가학과를 거쳐 일본 경도불교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운문승가대 강사와 학감, 주지를 역임했으며 조계종 교재 편찬위원, 운문사 주지, 제 15대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승만경을 읽는 즐거움〉(민족사)이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인간에게 있어서 봄은 무엇일까. 계절이 변하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흐름과 태어나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변화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봄은 묵은 것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움을 틔우는 시간이다. 前 운문사 주지 일진 스님은 4월 23일 제29회 백고좌대설법회 입재식에서 법화경(法華經)에 대해 설법했다. 일진 스님은 “‘법화경’은 “사생육취 중에 고통 받는 업보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함께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지혜의 넓은 문”이라면서 “앞으로 7월 28일까지 100일간 이어질 백고좌대설법회를 통해 배운 것을 실천하여 삶의 타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봄을 맞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리=박아름 수습기자


삶의 새 움을 틔워라
굉장히 오랜만에 법왕사 법당에 온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변화무상의 철학을 가장 강력히 설파하신 만큼 법왕사는 변화무상을 눈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시각각 너무나 아름답고 거룩하게 변화하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곡우(穀雨)입니다. 계절은 항상 변화합니다. 곡우는 봄 계절이 끝나는 절기이자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부터 곡우 날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들어선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요. 이처럼 계절은 항상 변화하고, 계절에 따라 우리가 있는 이 곳 법왕사의 모습 또한 변화합니다. 자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개인의 면면도 다들 변하지 않습니까? 아침에 스스로 거울을 보면 자신의 기분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정도(八正道) 중에는 정념(正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른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면 그에 따라 얼굴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에는 변화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표정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만약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참 황폐해질 것입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있기에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과거·현재·미래 속에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기에 우리의 삶과 육신의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자리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몸은 생로병사로 변화하며, 우주공간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성주괴공이란 우주가 시간적으로 무한하여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인 가운데 생성소멸하며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오늘 봄의 마지막 절기라고 하니 새삼스럽게 봄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산도 나무도 꽃들도 봄이라고 피어나고 있는데 사람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일까, 계절의 변화에 나의 봄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봄을 인간의 봄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얼어붙은 대지에 다시 봄이 움트고, 겨울동안 죽은 듯 잠잠하던 숲이 새소리에 실려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들 안에서도 새로운 봄이 움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과 일상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타성으로부터 벗어나야합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인간의 봄은 묵은 버릇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 새 움이 틀 수 있는 것입니다. 순간순간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낡은 것으로부터, 묵은 것으로부터,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털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지금 법화경을 시작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법문을 듣고 설하고,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내용들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삶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나는 정말 잘 걸어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되물으며 생각할 수 있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된다면 계속해서 그러한 실천과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는 만큼 행(行)하라
우리가 ‘안다’는 것과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과 글자 점하나의 차이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아십니까? 무엇을 아십니까? 옛날에 경봉 스님은 세상에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동서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지만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과연 자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론과 경전을 통해 많은 것을 알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이상 내 행복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경전 중에는 최초 설법 화엄경과 최후 설법 법화경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아함경, 금강, 반야경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도 기원정사에 가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터가 남아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르시며 많은 설법을 남기셨습니다. 그 중 금강경에는 부처님께서 한 때 많은 제자들과 함께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탁발을 하러 다니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탁발승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만, 탁발은 하심(下心)의 의미입니다. 탁발승들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자기 자신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마를 아래로 숙여 정성스럽게 받습니다.
사실 법화경을 읽어보면 제게도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불교에 입각해 생활하도록 포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되지 못하니 아무리 많은 내용을 배우고 알고 있더라도 우리가 모두 결핍의 상실감에 빠져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법화경 선품에 보면 우리는 현실에서 상상도 못할 내용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법화 왕사성에 머무르시다 1만 2천의 비구들과 함께 수행하셨습니다. 이에 이들은 모두 아람으로써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여 다시 번뇌가 생길 일이 없고, 진리를 얻어 마음의 자재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대번뇌를 다하여 열반을 체득하신 분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부처님 제자들 중 마하가섭, 가야가섭, 나제가섭 등이 있습니다. 부처님 십대제자 중에서도 가섭존자는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고 합니다. 두타제일이라는 말은 걸식제일이라고도 하는데 검소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가섭존자는 가장 검박하고 알뜰한 제자입니다. 생활 속에서 물 한 방울이라도 천금과 같이 아낄 줄 아는 성품을 지닌 사람입니다. 넉넉해지고 편안해질수록 사람들은 낭비를 합니다. 하지만 가섭존자는 걸식을 하실 때에도 가난한 집만 다니셨습니다. 현생에 가난한 사람들은 전생에 얼마나 베풀지 않았으면 지금 가난하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난한 집만 골라서 다니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수보리 존자는 부잣집에서만 탁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난하거나 부유함에 치우치지 말고 첫 번째부터 일곱째 집까지를 정해서 탁발의 양이 부족하더라도 더 가지 말고 중도(中道)를 지킬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에 다문제일 아난존자는 아주 평등하게 탁발을 했습니다. 총명한 머리로 기억력이 아주 좋았던 아난존자는 장학 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데 환경이 어려우면 그것을 돕고, 자신이 공부한 것을 잘 일러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난존자가 총명했던 이유입니다. 지금 우둔하고 공부가 안 되는 것은, 내가 타인에게 베풂에 인색하며 혼자 공부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법 보시를 아까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아라한들이었습니다.

온 누리 지혜를 밝히는 광명(光明)
대승 경전, 특히 법화경에는 용왕 얘기가 나옵니다. 법당을 잘 둘러보면 용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용들은 사실 상징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열려있는 깨달음에 세계에서는 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열려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중생이 닫혀있는 안목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승 경전 또한 그렇습니다. 닫혀있는 우리의 안목으로 보면 이해가 되기 어렵습니다. 용뿐만 아니라 불교의식에 따라 음악을 관장하는 악사(樂士)인 건달바(乾達婆)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건달바, 아수라왕 등 수많은 사부대중이 전부 자기 권속들과 전부 모였습니다. 이분들이 와서 부처님 발아래에 절을 하고 모였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여러 보살들을 위한 대승 경전을 설하셨습니다. 특히 법화경을 설하실 때는 광명을 얻었습니다. 광명(光明)은 부처님 이마에 있던 털 자라기로 상징되는 것으로 그 광명의 빛이 저 아래로는 지옥으로부터 맨 꼭대기에 이르기 까지 환하게 비췄습니다. 당시 광명의 빛이 지천에 밝아 그 중간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손바닥 위에 사과하나를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혜 문수보살님과 행증 보현보살님, 비증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등 우리가 원하는 지혜를 얻고자 할 때 그 보살을 끝없이 염하면 나와 그 보살이 하나가 되어 내가 곧 그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때 아라한을 비롯한 미륵보살들과 용왕 등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광명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으로 광명을 무량세계에 비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부대중은 의심을 품고 문수보살에게 질문을 합니다. ‘일반 팔천 국토를 비추어 진정으로 부처님의 모든 장엄이 펼쳐지게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하니 문수보살은 ‘이제부터 부처님의 대광명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려운 법문을 듣고 쉽게 알게 하기 위해 광명의 빛을 비추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화엄경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모든 경전이 그렇습니다. 읽을 때는 신심(信心)도 생기고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화엄경을 설명한 주석 내용을 보면 아무리 봐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화엄경 대가라는 스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알겠는데 주석서를 보면 하나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것은 문수보살님에게 여쭈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원래 우주와 같아서 무시무종(無始無終)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보살의 본래의 뜻은 부처님의 스승의 역할을 하는 자들을 일컫습니다. 하지만 보살들은 기꺼이 부처님 옆에서 부처님을 위해서 수행하셨습니다. 이렇듯 어떤 진리를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만큼 수행하고 경험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배움에는 초선, 중선, 후선이 있습니다. 기도 입재날이니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의 오신 분들은 초선입니다. 이러한 초선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삼세일체 과거 현재 미래를 거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먹은 것도 다시 변하고 ‘한 때 좋았다’, ‘한 때 도움 받았다’ 처럼 한 때라는 생각으로 초심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법을 설하시던 부처님을 따라 처음과 중간, 끝까지 배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은 법화경 강의의 첫 날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온 타성에서 벗어나 오늘 이 자리에서 배운 법화경으로 좋은 삶과 좋은 날을 누리길 바랍니다. 부처님은 법화경이라는 대 정법을 설하기 위해서 상소로움을 나타내시고 부처님의 제자와 많은 권속들 앞에서 대승경을 설하셨습니다. 법화경은 다른 말로 묘법 연화경이라고도 합니다.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혼염하신 강의입니다. 오늘 나무묘법연화경, 실삼묘법연화경을 배웠으니 개인의 삶과 우리네 집안, 나아가 우리 사회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