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구덩이에 빠지느냐, 안 빠지느냐도
한 점 마음에 달려 있으니
이 생각 하나를 귀중하게 생각하십시오.

 

▲ 그림ㆍ최주현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OO선생님과 OO보살님이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여러 회장님들, 여러 신도 여러분이 한마음 한뜻으로서 이 지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앉아서 여러분과 같이 토론 겸 또 설법이라기보다도 우리 생활에서 그 뜻을 한데 모아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은 젊으나 늙으나 다 내 몸 하나를 끌고 가는 데에 역점을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몸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 하는 문제에 의해서 내 가정을 끌고 나가는 데에 문제점이 있고 사회, 아니 국가…. 우리는 국가를 등지고 온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국가를 두면서 항상 여념이 없이 부지런하게,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내 몸을 건강하게 이끌고 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그 반면에 아까도 얘기한 바와 마찬가지로 내 가정을 이끌고 가는 데는 내가 나를 알아야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긴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여건에 의해서 이렇게 내 몸을 내가 이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나 이것을 말씀드리죠. 사람에게는 누구나가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여건이 80%, 90%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그것을 활용을 못하고 항상 이 세상의 노예처럼 또는 습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모두 큰스님한테 화두를 받아서 해야 한다고 하는데 난 그게 아닙니다. 그 화두 받는 것도 옛날입니다. 지금 우리는 시공이 없이 뛰어야 하고 시공이 없이 뛰면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대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몸을 끌고 가는 데 그 몇 가지가 있지만 우선적으로 한 가지만 얘기하죠.


내가 나를 발견하는 데는 어떠한 점에서 발견을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예를 들어서 수억겁 광년 전서부터, 그럼 거기서부터 얘기하죠. 미생물로서 태어났다고 볼 때 그럼 그것이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해서 바로 나투면서 화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그렇게 화하게 되느냐. 그 씨를 심었으면 그 씨대로 또 태어나야 할 텐데 왜 그 씨대로 태어나질 않고 자꾸 모습이 바뀌느냐 이런 문제입니다. 생명들은 즐거우나 고가 닥치나 항상 이런 것을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그런 능력이 스스로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반드시 나오려고 하는, 애를 쓰는 마음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그러는 반면에 사람은 차원이 높아지고 바로 진화력을 갖게 되는 거죠, 진화력. 능력을 얻게 된다 이겁니다.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내가 구덩이에 빠졌다 할지라도 반드시 구멍을 찾아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찾는다 이 소립니다. 그 마음이 아주 자기를, 길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디서부터 쫓아 나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에 의해서 마음은 바로 수천수만 가지로 낼 수 있다는 여건입니다. 그렇게 수천수만 가지의 마음을 낼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에 바로 차원이 높아질 수도 있고 차원이 낮아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업보도 윤회도 인과응보도 거기서 모두 가져오는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날까지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그렇게 쫓고 쫓기면서 그 치열한 싸움에, 치열한 개발에, 치열한 진리에 의해서 우리가 고등 동물로 오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피를 흘렸겠습니까?
그런 반면에 우리는 그 잠재의식 속에, 카세트라고 표현합시다. 잠재의식 속의 그 카세트에 수억겁에 거쳐서 감기고 감기고 또 감기고, 그 얽히고설키고 한 업보와 또는 인과응보와 유전성과 모든 것이 거기 감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자 운명은 여러분이 해 놓고 받는 거지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한 것만치입니다. 그렇다면 그 업보에 의해서 또는 인과응보 유전성에 의해서 병고도 가난도 모두 거기서 각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감독한테 대사나 모든 걸 받아서 각본대로 영화를 하듯이.


그런데 불법에는 팔자 운명이 없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왜? 지금 아까 내 몸 하나 끌고 가는 데도 그러한 여건이 주어져야만이 끌고 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다면 그 잠재의식 속에 얽히고설킨 그 자체를, 일차적으로는 그 모든 걸 녹여야 된다 이 소립니다. 녹일 때에 어떤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망상을 끊어라.’ 이럽니다. 어떻게 끊어집니까, 그게? 끊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즉 말하자면 바로 인과의 줄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줄이 끊어지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망상이 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망상은 끊는 게 아니라 녹이는 겁니다. 녹이는 게 아니라 둘이 아님을 알게끔 해 주는 것이 바로 녹이는 겁니다. 우리가 그 습을, 그 살아나오던 악하고 선한 습을, 거기서 각본대로 나오는 모든 걸 그 자리에다 다시 놓는다면, 맡겨 놓는다면 그대로 녹아 버리는 겁니다. ‘카세트에다 노래를 넣어 놓고 카세트에다 (녹음 안됨) … 한 것을 그대로 그것은 고마운 것이다.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모든 것은 여기에서, 잘못된 것도 여기에서 나를 다지고 테스트하기 위해서 나에게 잘못된 거를 주는 것이다.’ 하고 맡겨 놓으면 그건 스스로 잘돼. 여러분이 그것을 지엄하게 실천적으로 생활에서 해 보신다면 그것이 납득이 될 겁니다. 이건 거짓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반면에 또 한 가지는, 우리 몸에 이런 게 있습니다. 간이나 위나 심장이나 콩팥이나 대장 소장이나 이자나 방광이나 어느 부분을 막론해 놓고 모든 생명들이 1차 2차 3차 4차 5차까지, 뼈의 세포까지 생명체들이 전부 얼개미 같은 그런 법망을 쫓아다니면서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거를 자세히 모르는 분들도 있고 아시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운행하는 그 생명들은 어디를 따르느냐. 내 한생각에 따르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은 옛날의 태초의 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마음의 그 뜻, 한 점의 마음에 이 우주를 삼킬 수 있는 능력이 모두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다는 그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생각에 의해서 주인공에 감사하게 맡겨 놓고 안되는 거는 안되는 것대로 되게 하느라고 이렇게 다지기 위해서,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끌고 가는 주인공을 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능력을 기르는 겁니다.


그런데 축이 있습니다, 축. 우주의 축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축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부터, 이 축에서부터 오관을 통해서 정신으로 가서 이 전체의 몸을 통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한 점, 그 한 점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이 구덩이에 빠지느냐, 안 빠지느냐도 한 점 마음에 달려 있으니 이 생각 하나를 귀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아무렇게나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던지고 자식들한테도 아무렇게나 욕을 하고 부부지간에도 아무렇게나, 조금만 잘못해도 “저런 도둑놈 같으니….” 아, 이렇게 말을 마구 하거든요. 그 생각,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사람에게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금방 그 자리에서 닥치진 않아도 그냥 그대로 닥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소홀히 생각하고 방치해 두고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분도 많이 계시고 또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그 한생각이 내 몸을 끌고 가는 데 역점이 되고 또는 운전수가 되고 또는 사공이 된다는 얘기죠. 그러면 나침반도 될 수 있죠.


그래서 그 축이 모든 거를 행해 나가는 데는 여러분이 용광로와 같다. 용광로와 같아서 잘못된 거, 잘된 거 모든 거를 거기다 맡겨 놓으면 그냥 녹아 버린다. 이런 인연줄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이열치열과 같이 뜨거운 물은 뜨거운 물이 녹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죄업을 스스로서 지은 거는 스스로서 그것을 녹여야지, 강제성을 띠어서 녹이는 것도 아니고, 칼로 끊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말씀해 드릴 것은, 우리가 일차적으로 내 몸 하나 건강하게 끌고 다닐 수 있는 여건을 갖는다면 바로 가정을 끌고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


아까 내가 죽이는 것도, 잘못된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한 거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한 몇 해 전입니다. 어느 신도가 정성을 보름 동안 지극히 들였는데 말입니다, 남편이 승진을 하려고 정성을 들였는데 끄트머리에 뭐가 나왔느냐 하면 승진이 안되고선 좌천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도가 그냥 울고불고 그래서 그랬습니다.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야.” 그렇게 인제 쫓아 보냈죠. 그런데 서너 달 만에 와서 뭐라고 그러느냐면 “참 감사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그러니까 아빠 대신 다른 사람이 승진이 돼 가지고 월남에 갔다 이겁니다. 월남에 가서 해골로 왔습니다 이거야.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뒤에 아빠는 또 승진을 했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선 울기에 “그것 봐.” 그러고선 난 아무 소리 안 했습니다. 사람이 지내 보고 겪어 보고 자기가 걸어 봐야 알아요, 모든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집념 있고 좀 인내 있게 기다리면서 지켜보면서 연구하면서 발전하면서 나가야지 그냥 절이나 하고 그냥 갖다 기도나 하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이건 기복이야, 어디까지나. 자기를 떠나서 ‘신이여, 나를 도와주시오.’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무슨 약사보살, 집신 무슨 조왕, 뭐 용왕 죄 찾고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이 고정관념이 없다 아까 그랬죠.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에 고정 행도 없고,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어. 그래서 이 ‘색즉시공 공즉시색’ 한 것이 바로 그 뜻이야. ‘이것이 색이면서도 공했고 공이면서도 색이다. 너희가 보이면 보이는 그 물질이 다 공했느니라.’ 이 소리거든. ‘너희 보이는 물질은 다 공했느니라.’ 그렇게만 얘기해 놨지 자세히는 안 해 놨기 때문에 그냥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렇게 외우기만 해. ‘공 즉 색’이다 하는 것은 보이는 게 전부 공해서 한 찰나에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데, 그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꽉 차서 돌아가느니라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한 찰나에 돌아갈 때, 한 찰나에 누구를 만났을 때, 어떤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하겠느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만났다고 하겠느냐. 어떤 거를 들었을 때 내가 이렇게 들었노라고 말하겠느냐. 어떤 거를 봤을 때 내가 봤다고 하겠느냐. 이렇게 해서 모든 걸 귀합해서 바로 그것이 ‘나’이자, ‘참나’이자 바로 공했느니라, (몸을 가리키시며) 이것이. 탑돌이 하듯 노상 돌아가고 있어, 이게. 오관을 통해서 노상 돌아가고 있다 이 소리지. 그러니 이 돌아가는 것을 누가, 어느 누가 ‘내가 부처’라고 말하며 ‘내가 중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 중생은 둘이 아니니라. 동서가 둘이 아닌데 어찌 남녀가 둘이겠는가. 마음은 체가 없어서 무한량인데 어찌 남녀를 구별해서 너는 성불하고 너는 성불 못하느니라 하겠느냐? 어린애가 코를 찔찔 흘리고 와도 그것이 바로 법담의 대상이요, 바로 스승의 대상이요, 일체 만물만생이 다 스승이며 중생이며 바로 부처 될 수 있는 그 생명을 가지고 있노라 했단 말입니다. 불성이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 마음 자체를 깨닫는 데는 깨닫는다고 하지 말고 ‘아! 감흥이 됐어. 느꼈어.’ 이러고,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 한 소식이다 이러는 거는 열반경지에까지 이르러서, 그릇이 다 비워졌을 때, 비고 나서 거기에 찰나찰나 내가 먹을 수 있고 줄 수 있고 맛을 알고 맛을 알게 해 주고 할 때 그것이 바로 열반의 경지라는 거야.


그런데 오늘날의 불교가 이렇게 기복으로만 나가기 때문에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그 모든 일체 만법의 맛을 모르고 먹을 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고 이거는 막막하기가 한량이 없어. 그러니 관절이 아프나 관절을 어떻게 처리해야만이 낫는지 그것도 모르고, 누가 그러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만 가는지도 모른다 이거야. 그럼 여러분이 죽는다 산다 이것이, 사후에 어떻게 되느냐? 이 문제들도 여간 참 문제점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후가 바로 지금이 있어야 사후가 있는 거지 지금 없는데 뭘, 뭘 가지고 말입니까?


어저께도 내가 얘기했지만 굼벵이가 매미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근본 축이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다. 영원한 자기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대의적으로 봤을 때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매미가 될 수 있죠. 그런데 매미가 돼서도 스스로 돼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의 차원이 조금, ‘나는 왜 기어 다니기만 할까. 왜 저렇게 날지 못할까.’ 할 때 날게 될 수 있는 진화력이 생긴단 얘깁니다. 그렇게 됐건만 굼벵이가 매미가 된 것도 모르고 매미가 굼벵이였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병이 어디서 왔는지, 내가 이걸 어디로부터 어떻게 해야 처리가 되는지 그것조차도 여러분이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늙어 가면서 얼마나 허무합니까? 벌써 이 세상에 생겨났다 하면 뚜벅뚜벅 죽으러 가는 형편이니 얼마나 허무합니까, 인생이. 고생은 고생대로 죽도록 하고, 쳇바퀴처럼 말입니다. 돌아가면서 자식 기르느라고 햇빛 주랴, 묵은 빚 갚으랴, 이건 여념이 없이 그냥 돌고 돌고 또 돌고 돌다가 머리는 허옇게 세어지고 인제 수족은 못 쓰게 되니 얼마나 허무한 문제입니까? 그런데 허무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면 이 도리를 꼭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늙으나 젊으나 이 몸이 있을 때 그 도리를 알아야 진화력이 생겨서 바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죽지 않는 도리를 알게 되고 끄달리지 않는 도리를 알게 되고 업을 지니지 않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날 기복으로 그저 밥이나 해 놓고 떡이나 해 놓으면 부처가 잘 먹는 줄 알지만 여러분의 부처가 다 먹어치우고 가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부처가 ‘더 가져 오너라. 덜 가져 오너라. 많이 가져 오너라. 맛있는 거 가져 오너라. 다 내가 먹겠다.’ 이럽디까? 그러니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나 기복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말들은 좋지. “부처가 어디 있습니까?” “마음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마음에 있죠.” 이런 말들이야 뭐 누군 못합니까? 실천이 문제지. 그 근본의 실천이 문제라. 한 걸음 한 걸음 떼 놓을 때 공짜로 떼 놓지 말라 이겁니다. 말을 하면 그 뜻과 말과 행이 같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따로따로 있지만 우리가 한번 이렇게 만날 때 여기 전부 앉아 있지만 둘이 아닙니다. 한마음입니다, 그대로. 그러나 여기서 나가서 헤어졌을 때는 너고 나입니다. 그래서 한 찰나에 이렇게 만나서 이럴 때는 원력이 있는 스님네라면 스님네한테 충전을 해 갑니다. 충전 있죠? 전기에 꽂아 놓으면 충전되듯이. 충전이 돼서 한 일주일 가면 또 충전이 빠져. 그럼 또 와야 돼.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가발전소가 그대로 있으면서 가설이 된 데에 용도대로 자기가 스위치 눌러서 쓸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의 능력을 기르시라 이 소립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인이요, 그것이 바로 자유인의 법칙이며, 그것이 부처며 그것이 보살의 행위며 그것이 진리 아니겠습니까? 부처는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 냈다 하면 법이고 법신이고 아,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인데 어째서 화신 따로 있고 법신 따로 있고 부처 따로 있고 아니, 중생이란 이름 따로 있고 그렇게 이름이 많아야 합니까? 그거는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서 조화를 이루려니까, 회전을 하려니까 이름을 지어 놓은 것뿐이에요.


여러분도 이름이 제각각이죠. 이름은 각각이나 그 이름이 해 줍니까? 이름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때, 아무개야 부를 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이름을 지어 놓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이 능력에는 이름, 이런 것이 다 필요 없죠. 그러나 필요 없지 않다는 것은 그것도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진리다 이겁니다. 그거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우리가 이름을 모르면 불러서 일을 시킬 수가 없고 이름을 불러서 서로 웃을 수가 없고 얘기할 수가 없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니 그 능력을 길러서 모든 걸 안다면 이 몸도 그냥 그대로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실상이 된다 이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해 드리려고 하는데 질문하십시오. 질문하신다면 또 답변을 해 드리죠.


이 비행기가 오나 안 오나, 그것도 걸리고 안 걸리고 이런 걸 다 조사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안테나와 같은 이 머리가 오관을 통해서 전부 다섯 가지의 문제를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 첫째 천체영사기와 천체망원경, 천체라 그랬습니다. 그냥 보는 망원경이 아니라 마음속의 망원경 말입니다. 눈 아닌 눈, 눈뜬 사람의 눈 말입니다. 그래서 천체망원경, 그 다음에 숙명통, 저 컴퓨터 천체입니다, 이게. 그 안테나 하나에 다 걸린다, 여기 다 와서 통신이 된다 이 소립니다. 이게 안테나라면 말입니다, 머리라면. 망원경, 컴퓨터, 탐지기, 또 천체무전통신기, 또 가고 옴이 없는 신족, 즉 말하자면 그것을 무전통신기라고 보는데 이 모습 없는 모습들이 가고 오는 거, 이것은 신족통이라고 합니다. 이거와 더불어 모든 게 한데 합쳐서 천이통, 이것이 천체무전통신기라고 얘기했습니다. 이걸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천체망원경, 또 천이통, 천체무전통신기, 또 컴퓨터, 탐지기 또는 모습 없는 모습, 즉 말하자면 책정기, 또 영사기, 영사기를 뭐라고 할까요? 신족통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걸 비교해서 얘기하는 거니까. 그것은 스크린처럼 자꾸 돌아가는, 물체가 보이는 거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물체 없는 물체가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는 거를 말하는 겁니다, 신족통은.
그러니까 그 다섯 가지를 책정기가 모든 것을 오관을 통해서, 이게 안테나라면 전부 와 닿는 겁니다. 우주의 근본도 여기 와 같이 닿고, 인간들의 근본도 여기 와 같이 닿고, 또 물속의 생명들도 전부 여기 와 닿고, 무정물의 생명도, 식물의 생명도, 흙의 생명도, 물의 생명도, 허공의 생명도, 지수화풍의 생명들이 전부 여기 와서 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찰나찰나 용도에 따라서 그것을 쓰는 것입니다. 태풍이 왔다 하면 태풍이 온 대로 그것이 내가 된다면, 이게 내가 된다면 내가 나를 죽일 리가 없습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갑니까, 안 갑니까? 안 가죠?


대중 가운데서 예.
큰스님 그렇죠. 그러니까 이 모두를 그렇게 해서 자유권을 얻으실 수 있게끔 하려면 첫째 이게 문제입니다, 아까 얘기한 거. 모든 건 주인공을 믿고, 자기 참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이란 아까 쭈욱 얘기했죠. 주인공이란 꽉 찬 나라고. 이 안테나와 같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을 믿고 거기에다 모든 것을, ‘안되는 것도 거기서밖에는 못해.’ 하고 맡기고, 또 되는 거는 감사하게 거기다 생각하고 이렇게 나갈 수 있다면, 그러면서 그대로 부지런히 뛰면서 거기 생각하고 그런다면 앞으로 그런 여건이 머지않아서 주어질 거라고 봅니다. 자기를 꼭 반드시 찾게 됩니다. 그것은 찾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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