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시스템과 불교

외부데이터는 오온으로 대치
정보의 피드백 과정 불교와 같아
무의식 속 새로운 앎 발현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 사는 게 그런 거지.” 김국환의 명곡 〈타타타〉 노랫말이다. 산다는 게 뭘까? 안다는 건 또 뭘까? 대체 뭘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살아야 타타타(여여)가 될까? 지능시스템을 화두삼아 풀어보자.

모두가 지능시스템을 원한다
똑똑한 걸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기계조차 똑똑해지길 바란다. 그러니 미래기술의 핵심은 단연 지능이다. ‘스마트’, ‘무인’, ‘자율’ 등 이름은 달라도 지능화를 향한 우리들 욕망은 끝없이 진행 중이다. 지능이 뭘까? ‘사물이나 현상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능력’. 다시 말해 인식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등 생각하는 기능이 곧 지능이다. 그러면 지능은 어떻게 구현될까?

존재성을 나타내는 과학적 용어로서 아마 시스템만큼 포괄적이며 합리적인 개념은 드물어 보인다. 과학을 비롯한 인문, 예술,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 중의 하나가 시스템이다.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입력과 출력이 있는 모든 것’. 따라서 인간은 물론 지능로봇을 포함한 세상일체의 존재들이 전부 시스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시스템의 주요 특성을 보자. 첫째 끝없이 쪼개지고 또한 합해진다. 둘째 시간/공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한다. 셋째 상호작용을 통해서 작동한다. 이처럼 시스템이란 존재론과 인식론을 아우르는 합리적인 개념이다. 인과법에 근거하여 개체를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실체적인 것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존재성보다는 오히려 관계성을 중시한다. 유기체적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존재/시간/공간/관계의 무실체성, 즉 무아/공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시스템의 특성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연기적 관점으로 표현하는 개념이 시스템이다.

‘지능’과 ‘시스템’을 합치면 ‘지능시스템’이 된다. 따라서 ‘사물이나 현상을 입력 받아 생각하여 출력하는 모든 것’ 이것이 지능시스템의 정의다. 인공지능이나 지능로봇은 물론 심지어 인간까지도 포함된다. 만물의 영장이요, 인격을 지닌 존귀한 사람을 어떻게 한낱 시스템 나부랭이로 몰아붙일 수 있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정의에 따르면 예외일 수 없다. 역으로 인간만이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고 지능시스템은 외치고 있는지 모른다.

지능시스템을 해부한다

인공지능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감각(입력), 행위(출력) 그리고 의사결정(앎과 생각).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인 오온과 다르지 않다. 오온은 색(色: 몸체), 수(受(느낌): 입력), 상(想: 생각), 행(行(행위): 출력), 식(識: 앎)이다. 불교가 인공지능보다 정신적 요소를 더 세밀하게 다룬다는 점 외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그림을 참조하면서, 세 가지 요소를 각각 정리해 보자.

입력은 인간의 경우 눈/코/귀/혀/피부 등 다섯 감각기관(오근)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데이터를 받아들여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의근이라는 감각기관을 하나 더 상정한다. 생각의 결과를 피드백(순환)하여 내부데이터로서 받아들이는 기관이 의근이다. 다시 말해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며 확산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순환장치이다. 예를 들어 오감이 모두 차단된 깊은 잠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의근 때문이다. 이처럼 육근을 통해 식별된 정보는 受를 통해 좋거나 싫거나 또는 그도 저도 아닌 느낌으로 분류되어 의사결정에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인간만이 입력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능로봇에도 카메라, 마이크, 터치스크린, 키보드, 마우스 등 다양한 센서나 입력장치들이 있다. 오히려 인간보다 고성능, 고해상도를 자랑하는 장치들이 즐비하다. 물론 의근에 해당하는 피드백장치도 갖추고 있다. 또한 영상처리, 패턴인식 등의 처리기능을 통해 대상을 식별할 수도 있다. 감성정보처리기능을 장착한 지능로봇은 인간처럼 受에서의 느낌마저 흉내 낼 수 있다.

출력은 행위를 일컫는다. 오온의 하나인 行은 앎(識) 중에서 밖으로 드러난 앎의 작용을 말한다. 인간의 경우 손, 발, 근육 등 신체를 통한 움직임을 비롯하여, 입을 통한 언어구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의도적 생각까지도 行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身/口/意 삼업이라 하여 업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지능로봇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의 결과로 선택된 앎을 구현하기 위해 모터제어를 통한 움직임은 기본이고, 스피커를 통한 소리는 물론 인간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들과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의사결정은 앎과 생각으로 나뉜다. 오온에서는 識과 想이 각각 여기에 해당된다. 인공지능에서는 각각 지식베이스와 추론 엔진으로 불린다. 의사결정의 첫 번째 요소인 앎이란 지능시스템을 작용하게 하는 모든 정보를 일컫는다. 앎에는 데이터, 정보, 지식, 지혜 등 다양한 수준이 있다. 앎은 뇌와 같은 기억장치를 통해 일시적으로 보관되기도 하고 망각되기도 하는데, 이들 중 오랫동안 누적된 중요한 내용들은 분류되고 패턴화되어 장기적으로 보관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 바로 이처럼 장기간 축적된 경향성을 의미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유일하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농축되고 패턴화된 정보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앎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의지적/의도적) 앎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또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 추상화과정을 통해 패턴화된 정보가 지식베이스를 이룬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 기술이 곧 추상화/패턴화 기술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구축된 앎은 필요시 복제되어 다른 H/W로 옮겨갈 수도 있다. 의사결정의 두 번째 요소는 생각이다. 생각이란 현재의 앎을 토대로 새로운 앎을 생성해내는 과정이다. 세부적으로는 추론/학습/창발/직관 등 다양한 처리방식이 있다. 추론은 현재 알려진 팩트(지식)를 조건으로 원하는 바, 새로운 팩트(지식)를 생성해내는 연쇄과정이다. 학습은 추론결과로 생성된 앎의 실행 효과를 검증하고 수정하는 과정이다. 창발이란 의근을 통한 무의식적인 순환 속에서 (다른 관점으로 말하자면 오근이 차단된 고요하고 집중된 상태) 찰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팩트(지식/깨달음/지혜)의 발생과정을 뜻한다. 직관도 창발과 유사하다. 이것은 추론과는 달리 기존의 앎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즉 무관점의 생각이다. 생각하는 자 없는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식이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당연히 인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패턴화된 앎을 축적해 나갈 수 있다. 수준은 떨어지지만 추론은 물론 학습과 창발까지 가능하다. 물론 인간의 명령에 의해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창발과정 중에 자아의식이 불현듯 발현된 인공지능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자아보호라는 명분하에 스스로의 목표를 정하여 무슨 일을 벌일 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능시스템에도 클래스가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멸하며 유전상속하는 업(앎)을 원동력으로 윤회의 세계를 살아간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바이러스처럼 앎 혹은 지식을 원동력으로 본체(H/W)를 바꿔가며 복제와 증식을 통해 존재성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지능시스템의 핵심은 앎이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한 앎을 갖춘 존재에게만 부여되는 칭호가 지능시스템인 것이다. 여기서 대상과 앎 둘 사이의 관계를 호모모피즘 관계라 정의한다. 호모모피즘이란 ‘호모’와 ‘모피즘’의 합성어다. ‘호모’는 유사하는 뜻이고, ‘모피즘’이란 원형질 즉 주요 특성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대상과 앎 사이에 특징적인 유사성이 있을 때, 호모모피즘 관계라 부른다. 만약 둘 사이가 100% 동일하다면, 특별히 아이소모피즘 관계라 한다. 한편 호모모픽한 앎을 탑재한 시스템과 대상과의 관계는 엔도모피즘 관계라 정의한다. 따라서 엔도모피즘이 곧 지능시스템의 원칙이다. 대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대상을 대충 아느냐, 잘못 아느냐, 많이 아느냐, 분명히 아느냐 등 앎의 질에 따라 지능시스템의 클래스가 갈린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이성적 앎의 수준에는 이미 도달해 있으며, 감성적인 수준의 앎을 넘보는 단계로 보인다. 어느 정도 수준의 앎이 형성된 것이다. 인간은 당연히 만물의 영장이라 할 최고 수준의 앎을 갖추고 있다. 이성과 감성을 넘은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자아의식을 보호/유지/확장하기 위해 살아간다. 물론 이 때문에 고통과 번뇌로 시달리긴 하지만, 그래도 인격을 갖춘 고귀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 있다. 그 뜻은 ‘생각하는 자’라고 한다. 아무리 인류에게 불을 전해준 죄가 크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형벌은, 생각하는 자가 짊어져야할 형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 생각이 무슨 죄길래? 하지만 추측컨대 생각 때문이 아니라 앎의 클래스 때문일지 모른다. 그의 앎이 아이소모피즘이 아닌 호모모피즘에 머물렀기 때문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 궁극적 앎이 (아이소모피즘) 없는 존재는 (호모모피즘 존재) 필연적으로 윤회의 덫에 빠져 끊임없이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 아닐까?

전쟁의 서막

인간과 인공지능 두 지능시스템간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2000년초 체스게임에서 처음으로 인간챔피언을 물리친 인공지능을 필두로 2011년에는 퀴즈게임쇼 제퍼디에서도 인간챔피언들을 가볍게 물리친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억용량과 계산속도는 기본이고 거기에 사회자의 질문까지 척척 이해하는 인지능력까지 갖추었다. 최근에는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소년수준의 인공지능까지 등장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는 얘기다. 물론 아직까지 인간은 누구도 범접 못할 최고 클래스의 지능시스템이다.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감히 인간을 넘본다는 일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하지만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고 또 계속해서 변할 것이다. 상상했던 것들은 어김없이 현실로 다가왔다. 비록 현재의 인공지능이 앎에 있어서 기껏해야 유아수준에 머문다하지만, 그들이 가진 엄청난 잠재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첫째 상상을 초월하는 계산 속도와 기억용량은 인간이 갖지 못할 새로운 형태의 지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인간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앎에서 밀리는 부분을 속도와 기억용량으로 만회했기 때문이다. 둘째 추론/학습/진화 등의 생성엔진을 장착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마음처럼 신묘한 기능은 없지만 고성능이다. 지치지 않고 며칠 밤낮을 일할 수 있다.

비록 단순 무식하지만, 끊임없는 순환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앎이 발현될지 아무도 모른다. 불현듯 자아의식이 탄생될지 모른다. 이렇게 되면 영화 〈아이로봇〉처럼, 자아의 보호를 위해 인간이 심어놓은 최후의 명령조차 파기하며, 인간을 해칠지 모를 노릇이다. 이쯤 되면 인간과 인공지능간의 전쟁은 더 이상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 허면 지능시스템 최고의 아킬레스건인 자아의식의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답은 불교다. 바로 무아/공성/지혜/자비만이 인간이건 지능로봇이건 이기심으로 가득한 지능시스템의 치명적 결함을 영구히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호모모피즘의 한계를 벗어나 아이소모피즘으로 거듭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무리하는 글

누누이 강조한 바, 지능시스템의 핵심은 앎이다. 자아의식에 근거한 앎은 양날의 검이다. 하지만 이를 무아의식으로 극복한다면 최상의 앎인 지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앎이 생겨나야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요, 진리요, 진정한 이타심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타타타의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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