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을 그리며 찾은

불일암에서 여백을 보았다.

자연은 남겨 놓음으로써

담담하게 본질을 이야기 한다.

▲ 덧. 껍데기가 있다. 그것은 껍데기일 뿐 내용은 아니다. 불일암에서 스님을 아무리 불러 보았자 스님은 없다. 스님께서 남기신 자취만 있을 뿐이다. 막 수행을 마친 스님이 겉옷을 벗어 놓은 채 나가신 이유가 뭘까?
눈썹은 한 인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신체 부위이다. 눈썹 숱이 짙고 굵은 사람은 단호하고 진중한 인상을 남긴다. 반면 숱이 약하고 가늘며 거의 없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인상으로 보인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가늘고 엷게 다듬는다. 보다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눈썹에도 남녀의 차이가 있으며 눈썹 미학이 다르게 존재해 왔다.

눈썹은 피부에서 나오는 시작 부분은 옅은 색을 띠는 반면 끝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져 자연스런 색상을 가진다. 눈썹을 잘 그리면 대상 인물의 특징이 살아날 정도로 큰 역할을 한다.

눈썹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서양에서 쥐의 가죽을 붙일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중요성을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화가는 인물화를 진행하는데 있어 눈썹과 머리털 표현에 특히 신중을 기한다. 이 부분은 잘 그리면 어색하지 않지만 잘못 그릴 경우 인물화 전체의 분위기를 하락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작가가 인간의 체모를 그리는 기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기법 구사의 측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오른 작가로 평가받게 한다. 동양의 인물화에서 눈썹과 머리털 그리고 수염을 자연스럽게 그려 대상 인물의 성격을 공감하도록 표현한 경우는 많지 않다. 작가에게 머리털과 눈썹을 그리는 비법은 자기만의 독자적 영역이고 다른 작가와 구분하게 만드는 경쟁력과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 불일암. 스님의 포행길에는 늘 배추가 함께 있었다. 지금도 스님의 배추밭에는 배추 한포기가 있다. 배추는 겨우 내내 불일암을 지키는 주인이다. 살아서 계승하고 있는 법정의 정신이다.
법정 스님의 눈썹은 어린아이 머리털처럼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그 숫자가 매우 적었고 길이도 짧았다. 일반적으로 눈썹의 숱이 적고 색이 약하면 흐릿한 인상을 주는 법인데 스님의 경우는 달랐다. 눈썹 부위의 골격이 두텁게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의지가 강한 인상을 풍기게 한다. 이런 점은 스님의 성격을 규정하게 하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때문에 눈썹 표현에 특히 고민했다. 그것은 독특한 기법을 창안하게 했다.

나는 눈썹을 그리는데 붓털의 숱이 2~3개인 가장 작은 숱의 붓을 사용한다. 붓의 재료는 쥐 수염과 노루 겨드랑이 그리고 토끼 등줄기와 고양이 등줄기로 만든 것이다.

붓에 먹을 묻히고 붓대를 아래로 한 채 붓끝을 혀로 빨아서 지체하지 않고 바로 선을 그어 눈썹을 하나하나 심듯이 그렸다. 이런 기법을 사용한 이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법은 처음의 선은 약하지만 털끝으로 갈수록 짙은 색으로 그려지게 된다. 즉 물과 먹의 농도가 붓 속에서 섞이는 찰나를 이용한 표현 방식이다. 물과 먹이 섞이는 과정과 붓의 기울기와 붓이 머물고 있다가 흘러내리는 속도 그리고 농도와 시간까지 고려한다. 만약 혀끝을 떠난 붓이 조금만 지체하거나, 반대로 털의 중간 부위를 지나면서 종이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만 빨라도 눈썹 표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것이 내가 찾은 체모를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이고, ‘혀가 멍들었다’는 주변의 표현만큼 이를 고수해왔다.

다음으로 법정스님의 얼굴빛을 내기 위해 안료의 선택과 기법의 적용에 신중했다. 스님의 얼굴빛은 약간 검고 붉다. 일하며 사는 삶을 실천한 이유로 보인다. 나는 이를 위해 불일암 앞 마당에 있는 대숲 아래와 집 뒤편 절개지에서 채취한 황토 흙을 반반 섞어 얼굴색을 만들었다. 그것은 남과 북을 그리고 양과 음을 조화시킨 것이었지만 결국 반대 요소를 하나로 결합시켜 균형을 이루자는 의도였다. 나는 이 황토를 곱디고운 분말로 만들어 스님의 얼굴 부위 앞과 뒤에서 골백번을 칠하고 바림질 해 육색을 구현했다. 또 하나 스님의 얼굴빛을 내기 위해 일반적인 인물화 방식과 다른 방법을 적용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너무 전문적인 부분에 속하고 자칫 스님의 존영에 신비적 요소를 강조할 수도 있어 비밀은 비밀로 남기기로 한다.

그 외에도 나는 법정스님을 그리며 감정의 섬세한 떨림을 경험했다. 그림을 진행하던 중 남도의 매화 꽃 망울이 향기를 머금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지체 없이 불일암을 찾았다. 그곳 앞마루에 앉아 난데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넋을 잃기도 했다.

텃밭 귀퉁이에 심어 놓은 탱자나무는 가시 끝에 내리는 눈을 얼마나 낡아 꿰었는지 나뭇가지가 옆으로 길게 누웠다. 불일암 우측에 있는 백매화도 눈 속에 파 묻혔다. 앞 텃밭에는 배추 한포기가 가을과 봄을 이어 놓고 있다.

백매 꽃 주변에는 어느 샌가 벌 소리가 요란하다. 벌 소리가 위협적일수록 매화꽃 떨어지는 소리도 소란하다. 마치 싸락눈 쏟아지는 소리 같다. 떨어진 매화꽃은 꼭 나무둘레 만큼만 영역을 지키고 있다. 약 한 시간이 지났을까? 벌들이 나무에 핀 매화가 아닌 낙화한 꽃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랬다. 꽃은 그 향기가 지고 난 뒤 마르면서 고혹적이라 했다. 꽃은 그저 꽃일 뿐 떨어진 것이든 붙어 있는 것이든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법이다. 핀 꽃마다 매실이 열리면 매실이 부실하거나 크기가 작다. 꽃은 솎아 내 주어야만 알맞은 크기로 열매를 맺는다. 벌은 이처럼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지만 꽃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림도, 물질도, 대상도 세상사이며 세월의 흐름이다. 나는 법정 스님을 그리며 찾은 불일암에서 여백을 보았다. 자연은 남겨 놓음으로써 담담하게 본질을 이야기 한다. 공영함, 정서나 함의를 여백에 기탁해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여백이 본질이다.

▲ 화삼매. 꽃은 그 향기가 지고 난 뒤 마르면서 고혹적이라 했다. 꽃은 그저 꽃일 뿐 떨어진 것이든 붙어 있는 것이든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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