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바퀴가 쉬지 않고 여여하게 화해서 돌아갈 뿐이다!

▲ 그림 최주현

내가 부처를 이루겠다 해도 아니 되고,
내가 안 하겠다 해도 아니 됩니다.
그저 내 앞에 닥친 거 마다하지 말고 가는 거 잡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한데 뭉쳐 놓는 그런 작업만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되는 겁니다.

큰스님 확실히 봄이 온 것 같죠? 확실히 봄이죠?

대중 예.

큰스님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사계절 없는 봄이 와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죠?

대중 예.

큰스님 사계절 없는 봄! 마음속의 봄맞이! 여여하게 봄을 활보할 수 있는 봄맞이 말입니다.
우리는 정신적인 50%의 맛을 모른다면 물질계의 50%에서 허덕거리다가 꺼져 버립니다. 영원한 것이 뭔지 허망한 것이 뭔지 그것조차도 가늠 못하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살아 계실 때에 모든 상대가 있고 인연의 법칙이 있고, 이런 반면에 공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이 없어지면 더하고 덜함도 없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지식들께서 망상과 졸음, 그 두 가지를 상당히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관(觀)할 때는 반드시 졸지를 말아야 하고 망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망상과 졸음을 얘기한다면, 그 졸리고 망상이 난다는 걸림에 걸려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잔다 깬다, 잔다 자지 않는다’가 붙어서는 선(禪)에 즉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망상이다, 망상이 아니다’라는 게 붙으면 거기 직결되지 못합니다.

물론 초발심(初發心) 때는 자경문(自警文)도 읽고, 계율도 엄하게 지켜야 하고 또 망상도 물리치고 졸음도 물리쳐야 되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가 살아나가는 관습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옛 조사들의 뒷발자취를 쫓아가도 아니 되고, 못났든 잘났든 자기 발자취가 얼마만큼이나 컸나, 한 짝이 크고 한 짝이 작으니까 한 짝을 얼마나 키웠나 하는 것입니다.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 불바퀴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네 생활도 다 돌아가고 있습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색(色)과 공(空)은 둘이 아니다’ 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를 처음부터 졸음을 금하면서 칼을 목에다 대고 하느니보다 모든 것이, 자는 것도 깨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몽땅,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나로 인해서 세상이 벌어진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면 나로부터 벌어졌으니까 나로부터 알아야 하지 않나? ‘졸린다, 졸리지 않다, 졸음을 쫓아야겠다’ 하는 것도 거기 놓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직결로 들어가는 코스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함으로써 이 ‘나’라는 혹성의 본래자성불(本來自性佛)은 그대로 둘이 아니게 얽혀서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감응이 되고 생각이 깊어집니다. 이 말을 또 해야 되겠군요. 말하자면 부모에게 몸을 받는다 하는 것은 집만 받은 겁니다. 자기 나오기 이전 영혼과 나오기 이전에 살 때 악업 선업을 지은 그 인연들이 전부 내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몸속으로 한데 부합이 됩니다. 부합이 되면은 그 안에 있는 중생들은 잘되고 잘못되고 그걸 모릅니다. 악업 짓고 선업 지은 그 인연에 따라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게 그것만이 아주 입력이 돼서 현실로 착착 나옵니다, 현실로. 그것들이 자꾸 나오니까 사람도 죽이게 하고, 강도질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되고, 또는 선한 일도 하게 하고 욕도 하게 하고 화도 나게 하고, 병도 오게 하고 애고도 오게 하고,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다가오는 그 모든 고를 말입니다.

그러면은 그거를 어떻게 해야 녹일 수 있는가? 이 주인공에 놓는 것을 용광로라고도 하고, 불바퀴에 닿기만 하면 탄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거기서 일어나는 대로, 수없이 일어나는 마음에 왜 간섭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깐 일어나는 대로 모든 거를 그 불바퀴에 놔라 이겁니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주인공입니다. 모든 것이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 ‘주인공에서 해결할 수 있다. 주인공에서 낫게 할 수 있다. 주인공에서 이끌어줄 수 있다. 나 아닌 나가 있다고 깨닫게 하는 것도 주인공이다.’ 하고 진실하게 구하고 진실하게 내가 있다는 소식을 가져오게 하는 거지, 이것이 벌써 졸린다 하면 졸리지 않은 게 따라붙고, 망상이다 하면 망상이 아닌 것이 따라붙죠.

이러니깐 수박을 놓고선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봐도 도무지 그 수박의 맛이 나오지 않고, 과거의 씨가 현실의 씨가 됐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씨를 찾으려고 자꾸 과거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현상만 생기는 겁니다. 이 모두가 생각해 보면 사람의 한생각에 몰락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돈오다 점수다 할 것이 없이 말입니다. 그것도 이름일 뿐이지만.

여러분께서 스스로 나와 내가 상봉을 해야 그때부터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에, 초발심에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셋째도 죽어야 한다. 내가 항상 그런 말을 하죠. 내 집의 전화부터 놔야 남의 집에서 전화도 오고 남의 집으로 전화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해서 통하는 것이지 그럭하지 않는다면 아니, 내 집에 전화도 놓지 않고 전화 올 때를 바라고 전화할 것을 원하고 있으면 그게 됩니까? 천년만년 있어도 안 됩니다.

내가 어두우면 불을 켜는 법이요, 또 없어서 고생을 하면 일을 하는 법이요. 안 그렇습니까? 졸리면 자는 법이요, 배고프면 먹는 법이요, 똥이 마려우면 소통이 돼야 하니까 똥을 누는 법이요.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이 모두가. 망상이다 망상이 아니다라는 게 붙으면 직결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조들께서는 진실하게 일념으로 구했습니다. 진실한 일념. 진실한 일념으로 구해야 구해지고, 진실한 일념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자체에 있다는 그 소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삼천대천세계 우주의 근본 자체를, 외국에서는 블랙홀이라고 말합디다마는 우리 부처님께서는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이 전체로 말할 것 같으면 불바퀴요, 또 전체가 둘이 아니면서도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걸로 봐서는 우리 개인 혹성 하나가 바로 또 불바퀴라는 얘깁니다. 불바퀴 자체가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요 한 것은, 색과 공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니까 하는 소립니다. 지금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돌아가고 같이 작용을 하지, 물질계는 물질계대로 놀고 정신계는 정신계대로 놉니까? 안 그렇죠? 생명이 있으니까 사시죠? 생명이 있으니까 생각을 하게 되죠? 생각을 하게 되니까 몸이 움죽거리죠? 이것이 바로 동시에 같이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뚱이의 혹성 하나가 개개인으로 있지만 포괄적으로 볼 때는 개개인으로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불바퀴가 쉬지 않고 여여하게 화(化)해서 돌아갈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러니 우리 조그마한 마음,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 마음이 우주 전체에 직결이 돼 있다는 그 사실, 또 이 세상살이 살림살이 전체가 가설이 돼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예요. 모든 일체 만물만생이 보이지 않는 중생이나 보이는 중생들이나, 보이지 않는 부처나 보이는 부처나 모두가 포괄적으로 통하고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통하고만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공생이며 공용이고, 공용이며 바로 공식화하고 공심(共心)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입니다. 불교는 어디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포괄적인, 끝간 데 없는 진리를 이름해서 바로 불교라고 한 겁니다. 불교라고 하는 이름이나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름이나 둘이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도 어떠한 것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어떠한 생각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어떤 말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기에 부처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고 깨고 이렇게 하는 거는 우리들이 삶에 의해서 질서를 지키고 모든 일들을 문란치 않게 하고,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적으로나 모든 일들을 그렇게 하기 위해서지만 이 진리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도 초월된 자리요, 밤과 낮도 초월된 자리요, 여자와 남자도 초월된 자리요, 동서도 초월된 자립니다. 늙고 젊고도 초월된 자립니다. 옛날에도 그런 말 했지요. ‘공동묘지에 가 보니까 남녀노소가 없더라. 남녀노소도 없고, 마음도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모두 늙었더라.’ 이런 말을 한 예가 있죠.
여러분 중에 질문하실 분 있으면 하세요.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면은 여러분 가슴에 채워지지 않을까 봐 질문을 하시라는 겁니다.

질문자1(남) 스님께서 마음공부 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항상 이끌어 주시는데요, 그래서 저도 스님께서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걸 믿고 열심히 잘하고 싶은데 자꾸 괴롭거든요, 마음이. 중심 잡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요. 많이 괴로운데 이렇게 괴롭지 않고 공부 잘하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

큰스님 이거 봐! 대신 똥 눠 주는 사람이 없을 테고, 대신 밥 먹어 주는 사람 없을 테고, 대신 죽어 주는 사람 없을 테고, 대신 아파 주는 사람 없을 테고, 대신 자 줄 사람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자기한테서 답답한 것도 나오고 자기한테서 고통스러운 것도 나온 거니까 자기한테다 되입력을 해. 카세트에 먼저 괴로운 입력이 되어 있다면, 괴롭지 않은 입력을 하란 말이야. ‘네가 있다면 괴롭지 않게도 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 입력을 해. 알아듣겠어? 그러면 앞서의 입력한 게 없어져 버릴 거야. 모든 것이 다 그래.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질문자2(여) 저는 엄마한테 여기 스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책을 보고 있는데, 자고 일어나면 자꾸 입안에서 피가 나고 잇몸이 좋지를 않습니다. 스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큰스님 이거 봐. 지금도 얘기했지. 내가 도와줘서 될 일이라면, 내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원한다면 서로 한마음으로 응(應)해 줄 수는 있다고. 그러니까 네 한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믿어 봐. 이 ‘참나’라는 거는 늙고 젊고도 없고, 여자 남자도 없어. 너도 예전에 늙었다가 또 어린애로 태어났을 테니깐 말이야. 알아듣겠어?
모든 사람의 그 한마음 속에 약사도 있을 테고, 관세음도 있을 테고, 아촉도 있을 테고, 아미타도 있을 테고, 또는 지장도 있을 테고, 용신·지신·산신·독성 다 있을 거야, 한 생각에.

질문자3(남) 스님께서 참나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유체와 육체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그 유체가 진정한 참나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허허허. 참 엉뚱한 소리 하고 있네. 아, 유체는 뭐고 무체는 뭐야?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사람 자체가 무체와 유체가,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이 다 한꺼번에 지금 돌아가고 있는데.

질문자3(남) 제가 더불어 한 가지 더 알고 싶은 거는 제 육신이 있고, 제 육신 안에 그 전생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또 하나의 혼(魂)이 있어 가지고 혼이 제 육체를 빌려서 하는 게 아니냐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혼이 진정한 저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혼(魂)이라는 것은 업식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참나의 본래자성불(本來自性佛)이란 더하고 덜함도 없고 움죽거리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능력이 광대해서 그대로 여여하게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몸속에 들어 있는 악업 선업의 중생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말씀하죠? 그렇듯이 위로는 참자기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라. 그것부터 제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둘로 보지 마십시오. 혼백이다, 무슨 생명이다, 무슨 나다, 이런 걸 다 초월하십시오.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움죽거리는 게 다 거기서 동시에 나오는 거니깐요.

질문자3(남)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4(남) 분별, 망상에 대해서 큰스님께서 지금 말씀해 주셔서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한 가지만 질문드리겠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까 큰스님 말씀대로 많은 망상이 나오고 그러는데, 순간 제가 느껴 본 것은 ‘망상이 있기에 보리(菩提)에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자리 즉, 한마음 자리에다 모든 것을 놓고 맡길 때 보리가 싹트는 것이며, 또한 분별이라고 하는 그 자체도, 망상도 바로 보리로 가는 하나의 도구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바른 생각인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그렇게 해 나가세요. 이 망상이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망상이라고 생각하면 망상일 것이고, 망상이 아니라고, 즉 말하자면 ‘아, 망상이 없으면 우리가 목석이지 발전이 없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망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발전으로서의 계기를 갖는 거죠. 그러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마음도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고, 창조력을 기를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돼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망상이다 뭐다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생각나는 대로, 즉 말하자면 좌선이다 입선이다 와선이다 행선이다 하는 것을 초월해서, 일할 때나 잘 때나 누웠을 때나 앉았을 때나 모든 걸 막론해 놓고 ‘그놈이 있으니까 하지. 들이고 내고 하는 놈이 그놈이다.’ 하고, ‘그놈은 또 무엇인가?’ 하지 말고 ‘그놈이 있다’라는 거를 전제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그놈이 무엇인고?’ 하는 생각을 하면은 ‘무엇인가?’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맛도 못 보고 작년 씨가 올로 이렇게 온 거를 모르고, 작년 씨 찾다가 해 다 보내죠. 그러니까 모든 것은 그렇게 하십시오.

질문자4(남)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늘 생각해 왔는데요, 물론 이렇게 시간이란 개념을 떠나서 큰스님 법문을 듣고 공부를 온 가족이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가는데, 한편으로는 제 자신이 뭘 얻었다는 개념보다는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좀 점검해 보고 싶은데,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경계에 부닥침에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도반으로서 말씀하시는 걸 보면 ‘경계가 크게 온다.’ 어떤 사람은 ‘경계가 작게 온다.’ 그러면 그분들이 훌륭하신 분들은 아닙니다마는, 나름대로 경계가 크게 왔을 때 큰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냐? 혹 경계가 작았을 때는 어떻게 그냥…. 물론 조그만 것 큰 것 할 것 없이 전부 놓아 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이게 정말 제대로 공부가 돼 가는 것인지요. 한편으로 잔잔한 바다같이 순항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것도 또한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또 큰 경계가 와야 크게 깨닫는 것 같은 그런 착각 속에 빠지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깨달음의 그러한 정도가 꼭 경계의 크고 작음에 관계가 있는 것인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 큰스님 가르침대로 열심히 가고 있다고 느끼고 큰 경계가 없음을 또 기뻐하거든요. 그러면서도 이게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답보 상태인지 그게 구별이 잘 안 가서 여쭈어 봅니다.

큰스님 세상에 공안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듯이 모든 경계에 끄달리지 마세요. 이 모두가 내가 부처를 이루겠다 해도 아니 되고, 내가 안 하겠다 해도 아니 됩니다. 그저 내 앞에 닥친 거 마다하지 말고 가는 거 잡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한데 뭉쳐 놓는 그런 작업만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되는 겁니다.

질문자4(남) 저의 가슴에 항상 봄이 와서 감사합니다.
큰스님 하하하.

질문자5(남) 테이프로 법문을 듣다가 의심이 나서 스님께 물어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저희들 일체 중생이, 또 우주 만물이 이름은 다 각각 달라도 하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윤회 법칙에서 본다면 육도 사생(六道四生)의 윤회를 할 때에, 만물 중에는 유정물과 무정물, 동물 식물 일체가 다 포함되는데, 육도 사생으로 본다면 유정물이기 때문에 어떤 식(識)이 있는 세계로서의 윤회 법칙이 성립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님 법문 중에서 산에서 고행하시는 중에 어느 나무 한 그루가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 그 나무 자체의 그 이전 세계를 보니까, 물속에 있는 어류 중생이 아니었나,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데 잘못됐는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제 생각으로는 일체 중생이 하나라고 하지만 윤회 법칙에 있어서는 분명히 동물과 식물이 구별이 되고 또 동물이 식물 된다는 그런 윤회의 말은 못 들어 봤습니다. 어떻게 해서 동물과 식물이 구분이 되며, 동물은 여전히 동물로만 진화하는 윤회 법칙이 성립하는가, 아니면 어류가 나무가 되듯이 식물도 될 수 있는가? 궁금해서 나왔습니다.

큰스님 옛날에 어느 사람이 죽어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의식만 가지고서 가다 보니깐 어느 나무에 도달했더랍니다. 그래서 목신이 되었답니다. 그 마음과 그 마음이 한데 합쳐서 말입니다. 이게 모든 게 없는 소리가 아니라, 모두가 사생(四生)·육도(六度)·만행(萬行) 하는 것이 다 그냥 그대로 한자리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려면요, 책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너만이 일러 줄 수 있다. 너만이 알 것이다.’ 하고 모든 걸 거기다 놓고 가세요. 이것은 글자 공부 하고 이론 공부 하고 또는 지식 공부 하고 경서 공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 답이 나옵니다.
질문자5(남) 예. 계속 수행하겠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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