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국제선센터 간화선 법회_김호귀(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 김호귀 교수는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묵조선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묵조선 연구〉, 〈묵조선의 이론과 실제〉, 〈묵조선 입문〉, 〈선과 좌선〉, 〈선문답의 세계〉, 〈조동선요〉, 〈현대와 선〉, 〈게송으로 풀이한 금강경〉, 〈길장 금강반야경소〉, 〈금강경 주해〉, 〈규기 금강경찬술〉, 〈원효 열반경종요〉 등의 저서 외 기타 다수의 논문이 있다.

 禪은 수행 성격 가장 짙은 가르침
본래 성품 자각해 일상서 구현하는 것
경험이 대대로 축적돼 전승되기에
반드시 스승과 도반·지침이 필요
조사선…선법 특징 잘 구현시킨 선풍


중국 선종(禪宗)과 한국 선법(禪法)은 그 명맥을 달리한다. 달마로부터 혜능까지 이어져 마침내 교단이 성립된 중국 선종은 종파가 아닌 사상과 법매의 일종으로 한국에 전파된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교수는 3월 28일 동국대 국제선센터 간화선 법회에서 ‘선의 역사(禪之 歷史)’를 주제로 강의했다. 김호귀 교수는 “선의 발생은 불교의 발생과 같은 시기”라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침을 터득한 방식과 선은 그 명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선종은 중국과 한국에 전래되며 동아시아 불교문화에 장착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연의 요지다.

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구하다
선은 깨침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불교가 시작된 이래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일관되게 깨침의 추구를 향한 행위였습니다. 불교를 구축하고 있는 두 가지 축을 지혜와 자비로 간주할 경우 자비에 중점을 둔 것이 중생제도의 비원이라면 지혜에 중점을 둔 것은 깨침을 위한 수행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비는 처음부터 지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부파불교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도 깨침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불교의 많은 가르침 가운데서도 선은 수행의 성격이 가장 짙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정작 선의 성격은 무엇이고 어떤 것인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몇 가지로 한정하여 그 기본적인 성격을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선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인 이상 좌선이라는 수행을 통하여 자기의 본원(本源)에 철저하여 대립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둘째, 선은 깨침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항상 대오(大悟)와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깨침은 법에 대한 깊은 체험으로서 법과 자신이 몸소 일치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법에 철저하다는 것은 자기를 구명(究明)하는 대오를 말합니다. 그 대오는 실로 생명의 근원적인 통일로서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도 하고, 작불(作佛)이라고도 합니다.

셋째, 선은 자신을 긍정합니다. 그래서 절대타자로서 초월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심즉불(心卽佛)의 입장을 취합니다. 그 사상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는 말은 범부와 부처의 모순대립을 근원적으로 회통시킨 것입니다.
넷째, 선은 언어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경전의 문자에도 한계를 정하고, 또한 그 절대성을 부정합니다. 선에서는 불립문자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개념의 실체화를 배척하는 것이지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자에 휩쓸리지 않고 도리어 문자를 활용하기 때문에 불리문자(不離文字)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선은 발견입니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성품을 자각하여 일상의 생활에서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험이 대대상전(代代相傳) 축적되어 전승되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과 도반과 지침이 필요합니다.

여섯째, 선은 본래성의 그대로를 존중합니다. 새로운 무엇이 되기 위한 것[爲]이 아닙니다. 그와는 달리 지금 자기 이외의 무엇이 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하자면 무엇도 아닌[非] 지금 자신의 어떤 것이 되는[卽] 것입니다. 그래서 선은 여기를 벗어난 다른 것이 아닌 즉금의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禪非]. 분별심이 없는 사량[非思量]이 그렇고, 따지고 비교하는 사량을 하지 않는 마음[非心]이 그러하며, 당체의 사량[卽思量]이 그렇고, 망상과 번뇌가 없는 생각[無念]이 그러하며, 현실 그 자체인 마음[卽心]이 그렇고, 사량을 초월하여 자각하고 작용하는 마음[平常心]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선법의 특징을 가장 잘 구현시킨 선풍이 조사선(祖師禪)입니다. 조사선은 달마조사로부터 전승된 가풍을 가리킵니다. 조사선은 이후 당나라 시대에 더욱더 다져지고 발전되었으며, 송대에는 소위 간화선과 묵조선이라는 새로운 수행방식을 창출시켰습니다. 간화선과 묵조선은 모두 조사선풍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으로 일종의 수행의 방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간화선은 화두참구를 통하여 깨침을 목표로 하는 수행방식이고, 묵조선은 좌선수행을 통하여 본래성불의 도리를 지금 그 자리에서 몸소 구현하는 수행방식입니다.

부처로부터 시작된 선
이러한 선의 원류(遠流)는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 고대 인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인도에서 실행되고 있던 요가수행의 형태 및 방법은 불교가 발생한 이후에 형성된 선수행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의 직접적인 원류(源流)는 붓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붓다가 깨침의 방법으로서 활용한 것이 곧 선이었고 선으로 제자들한테 수행하는 가르침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선은 붓다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붓다가 선의 수행을 통하여 깨침을 터득한 이후로 불교의 역사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선수행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요가 내지 명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굳이 그 차이를 말하자면 궁극적인 목표를 무엇으로 간주하느냐 하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선과 요가는 모두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가다듬는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여기에서 요가의 목표는 후대에는 해탈이라는 목표도 가미되었습니다만 본래의 궁극적인 목표는 몸과 마음의 조화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명상의 목표는 마음의 안정을 우선시 합니다.

이에 비하여 선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침입니다. 그 깨침을 위해서 몸을 추스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제어하고 집중하며 통일합니다. 이로써 선에는 당연히 명상적인 요소 및 요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선이 여타의 수행과 다른 점입니다. 나아가서 그 깨침의 결과로 올바른 지혜가 터득됩니다. 올바른 지혜에서는 필연적으로 보편적인 자비가 도출됩니다. 그 자비야말로 자신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로써 불교에서 추구하는 지혜와 자비는 모두 선으로부터 유래하였고 선으로부터 전승되었으며 선으로부터 전개되었습니다.

붓다는 이와 같은 선을 선택하여 수행을 하였고 깨침을 터득하였으며, 나아가서 선의 방법을 더욱더 보편적으로 개발하고 전승하여 교화의 방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선을 통한 수행과 정진으로 매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선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설하는 경전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선경(禪經)에서는 특히 호흡과 관련된 내용이 중요하게 간주되었습니다.

붓다의 선정주의는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한 해탈의 방법이었습니다. 때문에 붓다는 그동안 초췌했던 육신을 추스르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고요히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붓다가 경험한 선정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흔히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곧 붓다의 사선(四禪) 수행입니다.

초선은 번거로운 현실을 벗어나 고요한 경지를 맛보는 경험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아만과 의심에 찌들어 있다가 잠깐이나마 그로부터 벗어나 느끼는 내면의 순화였습니다. 때문에 이생희락(離生喜樂)이라 합니다. 일상생활을 벗어나 기쁨[喜]와 즐거움[樂]을 경험하는 것으로 아직은 거칠고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습니다. 제이선은 선정을 통한 기쁨과 즐거움의 경험으로 정생희락(定生喜樂)이라 합니다. 선정으로부터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을 의미하는데 거칠고 미세한 번뇌가 모두 사라집니다. 제삼선은 지속적인 선정을 통하여 기쁨마저 벗어나고 즐거움만을 경험하는 경지로서 이희묘락(離喜妙樂)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기쁨[喜]와 즐거움[樂]이 구분되는데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즐거움을 희(喜)라 하고,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락(樂)이라 합니다. 제사선은 일체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아만과 의심을 여의고 즐거움마저 벗어나 모든 사념이 고요해지는 적정상태인 사념청정(捨念淸淨)의 경지로 분별적인 고(苦)와 락(樂)을 초월하기 때문에 불고불락(不苦不樂)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사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희열(喜悅) → 행복(幸福) → 평정(平靜) → 평정의 지속[涅槃]이 됩니다.

붓다는 곧 초선으로부터 제사선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인 수행을 통하여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깨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최후로 제사선에서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의 중도균형을 바탕으로 깨침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그 경험을 지관균형(止觀均衡) 내지 지관균등(止觀均等)이라 합니다. 그것은 사마타의 요소와 위빠사나의 요소가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중도의 상태였습니다. 이로부터 점차 사선은 보다 세분화되고 발전하여 팔정(八定)의 개념으로 설정되어 사선팔정(四禪八定)의 계위가 출현하였고, 나아가서 멸진정(滅盡定)까지 설정되어 구차제정(九次第定)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중국 선종과 한국 선법의 차이
중국의 선종(禪宗)과 한국의 선법(禪法)은 약간 다릅니다. 중국 선종이라는 것은 선을 중심으로 한 교단 내지는 종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국 선법이라는 것은 중국 선종에서 우리나라에 선이 전래될 때 종파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사상이나 법매, 또는 개념 등으로 전래됐기 때문에 우리는 선법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달마로부터 비롯된 중국 선종은 남종 선법을 바탕으로 전개됐습니다. 보리달마는 6세기 초에 중국에 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때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약 500여년 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전래와 선의 전래는 그런 점에서 시기가 같지 않습니다. 사실 6세기 이전에도 선은 있었고 전래된 경전에 따라서 중국 사람들이 선수행의 일종을 하긴 했지만 그 시기는 오늘날 선종의 역사에서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선종의 역사는 달마를 초시로 보기 때문입니다.

달마로부터 전래된 중국 선은 약 200년 간 형성시대를 맞이합니다. 다른 말로 초기 선종 시대라고도 합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순선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순선의 시대라는 의미는 달마대사로부터 혜능대사까지 선이 전해지며 한 스승 아래 한 제자만 두는 정통의 맥을 잇던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혜능으로부터 당 시대 이후 오대시대까지 약 200년간은 선이 가장 크게 발전하던 시대라고 해서 선의 발전시대라고 합니다. 또는 황금시대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 다음 오대시대 이후 송 대까지 약 3백 년 동안은 선풍이 계승되었다는 의미로 계승시대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송 대 이후 명나라, 청나라에 이르기까지를 계승 이후 쇠퇴기라고 부릅니다. 그간에 당 말기부터 오대 시대에는 선종오가의 분립으로 나타났고, 송대에는 새로운 선수행법의 창출을 보였습니다. 순수한 선사상 외에도 정통사상, 밀교사상 등 수행법의 보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명대 이후 선정융합(禪淨融合) 내지 수행법의 보편화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나라 법랑 스님이 선법을 전한 시초입니다. 중국의 달마와 같은 존재이지요. 법랑 스님이 도진대사 아래에 있다가 신라로 와서 신행 스님에게 중국 동산불교의 선법을 전하는 데 이것이 우리나라 선법 역사의 최초가 됩니다. 법랑 스님은 700년 대 중반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는 이미 삼국통일이 되어있었고 200년 전 법흥왕 때 불교가 전해져 들어왔습니다. 이후 200년이 지난후에 비로소 선법이 전래된 것입니다. 사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법랑 스님 이전에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등에 의해서 불교 교리가 보편화 되어 있었으며 선법의 일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원효 스님은 많은 선 교리를 전하긴 했지만 우리 선법의 역사로는 법낭 스님이 최초의 선법을 전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고려 중기의 선법은 거사선의 유행과 함께 특히 송 대의 임제선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고려시대는 사굴산문 및 가지산문의 영향력이 지대하였고, 고려 말기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의 법맥으로 계승되어 청허휴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등사서를 통한 법맥의 강조와 더불어 사기(私記)의 출현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