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곧 이 자리에 있다!

▲ 그림 최주현

오로지 자기 주인공한테만 맡겨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소리를 들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걸 봤고,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눈에 거슬린 거지 내가 없이 어떻게 거슬립니까?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으려면
질문 끊임없이 들고 나는 습기를 녹이고 항복 받고 싶어서 마음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단체에 소속이 되어 공부를 하다 보니 저의 마음에 집중하기보다는 주위 도반들의 모습에 울고 웃고 기뻐하고 실망하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금강경에도 내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은 중생심을 내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는데요, 제 마음을 항복 받고 주위 도반들과 더불어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질 때는 언제나 나를 세우지 말고, 남을 참견하지 말고, 주변의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남의 탓을 하지 말고, ‘남이 이렇게 해서 이렇다.’ 이러지 마세요. 남의 탓이 절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놨을 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놨을 때는 그것은 스스로 돌아갑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스스로 돌아갑니다. 완화되고 그것이 아주 스무드하게 돌아가는데, 말로 이게 틀리다 저게 틀리다, 이 사람이 틀리고 저 사람이 틀렸다고 이런다면은 공부하는 거는 틀려 버렸고, 또 한 가지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만 벌어져 가지고 싸움만 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공부하는 데 심중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그러한 관습적인 습을 몽땅 떼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 탓 안 한다. 남을 원망 안 한다. 남을 증오 안 한다. 남의 말에 끄달려서 돌아가지 않는다. 남을 참견 안 한다. 모든 것은 안으로 굴린다. 참견을 안 하되 참견을 할 수 있는 거는, 내 앞에 닥친 참견은 해야지요. 이 도량에서도 만약에 뭐가 잘못 돌아간다 이럴 때는 자기 생각에, 주인공에 맡겨 놓고 돌아가게 해야지, 이걸 말로 발설을 하고 이 사람이 어떻고 저 사람이 어떻고 이런다면 일이 하나도 해결이 안돼요. 오히려 바깥으로 더 커지죠. 이런 건 다 놔 버리고 자기한테만 오로지, 자기 주인공한테만 맡겨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소리를 들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걸 봤고,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눈에 거슬린 거지 내가 없이 어떻게 거슬립니까?

그런 거를 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끝없는 옛적부터 우리가 가지고 살아온 습을 녹일 수 있으며, 어떻게 내가 그것을 항복을 받을 수 있으며, 또 항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항복을 받고 내가 항복을 하는 건데, 항복을 받는 사람도 나요 항복을 하는 사람도 나다 이겁니다. 육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삼십이상(三十二相)이 구족(具足)하다.’는 그런 말이 있듯이 그대로 산 부처다 하는 겁니다. 산 보살이다, 산 법신이다 이거예요.
그러니 이게 정법이다 사법이다 하기 이전에 그걸 다 놔 버리고, 못났든 잘났든 문이 아니든 문이든 한번 엎드러져 보고 돌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큰 경험이며 보배를 크게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 남의 말로 ‘팔만대장경에 이렇게 해 놨으니까 요렇게만 가야겠다.’ 이건 모두가 착이에요.

예전엔 그렇게 등대가 있고 등잔이 있고, 기름이 있고 심지가 있고 성냥이 있고 손이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손도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손이 들어지는 거지 그게 억지로 들어지나요? 그리고 또 우리가 책을 본다 하는 것도, ‘글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을 담습니까?’ 이런 것도 있어요. 글자를 쓸 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 거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글을 썼겠습니까? 그래서 글을 보지 말고 그 글 속의 백지의 마음을 봐라 이겁니다. 글씨가 나를 보고 내가 글씨를 보지 말라 이겁니다. 그 글씨 속에 있는 거를, 그대로 글씨 써 놓은 대로 이름을 가지고 상징하지 말고 그 속에는 뭐가 있다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운문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어느 날 대중을 모아 놓고 “이 세상의 모든 게 왈가왈부하는데….”, 다시 말하면 ‘광활한데’ 하는 소립니다. 그러니깐 복잡다단하다는 얘기라고도 볼 수 있겠죠. 종이 울리니 어째서 너희들은 칠조 가사를 입느냐고 하셨답니다. 종소리를 듣고 어째 칠조 가사를 입느냐는, 뭣 때문에 그 칠조 가사를 입느냐 이런 말이죠. 거기에는 참 심중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대중들은 제각기 달리 들은 겁니다. 똑같이 들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아주 심중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을 한마디 간단하게 하셨건만, 그건 말씀이 아닌 말씀이겠지요?

가사에는 칠조 가사, 구조 가사, 오조 가사가 있는데, 최초로 가사를 두를 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한 폭이면 한 폭, 두 폭이면 두 폭, 한 오락지면 한 오락지 이렇게 시주를 한 거니까, 오조는 조그만 오락지들 모아서 한 거고, 칠 폭을 얻으면 칠조로 하고 또 구 폭을 얻으면 구조로 하고 이렇게 한 걸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심중 깊이 들었겠죠. 우리가 그 뜻을 한번 음미해 본다면 대답을 가벼이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때에 따라서 내 생각의 범위 내에서 내 생각만 하고 남 생각은 안 하고, 남의 속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면서 내 생각대로 말을 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 생각의 차원에 따라서 옳다고 주장하고, 또 내가 아니면은 이런 건 못한다고 하는 자만심, 이런 것 때문에 그르치는 겁니다, 모든 게. 그런데 벌레 하나도 허투루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시와 적선에 대해서
질문 제가 아는 분이 인도에 가서 거지에게 돈을 주니까 인도의 거지가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면서 다시 또 달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돈을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느냐 하니까, 그 거지가 하는 얘기가 “당신이 공덕 베푸는데 왜 내가 고맙다고 하느냐. 당신 복 지으라고 그러는데 뭣이 나쁘냐.” 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더랍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절에 ‘오늘 얼마 갖다 줘야지.’ 하고 ‘어디 어디서 왔는데 오늘 요거만 냅니다.’ 하고 돈을 내고 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보시의 과보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그걸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줬으면 준 대로 그냥 받는 것이, 받는 것이 아닌 받는 것이지마는,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때에 돈을 주고 물건을 샀는데 아, 내가 돈 준 거 생색내겠습니까? 그와 같거든요. 그런데 굳이 또 달라는 건 뭡니까? 굳이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은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만한 것 하나를 시주를 한다 하더라도 내 주인공에, 이게 주인공과 더불어 일체제불의 마음이 한마음이기 때문에, 나와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다 할 때 내가 했다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갖다 내는 거지 스님네들을 위해서 갖다 내는 건 하나도 없어요. 생각들 해 보세요, 스님들을 위해서 갖다 주는 게 있던가 없던가?

그러나 이 스님네들이 잘못 생각하고 ‘나는 스님이니깐 날 갖다 줬겠지.’ 한다면 이거 오산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쓰레기를 치워 달라고 갖다 주는데 내 이 고깃덩어리가 치울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나요? 그러니까 그 모든 일체제불의 한마음, 즉 불바퀴에다가 집어넣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받은 사이도 없고 준 사이도 없이 보시를 하고, 누구한테 무엇을 건네주더라도 조건 없이 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공덕입니다.

칠식과 팔식, 여래장에 대해서
질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같은 논장을 보면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장식(藏識)이다, 여래장(如來藏)이다 하는 그런 말들이 나옵니다. 소위 팔식(八識)이라 그러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할 때의 그 마음과 칠식이다 팔식이다 하는 그 식(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그거를 여러 마디로 할 것 없이 아주 축소해서 말을 하죠. 칠식(七識)이다 하는 것은 우리네 육근(六根)이 공(空)해서 돌아가는 거를 하나로 묶어서 한마음이 된다면 그것이 칠식입니다. 그리고 한층 더 나아가서 내 몸을 떠나서 더불어 같이 이 세상 사무 사유를 한데 합쳐서 한마음이 된다면 팔식(八識)입니다. 좁게 따진다면 칠식이요, 넓게 전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한데 합친다면은 팔식에 속합니다. 칠식이래도 하나요 팔식이래도 하나입니다. 팔식 하면 벌써 칠식은 없어지는 겁니다.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팔식 하면 팔(八)이라는 건 없어지고 식(識)만 남아서 그건 구경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래장이 되는 거죠. 여래라는 것은 일체 만물만생이 다 송두리째 둘이 아닌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없고 너도 없어지는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기 때문에 모두 부처 자리 아닌 자체가 없고, 부처님의 작용 아닌 게 없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그 자리가 되기 때문에 여래장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질문 친구의 권유로 뇌사 상태에서 죽음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하버드 신경외과 의사의 실제 기록인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뇌가 기쁨도 슬픔도, 삶도 죽음도, 전생과 깨달음마저도 주재한다고, 과학 학술지에 150여 편이 넘게 논문을 게재했던 최고의 인텔리가 천국을 경험한 책을 보면서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생활 속에 얽매여 살아가다 보니 보이지 않는 세계가 믿어지지도 실감이 나지도 않습니다. 진짜로 있기는 있는 것인지요?

답변 천당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곧 이 자리에 있다 하는 것인데 한마디 더 하자면 독사같이 살면 독사의 무명을 쓰고 나오죠. 지옥이다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여러분이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나갈 때의 생각과, 속으로는 사람으로 살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죽으로는 말의 모습을 가졌을 때, 소의 모습을 가졌을 때, 개구리의 모습을 가졌을 때, 독사의 모습을 가졌을 때, 벌레의 모습을 가졌을 때, 가지각색의 모습을 가졌을 때에 그 답답함이란 어떻겠습니까? 달리 지옥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영가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탄생을 하기도 한다 이겁니다. 자기가 지은 대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이런 말 하는 거를 무시하지 마세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영령들의 의식은 첫째, 살아서 의식을 가졌을 때에 ‘나’가 항상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나라고 했기 때문에 죽었어도 항상 나라는 게 있는 걸로 알고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니는 데는 자기 몸속의 의식들이 전부, 이 수십억 마리가 그냥 깔려 있으니 한 발자국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악업 선업의 그 업식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그리고 둘째는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강을 사이에 놓고 건너가지 못해요, 빠져 죽을까 봐. 그러니까 물가를 뺑뺑 돌면서 오백 년을 돌아도 배가 오질 않는 거죠. 그래서 이 공부를 하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불바퀴를 넘어서야 될 텐데 뜨거워서 타 죽을까 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 또한 ‘나’ 라는 걸 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겁니다. 하나만 알면 나라는 게 공해 버려서 무조건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걸 팽개치게 될 텐데, 그거를 놓지 못해서 항상 그 업식에 밟혀서 못 나오고, 자기 의식대로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못 나오고 불에 타 죽을까 봐 못 가고 이래서 자기의 갈 길을, 궤도를 넘지 못한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서 그렇게 넘기보다는 살아서 깨달아야 그게 열반입니다. 살아서 깨달음이 열반이지 죽어서 혼백이 가는 것이 열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말도 할 게 없죠. 살아서 깨닫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어떻게 깨닫습니까? 죽으면 살았을 때 그 업식이 그대로인데. 그래서 살아생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우리가 그 발자취를 걸머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하나 놓고 하나 떼어 놓고, 또 하나 놓고 또 하나 떼어 놓고, 하나 놓고 하나 놓고, 이렇게 걸음을 걷지 않습니까? 일체 만법이 다 우리가 걸음 걷듯이 그렇게 놓고 돌아가는 겁니다, 지금. 항상 얘기해 드리죠, 그렇게 놓고 간다고. 자연스럽게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자연스럽게 남편 노릇을 하고, 자연스럽게 형님 노릇을 하고, 아들 노릇을 하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돌아간다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돌아가니 어떤 노릇을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는 게 공한 도리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말로 할 땐 실감이 안 납니다. 자기가 진짜로 지옥고에 들어서 봐야 ‘정말이지 이거는 이렇게 할 게 아니로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열 아들을 두었는데 이리로 가라면 저리로 가고 얼마나 청개구리 짓을 하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하기를 “나 죽으면 산에다 묻어 다오.” 그랬거든요. 그러면 물가로 갈 줄 알고. 그랬는데 돌아가시니까 아이, 살아생전에 영 말을 안 들었으니까 죽어서나 말을 듣겠다고 아, 산으로 올라가지 뭡니까? 그런데 막내아들한테는 “나를 죽으면 물에다 넣어 다오. 관을 물에다 넣어 다오.” 그랬죠. 그래서 그렇게 산으로 올라가려고 그러니깐 막내아들이 밤중에 몰래 지게를 대어 놓고는 관을 져다가 강물에 갖다 넣는데 그냥 쩍 벌어지면서 그냥 들어가거든요.

그렇게 하고 나서 큰아들 죽고 작은아들 죽고 뭐, 셋째 아들 넷째 아들 모조리 죽고 막내아들만 남았는데, 아버지는 죽어서 저승 천자가 되시고요, 아들들은 죽어서 소가 됐어요. 소가 되어서 전부 외양간에 매여 있는데 막내아들이 꿈을 꾸니까 환경이 그렇게 돼 있더란 말입니다. 꿈에 “음매” 하면서 눈물을 줄줄줄 흘리고 그러니깐 아버지가 있다 하는 소리가 “저거는 너의 큰형이다. 저거는 너의 작은형이다. 그렇게 말을 안 듣고 남을 해코지를 하고 그랬으니 소가 돼서 남의 일을 봐 줘야 되고, 언짢은 일 한 거를 다 저걸로 갚아야 하느니라.” 하더랍니다. 그런데 소 무명을 쓰고 나왔으니 자기는 “음매 음매” 아무리 말을 해도 사람이 못 알아듣는 거죠.

실제로 자기가 당해 보지 않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러니까 허술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한 철 날 동안에 열심히 내 탓으로 돌리고 남을 원망치 말고,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러운 행동으로써 남에 원망 같은 거는 하지 않고 모든 일을 내 탓으로만 돌린다면은 그게 바로 내 마음 발견하는 데 지름길입니다. 모든 거 내 탓으로 돌리고 그 한 구멍에, 두 구멍도 아닙니다. 구멍 없는 구멍에다가 모든 거를 놓으면은 거기서 일체 만법이 나고, 일체 만법을 거기다 놓고….

이런 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게 일상생활 속에서 전체 살아나가는 게 여러분이 살지 딴 사람이 살아 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자기를 못 믿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이끌고 다니면서 모든 걸 그렇게 살아나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길을 걸어가다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됩니다. 자기에게 잘못된 일도 자기만이 해결할 수 있는 거지 딴 데서 보태 주거나 뺏어 가거나 그런 게 없습니다.

깨달으면 한 물건도 없는 것인지요?
질문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돈오점수에 대해서 아직까지 미심쩍어 하는 분들이 있는데, 깨닫고 난 뒤에는 한 물건도 없다고 하는 그 의미와 깨닫고 난 뒤에는 보임을 잘해야 된다는 그 의미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깨닫고 나서 보임을 잘해야 한다는 것도 맞고,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건덕지도 없다 하는 말도 맞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자성 부(父)와 자성 자(子)가 한데 합쳐지면 깨닫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데 합쳐졌을 뿐이지, 즉 자기가 씨를 심어서 싹이 났을 뿐이지 자란 것은 아닙니다. 예? 자라려면 그만큼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머리 깎은 사람들이나 머리 안 깎은 사람들이나 입산을 할 때는 ‘이 무명초를 다 끊어 버리겠습니다.’ 하고선 다짐을 하고 끊어 버렸습니다, 아주 애당초에. 그랬는데 이게 형식적으로만 끊어 버렸지 수행해 나가는 데 진실하게 무명초 하나하나를 끊어 버린 게 아닙니다. 이 마음을, 모든 것을 거기다 모아서 놓는 데에 이 무명초가 다 끊어지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지금 점수(漸修)다 하는 거는, 그런 수행을 하는 나를 발견했으면, 보림이라고 해도 좋고 보임이라고 해도 됩니다. 즉, 남의 탓을 하지 말고 남을 원망하지 말고 어떤 게 있어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로 밀어 넣고, 나한테 그냥 놓고 또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보임입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가 놓고 가야 합니다. 악이든지 선이든지 다 말입니다. 그래서 잘되는 거 감사하게 놓고, 안되는 거는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다.’ 하고 놓고, 이렇게 해서 둘 아닌 도리를 또 두 번째 깨달아야 합니다.

또 세 번째 가서는 둘 아닌 도리를 탁 알았는데 나투는 도리를 몰라. 전깃줄과 전깃줄을 대어 주고 떼어 주고 대어주고 떼어 주고 하는 도리를 모른다면은 모두 일체 여래라고 할 수가 없다. 또 일체 중생이 나 아님이 없다 하는 것을 말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투는 데, 즉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이렇게 나툴 줄을 모른다 이럴 때는 그 나투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세 번째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런데 세 번째 깨달음이 있어서 만약에 나툼의 도리를 안다면 일체가 나 아님이 없이 모두가 난데, 자기가 자기 꺾는 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화해서 자꾸자꾸 돌아가는데, 어떤 거 됐을 때 내가 됐다고 하고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땐 점수(漸修)라고 해도 맞고, 그게 끝났을 때는 ‘아, 너도 나도 다 둘 아니게 돌아가는데 이거는 하나도 없다.’ 하는 소리도 맞고, 둘이 다 맞으니까 둘이 다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절대적으로 이 도리를 물렁물렁하게 봐서는 아니 됩니다. 형상을 보고 무시하거나 그래서도 아니 됩니다. 이거는 형상을 배우는 게 아니라 형상과 정신과 둘 아니게 작용하는 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고도 없고 일체 만물만생이 생명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전력이 똑같듯 생명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거를 알려면 모두 하나도 버림이 없어야 되고 버림이 없어야 항복을 받고, 항복을 받아야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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