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이 없이 하는 것이 바로 죄를 안 짓고 하는 겁니다!

▲ 그림 최주현

병 붙을 자리가 없다 하는 것을
완전히 터득을 하시고
물리가 터지시려면 나로부터,
나부터 발견하십시오.

(지난 호에 이어서)
신도회장 큰스님께서 이렇게 시카고에 오셔서 귀한 말씀을 주시고 또 질의 응답 하실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가 상당히 어렵고, 특히 한국에서는 큰스님 뵈려고 매일 12시부터 1시까지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가 미국에서는 몇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그런 기회니까 이 기회를 이용하셔서, 어떤 질문이든지 좋습니다.

질문자1(남) 아까 큰스님께서 말씀 거의 끝마무리 무렵에서요, 이 세상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업보도 지은 거 없고 원죄도 지은 거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거기에 대해서 좀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큰스님 그러죠. 여러분은 여기 발을 붙이고 지금 내가 산다 이러시지만 그 사는 게 지금 찰나에 이렇게 고정됨이 없이 막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걸 표현할 때, 아버지가 됐을 때는 의연히 아버지 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여보!” 할 때 의연히 남편 노릇을 합니다. 또 “얘, 아무개야!” 하고 부모가 부를 때는 의연히 자식 노릇을 합니다. 이렇게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위치 속에서, 그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그저 찰나로 이렇게 돌아가는 판국에 거기 업보 붙을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업보가 있다 하면 여러분이 마음에 따라서 ‘나는 업보로 인해서 이렇다.’ 하니까 업보가 붙는 거지, 업보가 붙을 자리가 없다는데 거기 어떻게 업보가 붙습니까? 과거는 바로 현재에 짊어지고 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도 공해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업보가 붙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또 죄 붙을 자리도 없어서 모든 것에 끄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그런 데서 끄달린다면 그 차원은 3차원의 차원도 4차원의 차원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업보가 붙을 자리가 없다는 그 사실을 아시라 이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내놔 보십시오, 거기 붙을 자리가 있나. 금방 아버지 노릇 하고 금방 남편 노릇 했는데, 방귀 뀌면 뿡 소리는 났는데 도대체 간 곳이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병 붙을 자리가 없다 하는 것을 완전히 터득을 하시고 물리가 터지시려면 나로부터, 나부터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나부터 믿고 거기에서, 믿는 마음에서 물러서지 마시고요. “주여, 잘해 주십시오.” “부처님이여, 잘해 주십시오.” 이럭하면 벌써 둘이 돼. 그러면 그 업보가 붙어!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라는 믿음과 더불어 둘이 아니어야 되겠죠? 납득이 안 가십니까?

질문자1(남) 납득이 갈 듯한데요. 하하하.

큰스님 알쏭달쏭입니까?

질문자1(남) 왜 그런가 하면 찰나에 대해서 지금 말씀을 계속 해 주셨는데요, 찰나가 모여서 영원의 실체가 되고 찰나라는 게 누적이 돼서 영원이 되는 건데, 우리가 찰나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원죄도 붙을 수 없고 어떠한 업보도 붙을 수 없다고 얘기하셨는데, 그건 좀 더 제 자신이 한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저도 항상 제 자신을 생각하고 내 삶의 실체를 항상 생각해 보고 있는데요, 오늘 스님 말씀 듣고 내 자신의 삶의 실체에 대해서 좀 더 아리송한 걸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 솔직한 의견입니다.
큰스님 네. 여러분이 마음으로 자꾸 생각을 내는 데서 ‘이것이 될까, 안될까?’ ‘이것은 뭘 어떻게 해야 옳을까?’ ‘이거 잘하는 걸까? 망하지나 않을까?’ 이러한 마음 때문에 걸림이 있는 겁니다, 다. 그런 것이지, 그 마음내기 이전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거기에 아무것도 붙을 데가 없습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나온 것도 없어서 갈 것도 없고, 이 자리가 천당이고 이 자리가 지옥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잘 보신다면, 자기를 잘 터득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게 환히 밝아져서 즉,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전통신기 하면 벌써 우주 전체를 들을 수 있고 저런 꽃 한 송이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남의 속을 빤히 안다. 과거에 어디서 온 거를 안다. 가고 옴이 없이, 이 실체가 아닌 내 마음, 그 영령이 그냥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그것이 도가 아니라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 통에서 벗어나야, 시스템 이 자체에서 벗어나야 그 바퀴를 굴린다고 그랬습니다. 그게 불바퀴라고 하죠.
불가에선 불바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뭐? 뭐라고 하더라? 블랙홀이라나, 뭐. 난 이름도 잘 모르니 블랙홀이라던가? 하하하…. 요렇게 해야, 좀 모르는 듯하고 미련한 듯하고, 아주 몰라야 재미가 있는 겁니다. 너무 알면요, 웃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저 그렇게 재미있게 웃으면서 우리가 전부 통한 마음으로, 한마음으로 이렇게 한자릴 하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하면서, 거기는 수없는 영계를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수없는 거를 빼내도 줄지 않는 도리입니다. 그 도리를 아실 것 같으면 우리가 모두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그런 것들을 말입니다.

질문자2(남) 맥킨리에 사는 OOO입니다. 스님께서 한마음을 말씀하셨는데 그 한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큰스님 허허, 이거 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셈을, 숫자를 세었대요. 하나도 하나요, 둘도 하나요, 셋도 하나요, 만도 하나요, 천도 하나니 그 하나도 없느니라 이랬대요. 왜냐? ‘하나’하고 ‘둘’하고 세고 가니까 하나 부른 거는 벌써 둘에 가 붙어 버렸죠? 그러니 하나죠. 아무리 세어도 하나더랍니다. 하하.

질문자2(남) 큰스님께서 과거심도 말할 수 없고 또 미래심도 말할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찰나도 이미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큰스님 (법상 위의 잔을 들었다 내리심)

질문자3(남) 사보이 일리노이에서 온 OOO입니다. 늦었기 때문에 제가 법문을 못 들었어요. 근데 항상 제가 가슴속에 담고 있던 걸 한 세 가지 질문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제가 신문을 봤을 때 참나를 찾는 거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근데 책을 봤을 때는 스님께선 상당히 그 육체적인 고행을 많이 하신 거로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참나를 찾는 건 마음에서 찾는 건데 꼭 육체적인 고행을 해서 할 필요가 있었는지요?

큰스님 부처님께서도 힌두교에서 몸으로 고행하는 걸 막으셨죠?

질문자3(남) 예.

큰스님 그런데 당신께서는 특별히 그렇게 몸으로 고행을 해야만 됐느냐고 지금 묻는데, 내가 그걸 고행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야, 그러면 어린 고아가 고생하고 싶어서 했을까요? 그럼 다가오는 걸 그거 안 삽니까? 누가 고행을 하려고 그래서 한 게 아니지. 그러니까 고행을 하려고 그래서가 아닌 게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참나를 발견했을 때 그때 둘이 아닌 도리가 있기 때문에 자기를 자기가 버린 채 그대로 길을, 즉 말하자면 주막도 없고 번지도 없고 그런 길을 그렇게 걸었더니 시공이 없는 초월 이 자체도 알았고 또는 끝간 데 없이 시발점과 종점도 둘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고행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보니까 ‘아하, 이 고행을 꼭 몸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서의 수행을 해야만 되겠구나.’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하고 지금 있지 않아요?

질문자3(남)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 또 한 가지 질문은 저희들이 지금 속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 삶 자체 내에서 짧게 어떻게 말씀해 주셔 가지고, 화두를 던져 주셔 가지고 저희들이 도를 빨리 깨치는 방법은 없는지요. 하하.

큰스님 도라고 할 건 없지만, 아까도 얘기했어요. 다섯 가지를 다 알아도, 이 세상을, 천문학을 두루 그냥 꿰뚫어서 안다고,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또 가고 옴이 없이 이 우주를 한 찰나에 전부 다녀온다고 그래도 그건 도가 아니라고 그랬죠. 남의 속을 빤히 알아도 도가 아니요, 남이 과거에 어디서 온 거를 알아도 도가 아니요. 그럼 뭐가 도냐? 거기에서도 벗어난 게 도라 그랬습니다. 그럼 지금 그런 어려운 것은 빼 버리고도, 지금 간단히 말해 달라고 그랬죠?

질문자3(남) 예.

큰스님 허허, 우리 삶 자체가 바로 참선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이 편안하면 좌선이요, 또 이 생활하는 데 모든 용도에 따라서 닥치면 바로 그것을 거기다가 맡겨 놓고 ‘야, 나온 데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거기서 나왔으니까 거기서 잘 돌아가게끔 나올 수 있거든, 이열치열처럼.

질문자3(남) 거기서 나왔다는 건 부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큰스님 (손을 가로저으시며) 당신 마음속에서, 당신. 그러면 당신이 이 세상에 나온 게 화두야. 생명, 마음, 육체 움죽거리는 거, 이것이 삼합이 같이 돌아가면서 공존하는데 이 배 속에 있는 것도 꼭 바로 그렇게 공존을 하거든. 그러니 한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게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가 맡겨 놨을 때, 거기서밖에는 해결 못한다 하고 믿었을 때, 바로 그 몸뚱이가 나온 게 화두요, 그렇게 하는 것이 법이에요, 바로. 그러니 그렇게 한다면 자기가 실질적으로 실험을 하면서 체험을 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실생활에는 아주 그대로 참, 실행이 되는 거죠. 실천이 되는 거고요.

질문자3(남) 저도 옛날에 머릴 깎고 절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실질적으로는 절에 안 들어가도 제 스스로가 지금 도를 구하고 있는 거네요, 그럼 지금.

큰스님 그렇죠. 그걸 알면 좋죠. 그런데 처자식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그것도 버리고 먼 데 좋은 거 찾자고 가는 것도, 그것도 잘못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왜 머릴 깎느냐? (장삼 자락을 들어 보이시며) 이 의복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이 무(無)의 세계와 유(有)의 세계를 한데 합친 바로 중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순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게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고, 머리를 깎는 거는 이 세상, 어지러운 무상한 세상을 깎아 버리는 겁니다, 예를 따져서 말한다면. 무상한 것을 구태여 그렇게 놔둘 필요가 있나 해서 그냥 깎아 버리는 겁니다. 수효로 헤아릴 수도 없죠.

그런데 우리가 왜 입산을 하고 그러느냐. 여러분보다 우리가 위대하죠. 왜 위대하냐? 높고 낮음은 없지만 높은 건 높고 얕은 건 얕죠. 평등하지만 너는 너고 나는 나죠. 그런 관계상 우리가 가정을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탁 이렇게 나와서 입산한 것만 해도 여러분보다 90%가 위죠. 또 하나, 둘째로는 모르는 중생들이 벌써 이 옷을 입고 머리 깎은 사람을 보고 “스님! 날 좀 구원해 주시오.” 하지 아니, 공부를 했다고 그래도 옷도 입지 않고 머리도 안 깎은 사람에게 ‘구원해 주시오’ 한다면, 공부 못 한 사람들도 그걸 볼 줄 알면 그럼 다 꿴 사람이게요? 꿰게요? 자기네들하고 똑같은데 거기 가서 날 좀 구원해 달라고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중생을 건지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천체를 구하려면, 법을 구하고 또는 이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보이는 데 방편으로서 이렇게 깎아야 되고, 우리가 공부하려고 깎아야 되고, 나중엔 알아 가지고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또 기르지 못하고. 그러니까 중 되기가 얼마나 어렵고 점점 갈수록 어려운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기 몸뚱이가 화두요, 자기 몸뚱이가 움죽거리는 게 바로 자기의 보현이요, 자기가 생각 내는 게 법신이요, 자기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부처라는 겁니다.

질문자3(남) 감사합니다. 한 가지 마지막으로, 움직이게 되면 자연히 죄를 낳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움직이면서 죄를 낳지 않고 속세에서 살려면 어떤 좋은 방법이 있는지요?

큰스님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바로 죄를 안 짓고 하는 겁니다.

질문자3(남) 그런데 그것이 저희들한텐 쉬운 얘기가 아니거든요. 그런 것이….

큰스님 하이고 참! 여러분, 그러면 여기 오실 때 지금 발자취를 짊어지고 오셨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질문자3(남) 차를 짊어지고 왔습니다. 하하….

큰스님 에이그, 차는 여러분의 몸과 같고, 운전수는 여러분의 마음과 같고, 기름은 여러분이 나기 이전 원, 즉 말하자면 주처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불교에 다니는 사람은 불성이요, 기름이. 불성으로 치면 됩니다. 탁 붙이면 불이 번쩍 일어나는 거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와 운전수와 기름이 그렇게 배합이 됐다는 얘깁니다. 그게 화두예요, 그냥. 그리고 그거를 화두라고 알면 그냥 우리 살림살이가 참선이고요. 그래서 생각이 있으면, 나는 조용하게 좀 앉아 있고 싶다 그러면 앉아 있는 거고, 내가 서서 좀 명상하고 싶다 그러면 명상하고, 졸린다 하면 자고, 똥 누고 싶다 하면 똥 누고 아, 그런 게 그대로 여여하고 그게 삶이요 그게 참선이요, 얼마나 좋습니까?

질문자3(남) 네, 그런 삶의 자세라는 것이 지금 이 사회에서는 제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좀 어렵습니다.
큰스님 아이고 참!

질문자3(남) 왜냐하면요, 그렇게 되면 물론 종교적인 방법에서는 어쩌면 옳은 일일지 모르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사람이 자기 몸이 움직이는 데 대해서, 생각이 움직이는 데 대해서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은 그건 이 사회의 흐름에 어긋나게 나갈 수 있는 것도 있거든요. 어떤 면에서 생각할 때는 동물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그런 생각도 가질 수 있는 거고요. 더군다나 미국처럼 구조가 잘 갖춰져 있는 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나간다는 거는 어떤 면에서 볼 땐 이 사회생활 자체 내에서 오히려 배제당할 그런 가능성도 많이 갖고 있는 그런 삶의 태도라고 볼 수도 있는 거거든요.

큰스님 그럼 내가 한마디 해 드릴까요? 그러면 여러분이….

질문자3(남) 죄송합니다. 제가 질문을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저희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여태까지 말씀하신 건 제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그것이 곧 좌선이고 그것이 곧 도를 아는 길인데 과연 저희들이 그런 사고방식의 태도를 갖고 이 사회에서 살아나갔을 때 어떤 이질감을 갖지 않을는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얘기했던 건 뭐냐 하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하고는 틀리기 때문에 여기에 와서 맞춰서 살려면 이 나라가 갖고 있는 구조를 알고 그 구조에 맞춰서 살아나가야 되는데 지금 스님께서 말씀하신 거는 여기에 사는 구조라든가 여기에 대한 것은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우리들의 사고방식대로만 살아나간다는 그런 그 생각이….

큰스님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구조 구조’하는데, 생명도 같고 움죽거리는 것도 같고 삶에 대해서 우리 지금 살림살이가 좀 달라서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습니다. 사는 건 다릅니다, 다. 주마다 또 다르듯이. 그러나 다르면 다른 대로 응용하고 지금 움죽거리는 게 그대로 지금 참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나쁜 거 좋은 거를 다 알고 지금 삽니다. 그걸 모르고 살지 않으시죠?

질문자3(남) 네.
큰스님 네, 그러니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랬어요.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랬다면 무슨 생각이 나더라도, 어떠한 잘못된 생각이 나더라도 그거를 잘못됐다고 알기 때문에 자기 마음으로 다스릴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대로 참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금 몸뚱일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움죽거립니다. 마음이 움죽거리면 바로 몸뚱이가 움죽거립니다. 그런데 그 마음과 그 마음내는 거와 몸뚱이가 움죽거리는 게 둘이 아니죠. 둘이 아닌데다가 자기가 그르고 나쁘고 좋고, 이런 걸 다 알기 때문에,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인정도 있고 사랑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아주 나쁜 데로 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것이 하나하나 이끌어지는 게 그대로 자기가 자기를 리드해 나갈 수 있고 자기가 자기를 바로 승화시킬 수 있는 거고, 자기가 자기를 바로 부(父)가 되게 만들고 자(子)가 되게 만들고, 어떠한 거든지 자유자재하게 될 수 있다는 얘기죠.

질문자3(남) 감사합니다. 그런데 옳고 그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옳고 그름에 대한 그 기준을 저희들이 어디에다 둬야 됩니까? 저희들이 배워 온 옳고 그름이라는 거는 여태까지 위에서 만들어 온 구조 때문에 저희들이 그것으로 인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거지, 실질상으로 자기가 참나를 찾았을 때는 옳고 그름에 대한 그 분간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거하고 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큰스님 예. 이 참선에는 그르다 옳다 이거를 다 떠나서…, 그러면 이렇게 한번 비유해 보죠. 배가 지금 고파서 죽겠는데 내가 이 밥을 먹어야 하느냐 안 먹어야 하느냐, 이건 떠나야죠? 그냥 먹죠?
사명 대사가 말입니다, 새를 한 마리 잡아 가지고 손에 쥐고 와서 서산 대사한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새를 내가 놔 주겠습니까, 안 놔 주겠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아무 소리 않고 일어나서 문지방을 터억 걸터 짚고 서서 “내가 일로 나가겠느냐, 들어오겠느냐?” 이러더랍니다. 그래, 나가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나가든 들어오든 자기가 결정짓기에 달리지 않았을까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한마음으로 요다음에 또다시 만나기를 빌면서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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