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일요법회 -법산 스님(동국대 명예교수)

 

▲ 보시의 참된 행(行)은 보시바라밀이다. 베풂에 있어서 보답을 바라지 않고 기대하는 바가 없는 것이 보시바라밀의 실천이다. 만약 요행을 바란다면 보살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오 보시에 수많은 욕심이 따라 번뇌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법산 스님은 3월 15일 조계사 일요법회에서 〈열반경〉에서 이르는 보시바라밀에 대해 설법했다. 인간은 찰나의 순간에도 수백 수천의 번뇌에 휩싸일 수 있으므로 항상 마음속에 날카로운 지혜의 칼을 품고 흐트러짐 없이 살아야 하며 그로써 지혜 광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리=박아름 수습기자
보시의 참된 행(行)은 보시바라밀이다. 베풂에 있어서 보답을 바라지 않고 기대하는 바가 없는 것이 보시바라밀의 실천이다. 만약 요행을 바란다면 보살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오 보시에 수많은 욕심이 따라 번뇌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법산 스님은 3월 15일 조계사 일요법회에서 〈열반경〉에서 이르는 보시바라밀에 대해 설법했다. 인간은 찰나의 순간에도 수백 수천의 번뇌에 휩싸일 수 있으므로 항상 마음속에 날카로운 지혜의 칼을 품고 흐트러짐 없이 살아야 하며 그로써 지혜 광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번뇌란 잡고 있으면 병이 된다

“봄이오니 불탄 자리에 푸르게 잎이 피어나고/ 연기 나는 촌락에 황혼이 짙어오네./ 누가 아리오, 나귀 탄 중관자를./ 인간 세상에 놀면서 금봉에서 시험하는 것을.” 

이 시는 조선시대의 중관 해안 스님의 시입니다. 스님께서 산에 올라 황혼이 짙은 마을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을 관찰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귀 탄 중관자라는 말은 스님 본인을 지칭한 것입니다. 당나귀를 타고 있는 사람은 한 찰나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당나귀와 당나귀를 탄 사람은 넘어지지 않으려면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당나귀가 오른발을 떼면 오른쪽으로 기울고 왼쪽을 떼면 왼쪽으로 기울고 나귀를 탄 자가 그 당나귀와 한 생각이 되어야만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행하는 중관자인 스님께서 마치 당나귀를 타고 가는 이 마음처럼 한 시도 흐트러짐 없이 항상 전전긍긍하며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금봉에서 시험한다는 말은 칼끝에서 자신을 두고 늘 시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날카로운 칼끝에서 항상 예리한 마음을 유지하며 자신을 방관하지 않고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피부로 촉감을 느끼고 혀로 맛을 보는 중에 항상 생각을 한데 모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살아야만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는 큰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말도 할 말 안할 말 가리며 해야지 높은 음을 낼 자리에 낮은 음을 내어선 안 되고 낮은 음을 낼 자리에 높은 음을 내어선 안 됩니다. 내가 할 말이 어떤 말인지에 따라 외부에 무수하게 많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행동 하나 말 한마디 하는 데 있어서 항상 조심하며 상대방에게 조금도 자극이 되지 않도록 얘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과 소통을 잘하고 사회에 적응을 잘해서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을 잘못하면 시비가 생깁니다. 시비가 생기면 자신에게 손해이지요.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일체 모든 생명에 조금도 충격이 가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순간순간 생각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스님들의 아주 날카로운 칼날 같은 법문은 중생들의 마음에 꽂히어 번뇌와 망상을 도려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중관 해안 스님께서 가는 칼과 같이 항상 마음에 지혜의 칼을 두고 마치 당나귀를 타고 정진하듯 마음에 있는 번뇌와 망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사실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바로 도려낼 수 있는 지혜의 칼날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번뇌란 잡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지내면 나의 화가 되고 해가 됩니다. 욕을 듣거든 한쪽 귀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중생들에게 어려운 일이지만 안 된다는 생각은 버리고 정진하십시오. 그러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후회하는 인생을 살지 말자

제가 절에 온지 55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외치며 목탁을 치고 간절하게 염원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관음정근 마지막에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옴 아로늑계사바하’라고 합니다. 지장정근에서도 ‘지장보살 멸업장진언’이라고 하지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업장을 소멸하겠다는 말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소멸하면 그 자리에 지혜의 광명이 꽉 들어찰 것입니다.

지혜 광명을 얻게 되면 어떤 현상을 보고 척 하고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쓴 맛 단맛을 단번에 느끼듯 누가 가르쳐줘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는 순간 당장 다른 마장이 끼어들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 광명은 마장이 끼어들 틈도 없이 발현이 되지요. 거울은 사람이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 비춰줍니다. 잘된 것은 잘됐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 비춰주는 것이 거울의 역할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갈고 닦은 아주 예리한 칼날에서 나오는 지혜의 초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는 모든 수행 정진은 바로 지혜로운 생각을 갖자는 발심에서 시작됩니다.

쌀은 불려서 찌면 밥이 되고 빻아서 치대면 떡이 됩니다. 떡 중에서도 무엇을 첨가하느냐에 따라 절편이 되기도 하고 인절미가 되기도 하며 시루떡이 되기도 하지요. 쌀은 하나지만 쌀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것이 천차만별입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맑은 물이 커피가 되기도 하고 홍차가 되기도 합니다. 중생의 본래 마음은 이러한 쌀과 물과 같습니다. 자신이 가진 업이 어떤 방앗간을 거쳐 나왔는 가에 따라 마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모습은 자신의 마음 모습이나 외부적인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업의 모습이 달라지니 현재 일념에서 잘 판단하여 업장 소멸에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후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반성과 참회는 있을지언정 후회는 하면 안 됩니다. 돌이켜 스스로를 반성하며 앞으로 행동에 귀감으로 삼으면 되는 것이지, 남 탓하고 원망해봐야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찾고 다스려야 합니다. 자등명 법등명이라. 자기 마음의 등불과 지혜를 스스로 밝혀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뒤떨어진 인간이 되어 복도 없고 지혜도 없고 남에게 천대받고 무슨 일을 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등명 법등명 하는 사람은 어떤 생명이든 모두가 마음의 번뇌를 소멸시키고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벗어나고 삼계를 이루어 정토세계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 주위에 있으면 그 자리가 제일 행복한 자리입니다.

 

자비심 기르면 한량없는 선행 행할 수 있어

열반경에서 이르길 “보살이 보시하는 것은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속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했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내거나 은혜 받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누굴 도와줬다고 해서 상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을 내면 안 됩니다. 가진 게 많다는 것은 상을 낼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돈이 제일 많다고 행복하겠습니까? 현재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들은 돈이 많은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오늘 여기 와서 기도하고 법문 듣는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조금 답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 안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을 무식하다 업신여겨서도 안 되고 내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똑같이 맑고 밝고 아름다운 자비의 광명 지혜가 있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할 수 있을 때 언제든지 보시해야 합니다.

 

금강경 마지막 구절에 보면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있는 그대로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견지가 분명하여 남이 유혹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즉 보시를 했다고 하여 교만하거나 은혜 갚기를 바래서는 안 됩니다. 주고 싶은 사람과 받는 사람을 가려서도 안 됩니다.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서도 사람에 차별이 있어서 안 됩니다. 어떤 생명이라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만물을 대함에 있어 차별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상대방이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거나 선지식이거나 선지식이 아니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지장십륜경〉이라는 경이 있습니다. 십바라밀을 얘기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열 가지 악한 일을 하지말고 열 가지 착한 일을 행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을 토대로 상대방이 혹시 잘못됐다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을 품에 안고 보호해줄 수 있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보살은 보시를 함에 있어서 만약 계행이나 그 결과를 따진다면 끝내 보시를 이루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차별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진정으로 보시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한 것입니다. 보시하지 않으면 보시 바라밀다를 갖출 수 없고 보시 바라밀다를 갖추지 못하면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보시가 제일입니다. 베풀지 않으면 돌아올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살이 보시를 할 때에는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항상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다룹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항상 중생을 자식같이 여기라고 하셨지요. 병든 중생을 보면 부모가 병든 자식을 대하듯 가엾게 여겨 보살펴주고, 즐거워하는 중생을 보면 병든 자식이 나은 듯 기뻐하고, 보시하는 자식을 보면 자식이 다 커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듯 즐거워해야 합니다.

보살이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음식을 보시 한다면 다음의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내가 지금 보시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함께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중생들이 법으로 맛있는 음식을 얻어 지이다. 바라건대 중생들이 법으로 맛있는 음식을 삼고 애욕의 음식을 찾지 말아지이다. 모든 중생들이 지혜를 완성하여 근심 없이 착한 일을 성취하여지이다. 모든 중생들이 공한 이치를 깨달아 허공과 같이 근심 없는 몸을 얻어지이다. 바라건대 모든 중생들이 자비심을 일으켜 복 밭이 되어 지이다.”

 

이 같은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보살과 여래 부처님은 자비심이 근본이 되는 것이오, 보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한량없는 선행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무엇이 모든 선행의 근본이냐 묻거든 자비심이 그 근본이라 대답합니다. 열반경에서 이르길 “자비심은 진실에서 헛되지 않고 선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실한 생각은 곧 자비심이며 자비심은 곧 여래 부처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유교경〉에서도 욕심이 적으면 행복한 것이라 했습니다.

 

욕심을 구하는 사람은 계산과 이익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지만 욕심이 적은 사람은 그런 근심이 적다했습니다. 욕심이 적다는 말은 과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이익에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장사를 해도 이윤을 남길 만큼만 남기면 욕심이 아닙니다. 너무 많이 남기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지요. 욕심이 적은 사람은 아첨으로서 남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으며 ‘색성향미촉법’에 쉽사리 이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적당한 것이 좋습니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곧 열반을 얻게 되나니 이것을 일러 욕심이 적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꽃향기가 바로 내 마음의 향기라는 것을 되새기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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