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 오층탑

〈사진1〉 5층석탑 초가유형인 탑리 5층모전석탑
초기유형 모저석탑으로 출발
7세기 이후 신라석탑 독자형식
석탑 기단 3층으로 늘어나
석·목탑 양식에 밀교영향도

우리나라에서 국보로 지정된 31기의 불탑 중, 5층탑의 수는 무려 7개나 된다.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 월성 나원리5층석탑, 의성 탑리5층석탑, 영양 봉감5층석탑, 월성 장하리 서5층석탑, 익산 왕궁리5층석탑, 그리고 팔상전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법주사5층목탑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 불탑신앙이 수용된 이래 전 시대에 걸쳐 5층의 불탑이 조성된 연유는 과연 무엇일까?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을 찾을 수 없기에, 현재는 몇 가지 연관성을 유추하여 추측만 할 따름이다. 그 중 5층 불탑의 조성은 오방사상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오방이란 동서남북의 사방에 중앙을 합한 것이므로 온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5층탑이란 5방위를 의미하여, 부처님이 온 세계에 항상 상주하고 계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호국사찰인 경주 사천왕사에 오방신의 벽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호국사상과 밀교사상의 연관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부여에 있는 정림사5층탑은 이미 지난 연재에 다루었으므로 본 연재에서는 생략한다. 그렇다면 조성연대가 가장 이르다고 볼 수 있는 탑리 오층석탑〈사진1〉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자.

경북 의성군 금성면의 탑리에 위치하며 1962년에 국보 제77호로 지정되었다. 탑이 유명하여 탑리라 불리는 마을 언덕 한 가운데에 세워진 이 탑은, 전체적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전탑의 형식 뿐 아니라 목탑의 형식까지 하나의 탑에 모두 담겨있는데, 조화롭게 어우러진 여러 형식은 이처럼 독특한 모습의 석탑을 만들어냈다.

9.6m 크기의 이 탑은 전탑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해서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 우리나라 모전석탑의 시조인 경주 분황사탑과 같은 조성기법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지붕의 경사면과 처마 밑이 모두 층급형을 이루고 있는 모양은 전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경주 분황사탑이 어두운 색을 띠는 안산암을 벽돌 크기로 잘라 쌓은 것과 달리, 탑리의 오층탑은 안산암보다 밝고 단단한 화강암을 좀 더 크고 층지게 잘라 쌓았다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 뿐 아니라 분황사탑 1층 몸돌에는 4개의 감실이 있는 반면 탑리 오층탑에서는 남쪽 면에 작은 감실 하나만 있다. 이것은 단순한 양식의 차이가 아니라, 중국의 전형적 전탑의 모습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7세기 이후 신라 석탑의 독자적 형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탑의 기단부에서는 삼국통일 시기에 형성되었던 초기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기단이 1층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여러 개의 돌이 지대석과 기단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탑리 오층탑이 이후 8세기에 성행하는 석탑 양식의 시초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신라의 석탑은 지난 호에서도 살펴보았던 감은사지석탑과 고선사지석탑 등으로 발전하여 조성된다. 이후 석탑의 기단은 단층이 아닌 2층으로 늘어나고, 탑의 층수도 줄어들며 좀 더 간결하고 안정감 있게 만들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조성 시기가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탑리의 오층석탑은 이처럼 전탑, 목탑, 석탑의 요소를 두루 갖추며 절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또 이러한 형식의 조화와 결합은 새로운 신라 석탑의 탄생으로 이어졌기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 있는 오층탑〈사진2〉은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으나 탑에 나타난 여러 양식을 조합해봤을 때,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높이 7.5m의 이 탑은 의성의 탑리 오층탑보다 규모는 조금 더 작은 편이지만,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쓰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는 부여에 위치한 무량사의 오층탑이 지리적인 특성 상 백제탑의 영향을 받았고, 신라로부터 시대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탑의 우아함과 신라탑의 장중함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이 탑은 신라에 이어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던 오층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무량사 5층석탑
1963년에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이 탑은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매우 닮아있는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땅에 묻혀 있어 확인할 수 없지만,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기둥 4개와 탑의 각 면 돌들은 모두 다른 돌로 이루어져있다. 탑의 몸돌을 받치는 역할의 갑석은 모두 8장인데, 상층기단 갑석의 받침인 부연을 조각해놓기도 하였다. 네 모서리에 기둥이 세워진 몸돌은 지붕돌에 비해 높이가 낮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 비례가 잘 맞아 안정감이 느껴진다. 탑의 탑신부에서는 옥개석이 얇고 넓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인데, 이처럼 넓은 옥개석은 탑에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또 지붕의 처마 끝은 살짝 들려있어, 지나치지 않은 경쾌함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더한다. 이와 같이 갑석과 옥개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과 탑의 부재들이 모두 다른 돌로 이루어진 점 등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또 갑석 밑과 탑신의 옥개석 처마 밑엔 물이 탑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는 절수구(切水溝)가 만들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돌의 크기를 조금씩 다르게 해서 탑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탑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기능적인 면까지 고려하여 만든 이 절수구는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석탑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1971년엔 탑을 해체하고 수리 및 보수 하던 중, 초층 탑신에서 금동제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세음보살상 등 삼존상(三尊像)이 출토되었다. 3층 탑신에서는 금동보살상이 출토되었고, 5층 탑신에서는 사리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충남 공주 마곡사5층석탑〈사진3〉은 마곡사의 대광보전(大光寶殿)앞에 있어 다보탑이라 불리기도 한다.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륜부의 장식을 통해 고려 후기라 추정된다. 이중기단 위에 돌을 높게 쌓고 모서리기둥과 받침기둥은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만 새겨져 있는 모습이다. 이는 기둥을 모두 개별적으로 만들어 세웠던 탑리의 오층탑과 무량사 오층탑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또한 기단이 높은데다 지붕돌의 너비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탑이 얇고 길어 보여, 안정감을 주던 여타 오층탑과는 다르게 웅장한 느낌보다는 가녀린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8.7m에 달하는 탑의 높이는 굳세고 강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탑신부에서는 2층 탑신의 4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고, 옥개석과 탑신은 모두 1장씩 쌓아올렸다. 또 5층의 옥개석에는 풍탁 2개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지붕돌 처마의 곡선이 끝부분에서 확실한 반전을 보이며 들려진 모습은, 고려 석탑이 갖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바로 상륜부의 풍마동〈사진4〉이다. 청동 금속제의 이 풍마동(風磨銅)은 라마교의 불탑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발생한 밀교의 한 계통으로, 원나라는 당시 라마교를 왕실불교로 받아들이고 국교로 삼았다. 원나라에서 융성하였던 라마교는, 원의 압력을 강하게 받았던 고려 후기의 불교문화에도 분명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 원의 영향을 받아 마곡사 5층불탑의 탑상부로 쓰인 이 풍마동은 라마교의 불탑을 축소해 놓은 형태이다. 풍마동은 라마보탑보다 더욱 섬세하게 만들어졌고, 탑의 꼭대기에 놓여 장식적 효과가 크다. 하지만 그 크기가 탑신부에 비해 지나치게 커서 탑의 전체적인 비례에 맞지 않는 모습이다. 실제 탑의 높이는 8.7m인데, 풍마동의 높이만 1.8m에 달한다. 풍마동의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당시 고려에 미친 원나라와 라마교의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마곡사 5층석탑
충북 보은의 속리산 안에 위치한 법주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 법주사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탑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이전의 목탑 중에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은 목탑인 팔상전이 있다. 국보 제55호로 지정된 이 목탑은, 그 안에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 모습을 그린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가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야전법상, 쌍림열반상 등의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5층으로 이루어진 목탑이지만 탑의 벽 사방에 각 면당 2개씩, 총 8개의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져 있기 때문에 팔상전이라 불린다. 하지만 이 팔상전은 정유재란 때 불이 나 타서 없어지고 말았는데, 선조 38년, 1605년부터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21년만인 1626년에 다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때문에 신라 때 처음 세워졌던 5층목탑의 흔적은 돌로 만들어진 기단부에만 남아있다.

법주사의 팔상전이 목탑으로 지어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주사 창건 당시 절터가 배 모양을 닮았는데, 탑을 돌로 조성한다면 무거운 돌로 배를 짓누르는 것과도 같은 형상이라 비교적 가벼운 나무로 탑을 세웠다고 한다.

팔상전의 높이는 총 22.7m로,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탑의 꼭대기엔 철제로 만들어진 상륜부가 놓여 있는 모습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석탑의 옥개석에 해당되는 기와지붕인데, 기둥 위에서 지붕의 처마를 받치는 역할을 하는 공포가 층마다 양식이 달라 다른 목조건물들과 차이점을 보인다. 또 팔상전은 건물 내부가 3층까지 뚫려있는 통층식(通層式)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안은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는 공간, 사리를 모시는 공간, 참배를 하기 위한 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팔상전 안쪽 가운데에는 심초석이 있는데, 이 심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상륜부까지 연결되도록 하였다. 1968년 해체 및 수리 때에는 이 심초석에서 사리와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팔상전이 탑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하였다. 1층 탑신의 사방에 출입구와 계단이 나 있기 때문에 탑의 어느 방향에서든 출입이 가능하고, 내부의 팔상도를 바라보며 참배할 수 있다.

마곡사 5층석탑의 풍마동
이렇게 우리는 신라와 백제, 석탑과 목탑, 나아가 밀교의 영향까지, 여러 양식과 문화가 혼합된 5층탑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 조성된 5층탑의 모습은 매우 다양했지만, 탑에 담긴 마음과 정신은 모두 하나를 향한 것이라 생각해 본다. 부족한 곳이나 비어있는 곳 없이 온 세상에 부처님의 밝은 빛이 가득할 것이라는 믿음이 정성스레 모여 다섯층의 불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3층탑과 5층탑에 이어 7층탑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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