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32회 - 삼층석탑

3층석탑, 국내에서 가장 많이 조성
삼계·삼보·삼귀의·삼학·용화삼회 등
3층석탑 의미 놓고 의견 ‘분분’
통일신라 이후 전국 확산 고려하면
삼국통일 사상 근거 회삼귀일 영향일 수도

감은사지석탑에서 완성된 3층탑 양식
불국사 석가탑에서 절정 맞이해

사찰이나 절터에서 불탑을 마주할 때, 서로 다른 곳에서 본 탑이라 할지라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유사한 양식의 불탑을 여러 곳에서 자주 봤다는 뜻일 텐데, 그 비밀은 바로 탑의 층수에 있다. 우리나라 불탑은 3층 석탑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3층 석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후반부터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그 유행이 멈추지 않고 있다.

황룡사9층탑의 경우에는 탑을 9층으로 조성한 연유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3층탑의 경우 오늘날 학계에서도 대체 어떠한 목적으로 불탑이 3층으로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3이라는 법수(法數)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교리적인 관련성과 국가의 시대적인 상황 등을 결합해 여러 가지 추론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3이라는 수가 갖는 불교적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 중 불교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나타내는 용어로,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통칭하는 낱말인 3계(三界)가 있다. 또한 불교의 3가지 요소를 불·법·승 3보(三寶)라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불교 신자는 3귀의, 즉 3보에 귀의하는데 이로부터 불자로서의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서 일체의 법문(法門)은 모두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3학(三學)으로 귀결된다. 그런가 하면 56억 7천만 년 후에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는 미륵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3번의 법회를 열어 경을 설하는데 이를 용화3회(龍華三會)라 한다. 이러한 미륵신앙은 7세기 초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처럼 석탑이 3층으로 조성된 데에는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먼저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주장과 더불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삼귀의를 다짐하는 형상으로서 3층 석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3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미륵보살의 용화3회 설법을 의미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한편 3이라는 숫자는 교리적인 의미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신라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해 특별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원효 스님의 불교적 삶을 조명했을 때 숫자3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3층 석탑의 조성과 연관되기도 한다. 원효 스님은 아미타신앙과 정토사상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원융무애의 화엄사상을 통해 통일국가의 이념을 세우고자 했다. 이처럼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원효 스님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신라 전체의 불교문화에도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원효 스님이 말년에 수행하던 곳으로 잘 알려진 고선사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됐다. 이러한 고선사에 3층탑이 조성된 뒤 불자들이 귀의대상으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977년 경주시의 덕동댐 건설 도중 고선사지 전체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하자〈사진1〉 3층 석탑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 <사진1> 원효 스님의 수행처였던 고선사는 1977년 경주시 덕동댐 건설로 인해 그 터가 수몰됐다.
1962년 국보 제38호로 지정된 탑이 물에 잠기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지만, 옛터와 함께 탑이 자아내던 고즈넉한 분위기는 함께 가져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때문에 고선사지가 아닌 박물관에서 마주하는 탑〈사진2〉의 모습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 <사진2>국보 제38호 고선사 3층석탑. 현재는 경주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다. 이중기단과 3층의 탑신부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총 높이는 10.2m다.

이 탑은 원효스님의 입적 연도를 고려했을 때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거라 추정된다. 총 높이는 10.2m이고 이중기단과 3층의 탑신부로 이루어졌다. 옥개석과 옥신석은 감은사지석탑과 마찬가지로 탑의 부분을 여러 개의 석재로 짜 맞추는 방식을 사용했지만, 3층의 탑신만은 하나의 부재를 사용했다. 이는 몸돌에 사리장치를 넣어 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 석탑의 해체 및 복원 과정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다. 또 감은사지석탑의 초층 탑신 각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고선사지석탑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門扉)〈사진3〉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제외하고, 이 탑은 감은사지석탑의 전형적 양식을 그대로 본받아 통일 초기의 신라 석탑을 대표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위치한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경주시내에서 문무왕릉을 향해 가다 보면, 그 길목에 반드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변보다 높은 절터 위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웅장하게 서 있는 두 기의 3층 석탑이다. 높이 13.4m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이것은 바로 신라 제31대 왕, 신문왕이 686년에 조성한 감은사지의 쌍탑이다.
▲ <사진3>고선사지3층석탑 탑신에 있는 문비.
감은사(感恩寺)는 명칭 그대로, 신문왕이 자신의 아버지 문무왕께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실제 감은사지는 대왕암이라 불리는 문무왕릉에서 약 1km정도 떨어진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감은사는 문무왕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절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 터와, 오랜 시간 동안 제 자리를 지켜 온 쌍탑만이 남았지만 건립 당시 이곳에 뿌리 내렸던 문무왕의 호국정신은 아직 그대로인 듯하다.

삼국통일이라는 신라의 대업을 완성했던 문무왕은 죽어서도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생전에 문무왕은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진국사(鎭國寺)라는 호국사찰을 지으려 했지만, 절의 완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문무왕릉 가까이 감은사를 지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의 사중기(寺中記)에서 감은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문무왕께서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아드님이신 신문왕께서 즉위하시고 개요 2년에 마치셨다.”

이처럼 감은사는 부처님의 힘을 통해 왜병을 격퇴하고자 했던 문무왕의 애국심으로부터 지어졌다. 신문왕은 그 마음을 이어 받아 절을 완성하였는데, 특히 감은사지 내에 세워진 두 기의 3층 석탑〈사진4〉은 그 굳은 결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사진4>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3층석탑. 총 높이 13.4m로 장중하고 기백이 넘친다. 본래 탑에서 볼 수 있는 상륜부를 과감히 변형해 5m에 이르는 찰주를 하늘 높이 세웠다.

한편 통일 이전까지 신라인들이 세운 탑은 화려함과 유려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를 세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보단 힘찬 건국이념을 담을 수 있는 웅장한 탑이었다. 이를 위해 신라인들은 기존의 석탑과는 다른 방식으로 탑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기단에서 찾을 수 있다.

금당 앞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기씩 세워진 감은사지 쌍 탑은, 기존의 석탑과는 다르게 기단이 2층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이중기단은 이 탑이 목탑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기단을 2층으로 세움으로써 탑은 보다 높은 상승감과 안정감을 얻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본래 탑에서 볼 수 있는 상륜부를 과감히 변형해, 전체 높이가 5m에 이르는 찰주를 하늘 높이 세웠다. 또 찰주를 중심축으로 하여 보륜과 앙화 등을 석조로 조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동서 양탑 모두 찰주만이 남아있다. 또한 감은사지석탑은 하나의 석재를 그대로 놓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돌과 돌 사이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쇠로 만든 나비장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두 기의 탑은 전체적인 모습과 결구 방식, 석재의 수 등이 모두 같지만 크기에 있어 조금 다른 점을 보인다. 서탑에 비하여 동탑에 사용된 부재가 조금씩 크기 때문에 동탑이 훨씬 더 웅장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1959년 서쪽 탑 해체 수리 시엔 3층 탑신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는데, 금동사리각외함과 그 안에 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되었다. 1996년 동탑 해체 수리 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리장치〈사진5〉가 발견되었다. 탑에서 출토된 다양한 공예품들은, 당시 감은사지3층석탑이 신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서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았음을 증명해준다. 이렇게 감은사지석탑을 통해 완성된 신라의 3층 석탑 양식은 이후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에서 그 절정을 맞이한다. 또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지는 모든 3층 석탑의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사진5> 1996년 감은사지 동탑 해체 수리시 출토된 사리기(舍利器).
앞서 살펴 본 고선사지3층석탑과 감은사지3층석탑에는 모두 통일국가에 대한 염원과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호국 정신 등 부처님과 호국에 대한 신라인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시작된 3층 석탑의 조성은 신라인들의 삼국통일을 의미하는 회삼귀일의 사상과 연관될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밝혀본다.

국보 제38호 고선사 3층석탑. 현재는 경주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다. 이중기단과 3층의 탑신부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총 높이는 10.2m다.

원효 스님의 수행처였던 고선사는 1977년 경주시 덕동댐 건설로 인해 그 터가 수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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