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인공에서 나온 거니까 내 주인공밖엔 고칠 수 없다!

▲ 그림 최주현

모든 거를 나오는 대로 거기다 놓지 않으면
그 습을 뗄 수가 없고 그 습을 녹일 수가 없어요.
홀연히 참자기의 그 생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마음의 봄이 되려면
질문 바쁘게 살다 보니 이제는 자식들도 다 커서 둥지를 떠나가고, 절에 다닌다고 하면서 이룬 것도 하나 없는데 저승길이 목전이라 막막한 생각만 자꾸 일어납니다. 이 몸을 벗기 전에 내 본래 소식을 터득해서 영원한 마음의 봄이 되어야 할 텐데, 앉아서 좌선이라도 하려 들면 망상만 많아지고 잠만 쏟아집니다.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업장을 소멸하고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답변 생각에 걸리질 마세요. 수면이 오더라도 그놈이 하는 거지 딴 것이 아니니까. 일을 하고 싶어도 그놈이 하는 거고, 서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앉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만남도 그놈이 하는 거고…. 그런데 왜 걸립니까? 자기가 나침반을 놓고 ‘이것이 누(累)가 되게 하지 않는 건가? 집안에 언짢은 일은 아닌가? 자식들한테 내가 이렇게 해서 잘못되질 않나?’ 요것만 자꾸, 이 운전대만 잘 돌리면 그 차는 올바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익을 가져올 수 있고요.

그러니까 저녁마다 모두 조용하게 삼십 분 동안이라도, 단 이십 분 동안이라도 모든 것을 주인공에 한데 모아서 딱 놓고선 한번 둥글려 보세요. 잡념도 이 속에 다 들어가 있죠. 한번 둥글려서 내면에 딱 놓으면 잡념이고 뭐고 다 없어요. 자식이고 조상이고 부처고, 중생이고 벌레고 지수화풍이고 뭐고 다, 지수화풍 속에 다 홈빡 들어가 둥글려졌으니까 잡념 부릴 게 없죠.
그걸 무겁게 놓고 ‘너밖에는 모르는데, 수없이 진화돼서 온 과정도, 앞으로 갈 것도 너밖에는 모르는데 내가 너를 보지 않고 어떡하겠느냐.’ 하고선 그냥 사무치게 관(觀)해 보시라고요. 그렇게 수차에 그런 사무침이 없이 백지장 하나를 넘어서겠습니까? 여러분은 백지장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백지장 넘기가 어렵지, 다른 거 넘는 건 쉽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길을 갈 때도 무겁게 발을 떼어 놓고, 믿음을 무겁게 두면은 항상 묵직하게, 발을 떼어 놔도 묵직하게 떼어집니다. 말을 해도 묵직하게 떼어 놔지고.

옛날에 어느 도승이 계셨는데, 마적 떼들이 “야! 도승이라는데 내가 볼 때는, 껍데기로 봐서는 도대체 도승 같지 않아. 그래 네가 도승이라면 어디 내 칼이 안 들어가겠느냐? 네 가슴에는 철판을 대서 안 들어가겠느냐?” 하고선 오는 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아니, 자기 죽을 줄 모르고 자꾸 앞으로 다가오거든요. 그래서 딱 다가오니까 ‘저 죽을 줄 모르고 오는구나.’ 하면서, “도인은 무슨 놈의 도인이냐!” 하면서 칼을 들고 “네 가슴에 이 칼이 안 들어가겠느냐? 진짜로 도인이라면 내놔 봐라.” 그렇게 했습니다, 칼로 찔러 버리겠다고.
“네 가슴을 찔러서 네 가슴속에 뭐가 들었는지 내가 보겠다.” 이랬습니다. 그랬더니 껄껄 웃으시면서 하는 소리가 “아주 추운 동절에 고목을 잘라 봤던들 거기서 꽃이 나오더냐?” 그러곤 물었습니다, 꽃이 나오더냐고. “고목만 잘라질 뿐 꽃은 나오지 않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만 “스스로서 네 마음에 봄이 온다면 꽃이 필 수도 있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칼을 던지고 정말 그 사람의 마음에 봄이 와서 마음에서 향기가 나고, 따르던 모든 사람도 전부 그 스님의 제자가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내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할지라도 그렇고 도둑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이런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은 “도둑이야!” 하고 “강도야!” 이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침착하게 거기 맡겨 놓으면 스스로서 몸뚱이의 모든 게 보살로 화하여 오고 감이 없이 그쪽에 가서 그 사람이 되면은 그 사람 마음이 봄이 돼서 그 칼로 사람을 찌르지 못한다는 이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돈을 받으러 갔는데 돈이 있는데도 안 준다 이겁니다. “모든 걸 놓고 살아, 착하게. 악담하지 말고. 그 사람이 잘돼야, 그 사람의 마음이 돌아서야 당신 돈 줄 거 아니야? 그러니 항상 착한 마음으로써 다 놓게 되면 스스로 돈을 갖다 주게 돼 있어.” 그랬습니다. 그래서 착하게 놓으니까 스스로서 그 사람이 돈을 갖다 주더랍니다, 정말. 그랬다는 셈으로 무술에서 고수가 되려도 그렇고, 태권도도 마음을 놓지 않고 모든 잡념을 버리지 않고는 못해요. 그러니 한 찰나에 그 사람 마음에 봄이 오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여러분이 다 가질 수 있다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어떤 마음에다 놓아야 하는지
질문 스님께서 설법하시는 내용을 조건별로 세세하게 나누어도 보고 비교 분석도 해 봤는데 뭐든지, 어떤 어려운 일에 부닥쳐도 마음에 놓으라고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연구를 하고 궁리를 해 봐도 그게 어떤 마음에다 놓으라고 하시는 것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답변 우리가 이 세상에 이 몸을 가지고 탄생을 했으면 그게 사대가 공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또 상대, 모든 오온이 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본국의 본점에서 모든 일체 만법이 나오니까 처음에 공부할 때는 본점에다 모든 걸 맡겨 놔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써 상대가 있고 생활이 있죠?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냥 공했으면서도 화두라 이겁니다, 이게 그대로.
그럼으로써 일심에서 만법이 나오고 만법은 일심으로 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고 가는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느냐 말입니다. 믿고 물러서지 않고 거기다가 맡겨 놔야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지금 시대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티끌 하나 남김없이 다 공해서 나투면서 옮겨갈 뿐입니다. 염주가 돌아가죠? 앞뒤가 없는 염주가 항상 돌아가고 있잖아요. 이 지구 자체도 그렇고 우주 자체도 그렇고 인간 살아나가는 것도 그런 겁니다. 항상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항상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 놔야지 어디다 놓습니까. 누가 했기에 믿질 않는 거냔 말입니다.

삼위일체라고 했지마는 처음에는 역시 운전수가 있으면 차가 있고 기름이 있는 거죠. 이 세 가지의 이름은 다를지언정 한 몸에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저 턱 밑에다가 한데 붙여 놓고도 과거심이니 현재심이니 미래심이니 하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더딥니까. 그리고 내가 공해서, 내가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했는데 거기다 또 주인공의 그 문제를 가지고, 화두를 가지고 또 자꾸…. 이게 문을 오히려 막는 법이라. 예전에는 순진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 공부를 했지만 지금 시대에는 너무 아는 게 많아요. 아는 게 많아서 문을 닫아 버려, 모두가.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공부할 사람 없다 이 소립니다. 양면을 다 들고 다 놔라. 선과 악을 다 맡겨 놔라 이겁니다. 겁을 통해서 그 종 문서는 불살라야 하니까.

내가 항상 그런 말 하는데 작년 콩씨를 올 봄에 심었는데 콩나무로 화했으니까 콩씨는 없어졌죠? 콩나무가 돼 버렸으니까. 내가 콩나무란 말입니다, 각자. 그럼 콩나무의 콩씨는 열렸겠죠, 또. 그런데 작년 콩씨를 찾고 있다 이 소립니다. 얼마나 더디냐 이 소리예요. 과거의 겁을 통해서 업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몽땅 짊어지고 내가 지금 현재 있는 겁니다. 그건 물질로 돼 있는 게 아니고 체가 있는 게 아니어서 내 마음에, 컴퓨터에 들어가 있듯이 의식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겹겹이 있다 이겁니다. 그런 모든 거를 나오는 대로 거기다 놓지 않으면 그 습을 뗄 수가 없고 그 습을 녹일 수가 없어요. 홀연히 자기 참자기의 그 생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깐 그것을 발견하려면, 그것을 개발하려면 놔야 되는 것입니다. 믿고 놔야 돼요. 자기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도 ‘네가 이 자리에 있으면 네 앉은 자리가 전체, 우주 전체 그 자리가 도량이니라. 저기 가 앉으면 저기에 부처가 있는 거고….’ 아, 여북하면 변소에 가면 변소에 계시다니까요. 그렇게 놓지 않으면 어떻게 그 미지수의 세계를 뚫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게 하려면…
질문 요즘 아이들이 잦은 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생활에 여유가 없습니다. 돈이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만 아이 하나만 아파도 가족들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근심이 집안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스님, 아이들의 아파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내 속에서, 이 지금 오장 육부 속에 생명들이 수십억 마리가 지금 들끓고 있습니다. 그 의식 자체를 지배하는 거는 내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몸뚱이는 의식만 빠지면 송장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생명들이 운행하는 데에 간이 아프다 위장이 아프다 그럴 때 위장 공장에다가 직속 ‘야, 너희들이 아프게 한 거니까 너희가 낫게 해야지.’ 한다면, 그대로만 해 보세요. 그리고 아이들로 인해서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아이들의 주인공도 둘이 아닌 까닭에 내 주인공만이 내 아이들을 잘 이끌어 줄 수 있을 거다.’ 하는 것을 믿고 거기다가 맡겨 보세요. 바깥으로 반드시 나옵니다.
아픈 거나 가난한 거나 가정의 우환이나 또는 인과응보로 인해서 오는 거나 유전성으로 오는 거나 영계성으로 오는 거나, 용광로에 헌쇠들을 넣으면 자동적으로 쇠가 생산이 돼서 나가듯이, 모든 일체를 다 그렇게 해서 용광로에 넣는 작업만 한다면 새로 생산돼서, 이름을 가지고 다시 나가는 것은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위대한 말을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위대하든지 위대 안 하든지, 생활 속에서 어려운 사람이든 거지든 부자든 그거 아랑곳없습니다. 돈이 많든 적든 그것도 아랑곳없어요. 내가 일하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똥 누면서도 자면서도 항상 내가 내 앞에 닥친 거를 내가 생각날 때에….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엎드러지면 누가 일어납니까? 엎드러진 놈은 누구고 일어나는 놈은 누구입니까? 자기가 엎드러졌으면 자기가 일어나야죠? 그렇기 때문에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어요. 이열치열! 병이라는 건 몸만 아파서 병이 아니에요. 마음의 병도 병입니다.
또 정신박약아가 되는 것도 여기에서, 자기한테서 나온 거지, 인과응보로 나왔든 유전성으로 나온 거든 세균성으로 나온 거든, 또는 척추에서 나온 거든 두뇌에서 나온 거든 그건 아랑곳없이 거기서 나온 거 아닙니까? 결국은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한테서 나온 거죠. 그런 거니까, 자기한테서 나온 거니까 자기한테다 맡기세요. 기계도 조립한 사람이 잘 고치듯. 그러니까 자기한테서 나온 거니까 자기한테다가 맡겨라 이겁니다. 맡겨 놓고 ‘어, 거기서 나온 거니까, 내 주인공에서 나온 거니까 내 주인공밖엔 고칠 수 없구나. 주인공, 너 알아서 해.’ 하고선 맡겨 놓고 관해 본다. 이거 관한다 하는 건 지켜본다 이겁니다. 지켜보면 그때에, 바깥으로 어떠한 문제가 나올 때에 자기가 실험할 수 있다 이겁니다.

모든 문제는, 자기 주인공에서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도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이 전깃불과 같다. 스위치를 올리면 이 방에도 들어오고 저 방에 들어오고, 전력이 가설이 다 돼 있으니까 내가 다니면서 스위치를 올리면 방에 불이 들어오죠? 전력이 들어오는 그 과정은 모르지만 불 들어오는 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는, 전력이 들어오는 과정은 보이지 않지만 불이 들어오는 과정은 봤다 이겁니다. 불 들어왔잖습니까? 그러니까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온다는 건 믿으시죠?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자기한테도 영원한 자기의 그 근본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악행하는 그 마음도 선행하는 마음도 다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좋은 생각으로써 ‘거기에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하고 믿었을 때 바로 보이지 않는 전력이 보이지 않게 들어오듯이, 내 마음의 법성신의 그 뜻이 돌아서 바로 나한테 턱 나타날 때 그 기쁨이란 말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조그마한 걸로부터 나를 실험해 보고, 내 몸으로 실험하고 내 가정으로 실험하고 내 사회로 실험하고 또 어떠한 나라로 실험하고, 이렇게 자기가 한번 던져 보고 자기가 실험하고 이렇게 해 보면 그게 나타나고, 그렇게 되면 자기가 밝아집니다. 자기 본래면목을 밝게 볼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전각마다 부처님이 계시는데
질문 저는 산을 좋아해서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산엘 갑니다. 그런데 산에 가면 절이 있어서 참배를 드리게 되는데, 대웅전에도 여러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만 전각마다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스님, 모든 부처님과 전각에 다 참배를 해야 하는지요? 왠지 빠트리게 되면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서 여쭤 봅니다.

답변 각 사찰에 이 모든 부처님을 모셔 놨든 신중당을 모셔 놨든, 하다못해 돌을 모셔 놨든 상관할 것 없어요.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건 부처다 부처가 아니다 하는 대로 가는 거니까요.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만물만생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고 감사하지 않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이렇게 각자 찾으렵니까? 부처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은 배를 타려고 뱃사공한테 가면 뱃사공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뭐 물건을 하나 사려고 공장에 갔다 한다면 공장 주인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내가 치과에 갔더니 정말 그 치과의 박사가 으뜸입디다. 네? 그러니까 이게,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다 으뜸이에요.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를,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하는 그 말씀의 뜻을 모른다면 백문선이 헛문선이죠. 그러니 내가 부탁할 것은 어느 법당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모두 일불(一佛)의 한생각으로써, 한마음으로써 부처님한테 지극하게, 내 한마음과 일체제불의 한마음을 다 한꺼번에 해서 일배를 올린다면 천배 올린 것보다 수확이 좋다 이겁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처님한테 갔을 때에 어떻게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 부처에도 놔야 하고 저 부처에도 놔야 하고, 요 부처에 놓지 않으면은 자식이 어떻게 될까, 요 부처에 놓지 않으면 영감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또 재수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또 삼재가 들었으니 언짢으면 어쩌나? 이러한 까닭에 없는 살림에 몇 푼 가지고 가서 요기도 놓고 저기도 놓고 놓으려니 어떤 땐 모자라서 그냥 나오면 마음이 께름칙하다 이겁니다.

모두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한 부처님 앞에 그냥 고스란히 놓고 지극하고 정성스럽게 모두 거기 계신 분들을 한마음으로 모시면서 지극하게 하시고요, 없으면 지극하게 나오시고요. 또 있으면은 있는 대로 그 절에 다 놓더라도 한마음으로써 놓으시고, 또 웬만하면 그 절의 주지스님을 찾아서 주지스님한테 “모두를 다 써 주십시오.” 하고 이렇게 갖다 놓는 겁니다. 왜냐. 그것은 거기 갖다 놓는 거나 산 부처님한테 갖다 놓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백만 원짜리를 사러 갔다면 백만 원을 꼭 줘야 삽니다. 오십 원짜리 사러 갔으면 오십 원짜리는 꼭 오십 원짜리를 줘야 합니다. 오십 원을 주면은 오십 원짜리밖에 안 줍니다. 그러니 그것은 돈을 스님한테 준 사이도 없고 부처님한테 갖다 놓은 사이도 없는 겁니다. 또 가져간 사이도 없죠. 부처님이 준 사이도 없고 스님네들이 준 사이도 없죠. 그래서 준 사이도 없고 가져간 사이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정확합니다. 이 뜻을 잘 알아서 행하시도록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생멸심과 적멸심의 관계
질문 우리의 마음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찰나에 일어났다가 찰나에 없어졌다 또 찰나에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그런 작용이 끊임없이 지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 중에는 한생각 일어났다가 한생각 없어지는 그 생멸심이 곧 멸하면은, 그것이 쉽게 말해 본래 마음이다. 즉 불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고요한 적멸심의 자리와 끊임없이 일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그 생멸심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요.

답변 우리가 여기 걸어올 때에 한 발 떼었다 한 발 놓고, 한 발 떼었다 한 발 놓고, 이게 생멸입니다. 이게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알려고 말로 표현을 하자면. 안 그렇습니까? 일어났다 또는 가라앉았다 이게, 마음이 이렇다는 것과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하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이게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하는 작용이 없으면 우리가 걸어 다니지 못합니다. 안 그런가요? 일어났다 가라앉고 하는 그 마음이 없다면 성불이라는 말도 없을 거고 중생이라는 말도 없을 겁니다. 이해가 갑니까?
한번 방편으로 얘기해 볼까요? 아버지 노릇 하다가 남편 노릇 하다가 또는 형님 노릇 하다가 자식 노릇 하다가 이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거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금방 일어났는데 금방 딴 걸로 돌아갔어요. 금방 딴 걸로 돌아가고 딴 걸로 돌아가고, 이렇게 일어났다 놓았다가 일어났다 놓았다 해도 그냥 여여하게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냥 “여보!” 하면은 “왜 그래?” 하고 일어나는 마음, 그 일어나는 마음은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악으로나 선으로나, 일어나는 마음을 잘 응용을 하면은 선이 되고 잘 응용하지 못하면 악이 됩니다. 싸움을 할래도 “여보!” 할 테고, 좋은 말을 할래도 “여보!” 할 겁니다. 그런 걸 대치를 해서 잘 응용한다면 바로 그것이 부처님의 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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