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불교 70년- 선원

정화운동 이후 통합종단 출범하며
무문관 개원 등 선수행 열기 확산
불교 전통 안거 문화 그대로 계승
1980년대 이후 꾸준히 방부 늘어
간화선 대중화 위한 노력도 이어져

한국불교에서 ‘선(禪)’이 가지고 있는 비중은 크다. 특히 대표 종단인 조계종은 ‘선종(禪宗)’을 표방하며 종지 역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으로 선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1700년 한국불교 역사에서 선법이 전해진 것은 도의선사가 821년(신라 헌덕왕 13년) 중국 선종 제6조 조계혜능의 선을 계승한 서당지장(738~817)의 인가를 받아 오면서 각 지역에 선문(禪門) 개설되고 그 뿌리를 내리게 됐다. 고려시대에는 지눌 스님(1158~1210)이 대혜 스님(1089~1163)이 제창한 간화선을 도입하고 송광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를 전개하면서 간화선을 수행체계로 삼았다. 이후 8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 수행과 문화의 전통은 한국불교의 ‘아이콘’으로 오롯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월정사 만월선원에 동안거 방부를 들인 납자들이 수행 정진하고 있다. 안거 수행이라는 불교 전통을 한국불교는 오롯이 지켜내고 있다.
격량의 근현대… 선원의 중흥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 안에서도 간화선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다만, 당시 선원의 수행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얼마나 많은 선원에서 수좌들이 정진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근대 자료를 통해 선풍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대략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연구 자료들에 따르면 1935년 〈선원〉지에는 22곳의 선원에서 368명의 수좌가 정진했고, 1942년에는 68곳의 선원에서 하안거 대중이 505명, 동안거 대중이 34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공간부터 1960년대까지 불교는 6.25 한국전쟁과 정화운동이라는 시대의 격랑을 맞이하게 된다. 6.25 한국전쟁으로 사찰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사찰 경제에는 피폐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시작된 정화불사는 불교계는 비구-대처 갈등으로 접어들었다. 선원의 기록인 ‘방함록’도 제대로 발간되지 못했다.

하지만 통합종단이 출범하고 승려교육을 통한 청정 수행가풍을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히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1967년 선림회의 발족이다. 〈대한불교〉1967년 4월 23일자 보도에 따르면 선림회는 4월 14일 팔공산 동화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당시 선림회는 총림 운영, 선풍 진작, 조직 운영에 대한 건을 논의했고, 초대회장으로 석암 스님을 추대했다. 또한 선림회는 ‘순수한 선객들의 모임으로 선 사상이 철저한 본분납자로 20~60세의 비구·비구니’를 회원 자격으로 뒀다.

이들은 창립대회에서 “선 사상을 배양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납자의 단합을 촉구와 반성, 근신으로 상좌에게 순응하면서 자기 수행을 착실하게 하고 중도적인 길에서 총림을 실현시키자”고 선언하기도 했다.

선림회는 선풍진작을 위해 총림 개설을 추진해 해인총림의 조속한 운영을 주장했고 송광사의 조계총림, 용주사의 중앙 선원의 설립을 추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1967년 동안거부터 수행에 참여한 대중의 명단을 취합해 전국적인 방함록을 발간해 배포했다.(김광식, ‘방함록에 나타난 근현대선원’)

1970년부터는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에서 전국 선원 자료를 모아 방함록을 발행했으며, 1994년 종단 개혁과정에서 전국 수좌회가 결성되면서부터는 수좌회가 방함록 발간을 1996년부터 책임지고 있다.

방함록은 한국 선종사의 단면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들이 담겨 있다. 실제 조계종 교육원이 2000년 발간한 〈선원총람〉과 전국선원수좌회의 〈방함록〉 등을 살펴보면 1983년부터 현재까지의 안거 현황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한국불교의 선원과 수행의 외연이 어떻게 확장됐는지를 짐작케 한다.

실제 1980년대는 방내 대중이 700~800명 선이었지만, 1990년대로 넘어가면 방내 정진 대중 수는 1000명을 넘어가며 1990년대 후반에는 1600명 수준에 이른다. 안거 대중 수는 2000년대 들어와서는 1900~2200명이 매년 안거에 동참하고 있다. 2014년 동안거에는 2196명이 참여해 겨울 한철을 정진했다.

선원 수 역시 꾸준히 증가해왔다. 김광식 동국대 교수의 ‘방함록에 나타난 근현대 선원’에 따르면 1969년 안거 수행에 임원 선원은 39곳이었고, 1970년대에는 16개 선원이 새롭게 문을 열어 전국적으로 42~52개소에 달하기도 했다.

1980년대 선원 추이는 〈선원총람〉를 보면 알 수 있다. 1983년 하안거에는 32곳의 선원에서 정진을 했지만 1990년 하안거에는 선원 56곳에서 정진에 들어갔다. 2000년 무렵에는 70여 곳의 선원에서 안거 정진이 이뤄졌고, 현재는 전국 98개 선원에서 납자들이 안거마다 정진하고 있다.

고불총림 백양사 운문선원에 방부를 들인 수행 납자가 게으름을 보이자 선원 유나 스님이 장군죽비로 경책하고 있다.
선원 증가와 불교 발전
근대선원의 최초는 해인사 퇴설선원으로 1899년 11월 동안거에 경허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7명의 정진대중으로 개설됐다. 이후 경허 스님은 바로 범어사를 들려 다시 통도사 백운선원으로 가서 1900년 보광선원을 개설했다. 경허 스님을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꼽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해방 직후 한국불교의 선풍진작을 위한 대표적 사건은 봉암사 결사의 시작이다.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은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공주(共住)규약’을 정하고 이를 따라 실천하는 스님들만 방부를 같이 정진했다. 처음은 성철, 자운, 보문, 우봉, 청담 스님으로 시작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성수, 종수, 지관 스님 등 20여 명으로 늘었고, 비구니 묘엄, 묘찬, 지영, 재영 스님 등은 백련암에서 참여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됐지만 그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 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했고 1984년에는 종립 특별선원으로 지정했다. 봉암사 결사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부처님오신날을 제외하고 산문을 절대 열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정화불사가 마무리되는 1960년대 이후에는 선원들의 중창과 개설이 많이 이뤄졌다. 불국사 불국선원은 1974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대중안거에 들어갔고 前 조계종 총무원장 월산 스님이 공사비 1억 원을 들여 1976년 불사를 진행해 현재의 사격을 완성했다. 불국선원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범룡, 송담, 일타, 법달, 정일, 혜정 스님 등 명안종사가 선풍을 드날렸다.

현대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1971년 부산 해운정사를 창건하고 금오선원을 1975년 개설했다. 해운정사 선원은 상선원과 하선원, 시민선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금모선원 큰방인 상선원은 수좌 스님들이 새벽 2시 30분 기상해 참선에 들어가 11시간 가행정진 중에 있으며, 하선원은 재가선원으로 재가자들이 납자들과 마찬가지로 안거에 들어 8시간 정진한다. 시민선방은 사찰 내 원통보전에 자리하고 있으며 매주 토요일 일반 불자들이 철야 정진을 해오고 있다.

만공 스님의 제자 혜월 스님의 법을 이은 전강 스님의 유지를 이은 선원은 용주사 중앙선원과 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이다. 용주사 중앙선원은 1969년 동안거 결제를 가지면서 첫발을 내딛었다. 전강 스님 제자 송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용화사 법보선원은 1963년 전강 스님에 의해 창건됐으며 비구 선원, 보살 선원, 시민 선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현대 비구니 선지식 인홍 스님이 1957년 창건한 석남사 정수선원도 한국 선원 발전사에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1957년 개설된 석남사 정수선원은 1963년부터 3년 결사를 진행했으며, 1999년 조계종립 비구니 특별선원으로 지정됐다.

봉암사와 마찬가지로 산문을 폐쇄하고 정진하는 비구니 선원도 있다. 영화 〈길위에서〉로 알려진 은해사 산내 암자 백흥암이다. 백흥암은 1981년 도감 육문 스님과 영운 스님이 폐사 직전의 백흥암을 맡으면서 불사를 진행해 당해 동안거부터 대중을 받았다. 언제나 비구니 스님 수십 명이 방부를 들고 노동과 수행을 병행하고 있으며, 부처님오신날과 백중을 제외하고는 산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문없는 문’ 무문관 수행
무문관(無門關)은 한국불교 활발발한 선풍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전통이다. 무문관은 아무나 들 수 없는 곳으로 법랍이 높은 스님들이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깨달음을 얻고자 문을 닫아걸고 용맹정진한다.

현대불교사에서 무문관을 처음 개설한 곳은 서울 도봉산 천축사다. 1964년 당시 주지였던 정영 스님은 선객들이 참선도량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듣고 무문관의 필요성을 절감, 처음으로 천축사에 공식적인 무문관을 개설했다.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6년 결제에 들어갔는데, 2회차를 마친 후 1979년까지 100여명의 수좌들이 방부를 들였지만 기한을 제대로 채운 스님은 그리 많지 않아 2회만에 중단됐다. 너무나 규칙이 엄했기 때문에, 보문·관응·구암·제선·현구·지효·경산·도천·관묵·천장·도영 ·석영·무불·원공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만이 이름을 남겼을 정도다.

이들 중 6년 기한을 채운 스님은 3명에 불과다. 1회 때는 관응, 제선 스님이, 2회 때는 구암 스님이 원만회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에는 계룡산 대자암에 무문관 선원 ‘삼매당’이 개설됐다. 천축사에 처음으로 무문관 수행 기풍을 세운 정영스님이 20여년의 정성으로 조성했다. 1994년에는 제주도 남국선원에 무문관이 개설됐다. 이곳의 수행자 법랍은 평균 20년이상으로, 정진력을 검증받지 않고는 입방이 힘들다.

1998년 여름에는 설악산 백담사에도 ‘무금선원’이란 이름으로 무문관이 생겼다. 비구계를 수지하고 10안거 이상을 지낸 스님만이 들어갈 수 있다. 2000년 4월부터 3년 과정으로 5안거 이상을 지낸 9명의 스님이 정진결제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조실인 설악 무산 스님이 직접 무문관에 입방해 동안거 기간동안 정진했다. 또한 백담사 무금선원은 종립 기본선원으로 신참 납자들이 방부를 들고 안거 정진한다.

2002년 4월 10일에는 강진 백련사(주지 혜일)도 처음으로 무문관 입재 방부를 받았다. 1억5천여만원의 예산으로 건립된 무문관(만덕선원)은 건평 40평에 5개의 독방이 갖추어져 있으며, 욕실과 철저한 방음시설 등을 갖춰 오랜 기간의 무문관 수행에도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도 한국불교대관음사 감포도량 무일선원에도 무문관이 개설됐으며, 현재 회주 우학 스님이 무문관 정진 중이다.

백담사 무문선원 입구. 사중 스님이 무문관 입구를 걸어 잠그고 있다.
한국 선불교 세계화위한 선원
한국불교의 간화선의 선풍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시도도 꾸준히 이뤄져왔다. 승보사찰 조계총림 송광사의 방장이었던 구산 스님은 1973년 하안거부터 한국 최초의 국제선원인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해 한국불교에 관심 있는 외국인과 해외 스님들에게 한국 선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앞장섰다.

외국인으로써 송광사에서 출가 수행했던 사람 중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 교수 로버트 버스웰(법명 혜명)이 유명하다. 이후 버스웰 교수는 보조국사의 영문 법어집을 비롯해 최근에는 불교영어사전을 펴내는 등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은 1989년 기공식을 열고 1992년 3월 한국불교 세계화의 거두였던 숭산 스님이 개원했다. 이후 국제선원은 외국인 스님들을 바르게 교육시키면서 선 중심의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한 전진기지로서 일임을 담당하고 있다. 2011년에는 외국인 행자교육원이 개원됐다.

2000년 3월에는 계룡사 무상사 국제선원가 창건됐다. 무상사는 매년 최소 300여명의 외국인들이 무상사 국제선원을 찾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 홍콩, 싱가폴, 말레이시아,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등의 불교단체와 100여개 이상의 세계각지의 젠 센터에서 무상사를 찾아와 수행하고 있다.

강화 연등국제선원은 외국인 불자를 위한 전문 선원으로 1997년 9월 28일 성철 스님의 제자 故 원명 스님이 개원했다. 1980년도 초에 스리랑카와 영국에서 유학한 원명 스님은 유럽에 한국불교가 거의 전무한 사실을 알고 국제포교의 서원을 세웠다. 이후 국제 포교를 위하여 외국인을 위한 불교 기초교리 강좌, 영어로 불교 경전 공부하기, 참선강좌, 한국문화 배우기 등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선원을 건립하게 됐다.

이밖에도 인도의 룸비니 석가선원, 하와이 대원사 선원, 신원사 국제선원 등 세계 각국에서 한국불교의 간화선을 알리기 위한 선원들이 창건돼 활동해 오고 있다.

禪 전문연구 ‘활성화’
한국불교 선 수행은 더 이상 사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 재가 선원이나 시민선방은 1990년대 이후 많이 대중화됐으며, 전문적 학문 연구의 한축을 이루고 있다.

前 동국대 교수 성본 스님은 자신이 설립한 한국선문화연구원을 통해 선 관련 학술서와 대중서를 비롯해 대승경전과 어록, 선학, 선문학, 선문화, 선과 다도 등을 강의하고 있다.

2000년 3월에는 한국선학회(회장 신규탁)가 정식으로 창립됐다. 앞서 열린 2월 열린 발기인 모임에는 현각 스님, 법산 스님, 종범 스님, 성본 스님, 권기종, 이평래 등이 참석해 창립을 논의했다.

발기인들은 당시 “선은 한국의 전통이자 고유사상이지만 깊이 있는 연구나 체계적 이론정립, 현대화, 생활화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서 “한국선학회를 창립해 한국선 전반에 대한 연구, 선학의 기초 이론에 대한 정리, 간화선 및 위빠사나와 여타 명상법 등 수행방법에 대한 고찰, 정치·경제·사회·문화·환경·교육 등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선적 해법의 모색, 이들을 종합한 선의 생활화, 나아가 한국선의 세계화를 위한 방안 등 모든 부분들에 대해 폭넓게 연구 토론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선학회는 춘계와 추계 학술대회를 비롯해 매년 3회에 걸쳐 학회지를 발간하고 있다. 선학회 학회지는 2009년 12월 학술등재지로 승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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