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31회 - 사자탑 1

용맹·위엄의 상징 사자
불교 조형물·상징으로 표현돼 와

사사자 석탑 한국의 독특한 양식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대표적’
4마리 사자상 가운데 인물상 봉안
가운데 인물 빈신비구니로 추정
부처님 공양하는 이상적 모습 제시

우리나라에서 ‘사자’는 그리 친숙한 동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한국인들에게 수호의 의미가 담긴 전통적 맹수의 상징은 호랑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 남아있는 불교유적에서는, 호랑이가 아닌 사자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사실 용맹함과 기품을 모두 갖춘 사자는 부처님과 인연이 매우 깊다. 사자는 두려움이 없고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부처님을 호위하는 동물이다. 또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소리는 사자후(獅子吼),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자리는 사자좌(獅子座) 등으로 표현될 만큼 부처님과 사자의 상징적 관계는 긴밀하다. 이러한 상징성은 불탑, 승탑, 석등 등 다양한 불교문화 조형물에서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 본 7세기의 익산 미륵사지나 경주 분황사모전 석탑의 사자상을 비롯해 8세기 중엽에 세워진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은 섬세함을 가진 그 모습 자체로도 눈에 띈다. 그 중 특히 다보탑의 기단 위에 배치된 한 마리의 사자상은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은 탑의 한가운데 놓여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사자상은, 원래 다보탑 상층 기단의 사면 모서리에 각 한 마리씩 총 네 마리가 탑을 지키고 있는 형태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마리가 소실되고 두 마리는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세 마리가 사라지고 현재 한 마리의 사자상만 남아 탑을 수호하고 있다. 이처럼 다보탑의 사자상은 탑의 바깥에서 사자가 탑을 지키는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8세기 중엽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석탑 중엔 사자상을 아예 탑의 부재로 사용한 경우가 있었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石塔)〈사진1〉이 바로 그것인데, 높이 5.5m의 이 탑은 사자상의 배치에 있어 다보탑과 큰 차이를 보인다. 화엄사의 사자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또 그 위에 보주를 놓은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상층기단에 있어, 우주라고 하는 기둥 대신 네 마리의 사자가 놓여 탑의 기둥 역할을 대신 한다는 특이점을 갖고 있다. 단순히 탑의 기단 바깥 면에 배치된 다보탑 사자상의 모습과는 달리, 기단 안쪽에 직접 놓여 탑신을 머리로 받치고 있는 사자들의 모습은 가히 경이롭다. 암수 두 쌍의 이 사자들은 대체 어떠한 이유로 돌의 무게를 온 몸으로 견디며, 이토록 숭고한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것일까?

▲ 사진1. 화엄사사사자석탑과 석등공양상. 화엄사 사자탑의 입상이 연기조사 어머니로 둔갑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효 사상을 강조한 결과로 보이며 실제 입상의 주인공은 빈신비구니로 추정된다.
이 사자들은 각기 다른 입 모양을 한 채 연화대 위에 앉아 사방을 지키고 있는데, 상층기단에서는 사자상 외에 한 가지 더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그 것은 바로 네 마리 사자들의 중앙에 위치해 사자들과 함께 머리로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한 분의 입상이다. 이 입상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정면을 바라보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공양하는 모습을 한 인물상과 석등이 눈에 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석등 안 인물상이 바로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이며, 탑 안의 입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한다. 효심이 매우 깊었던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비구니의 모습으로 담아 탑 안에 안치하였고,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자신의 모습은 석상 안 인물상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화엄사 내의 각황전 뒤쪽 언덕, 효대(孝臺)에 올라 이 사자탑과 석등을 발견한 사람은,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라 서로 마주 본 연기조사와 그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는 ‘역시!’라는 감탄사와 함께 언덕이름이 가진 ‘효(孝)’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볼 것이다. 이처럼 탑의 배경이 된 연기조사 이야기는 참배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준다. 하지만 이 탑의 조형양식이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만 나타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상층기단 위에 네 마리의 사자상과 그 중앙엔 인물상을 봉안하는 이 같이 독특한 형식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조성되어왔다. 화엄사의 또 다른 사자탑인 각황전 앞의 사자탑〈사진2〉의 상층기단 역시,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9세기 경, 앞서 만들어진 사사자석탑의 영향으로 이 탑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진2. 각황전앞 사사자석탑
강원도 회양군에 위치한 금장암지 사사자삼층석탑〈사진3〉은, 고려 초기에 조성되어 현재 북한 국보급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3.7m 높이로 기단부와 삼층의 탑신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절터에 탑과 석등이 함께 남아있다. 석등 안엔 현재 공양하는 인물상이 존재하진 않지만, 석등이 탑 바로 앞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화엄사의 사사자석탑과 그 형식이 닮아 있다. 탑의 상층기단 모퉁이에서 갑석을 머리로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가 힘 있고 늠름하게 다리를 뻗어 앉은 모습 역시 비슷하다. 상층기단 중앙에 인물상이 놓여 있다는 점 또한 유사하다.
▲ 사진3. 금장암사사자석탑
충북 제천의 월악산 송계계곡에 위치한 빈신사지 사사자석탑〈사진4〉은 고려 현종 13년(1022년)에 조성 되었다. 지대석과 하대석, 그 위에 상하층기단과 탑신부로 구성된 이 탑은 본래 탑신부가 9층이었지만 일부가 소실되어 지금은 4층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하층 기단석의 남쪽 면에 10행 79자로 이루어져, 탑을 조성한 이유를 적은 조탑 연기문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명문을 해석하면, ‘고려국의 중주 월악산에 있는 사자빈신사에서 불제자인 동량들은 받든다. 대대로 성왕들이 영원히 만세를 거하고, 천하가 태평하며, 법륜이 이 세계에서 항상 이어지기를 바란다. 영원히 원한이 있는 적을 물리치고, 후에 이 몸이 파사에 나기를 바라며 곧 화장 세계를 알아 정각을 깨닫기를 원한다. 삼가 구층석탑 1기를 조성하여 영원히 공양할 것이다. 대평 2년 4월일 삼가 쓴다.’ 는 내용이다.
▲ 사진4. 제천 빈신사지 사사자석탑.(출처-조선고적도보)
이를 통해 탑의 조성연대와 사찰의 이름 및 양식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불탑 역시 상층기단에는 화엄사 사자탑과 같이 기단의 각 귀퉁이에서 탑신을 머리에 이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있다. 이 사자들은 고개가 사방을 향해 있으며, 탑을 수호하기 위해 주변을 경계하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그 가운데엔 두건을 쓰고 지권인(指卷印)을 한, 좌상 하나가 있다. 이 좌상의 명칭에 대해서는 지권인이라는 수인을 근거로 비로자나불이라고도 하고, 두건을 두른 이유로 지장보살상이라고도 하며, 사자빈신사라는 절의 명칭과 연계하여 빈신비구니라고 주장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필자는 이 좌상이 당연 빈신비구니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빈신비구니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한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해탈에 이르는 진리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의 행각을 기록한 내용이다. 이중에 25번째로 찾아가는 선지식이 바로 빈신비구니다. 〈화엄경〉에서 빈신비구니는 선재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설한다.

도솔천궁에 계시는 보살에게와 같이, 태에 들어 있고 태에서 탄생하고, 재가자나 출가자나, 도량에 나아가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며, 이러는 중간에 천궁에 있기도 하고, 용궁에 있기도 하고 궁전에 있기도 하는 여래가 계신 곳에서 나는 이렇게 공양하였다. 모든 중생들이 내가 이렇게 부처님께 공양한 줄을 아는 이는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며, 어떤 중생이나 나에게 오면 나는 반야바라밀을 말하여 주었느니라… 〈대정장10권. 363P〉

이 경설에 따르면, 빈신비구니가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모습을 모든 중생들이 보기만 하여도 무상정등정각의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빈신비구니가 공양하는 그 모습을 불탑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석등안의 공양상 역시 선재동자가 예의를 갖추고 설법을 들으며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사자탑을 통해 보리심을 일으킨 중생들은 다양한 현실세계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부처님께 공양하는 보살의 이상적인 수행 자세를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필자는 빈신사지사자탑은 물론 화엄사사자탑 입상의 주인공을 빈신비구니라고 본다.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 국가적 불사로 조성된 화엄십찰 중 화엄사상의 종찰로 세워진 곳이다. 때문에 아무리 효심이 뛰어난 연기조사라 하더라도 부처님 사리를 모신 불탑 안에 어머니를 모셨다는 것은 교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화엄사 사자탑의 입상이 연기조사 어머니로 둔갑된 것은, 바로 조선시대 후기에 효 사상을 강조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사자탑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근본 사상과는 달리 형식과 양식이 경전에 설해진 기준에 못 미치는 아류성 불탑들로 변모되기도 했다.

▲ 사진5. 홍천 괘석리 사사자석탑
고려시대에 조성된 홍천 괘석리 사사자석탑〈사진5〉이 대표적인데, 이 탑은 본래 홍천군 두촌면 괘석리 절터에 있던 것이지만 1969년에 홍천군청 정원으로 옮겨졌다. 기단 위 네 마리의 사자가 모퉁이에 서서 갑석을 받치고 있으며, 하층 갑석의 원형 안에는 8엽의 연화문이 있어 빈신비구니상을 안치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이 탑의 사자상에서는 사자의 위엄을 나타내는 갈기도 찾아볼 수 없으며, 강아지 목에 채웠을 법한 귀여운 방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자의 표정 역시 탑을 지키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적인 얼굴로 주변을 경계한다기보다는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이다. 힘차고 용맹한 사자상이 없는 괘석리 사사자석탑의 모습은, 참배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이같은 사자탑은 근래에 들어와 전국 각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 예로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은평구의 삼천사 사자탑〈사진6〉을 들 수 있다. 화엄사 사사자석탑의 사자상이 암수 두 쌍으로 이루어져 제각각 다른 입 모양새를 하며 사자후를 상징한 것과 달리, 이 탑의 사자상은 모두 같은 입 모양을 하고 있다. 또 네 마리의 사자상 가운데 2구의 좌상이 등을 맞대고 놓여 있지만, 승상인지 불상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서 아쉬움이 남는다.
▲ 사진6. 삼천사 사자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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