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30〉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의 세 불전 천정감실에 베푼 조형들이다. 팔상전 감실의 조형이 회화적이고 정물적이라면, 나한전의 천정은 기하적이고 추상적이다.

육당 최남선, 독성을 단군으로 주장
빗반자에 주악, 공양, 가무비천 벽화
가무비천 대단히 무속적이며, 현실적
길상과 수복강녕 기복 담은 문자도

한 건축에 세 불전 수용한 독특함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捌相獨聖羅漢殿)은 하나의 전각에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의 세 불전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한 지붕 세 가족’ 형태의 독특한 건축이다. 정면 7칸, 측면 1칸의 건축으로 전각을 향하여 섰을 때, 왼쪽부터 차례로 팔상전-3칸, 독성전-1칸, 나한전-3칸의 대칭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특이한 건축형태는 하나의 전각을 세 불전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독립적인 세 건축을 하나의 불전으로 통합한 희귀한 형태다. 지금의 형태로 중건한 것은 100여년전인 1905년 경이다. 1905년에 학암(鶴庵)스님이 팔상나한독성각을 중건하고 제 성상(聖像)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관변학자였던 세키노 타다시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1902년에 전국의 고건축을 조사하고 1904년에 발행한 <한국건축조사보고>를 보면 중건 이전의 모습이 개략적으로 묘사 되어있는 바, 팔상전과 나한전은 독립된 건물이고, 두 건물 사이에는 ‘천태문(天台門)’이라는 출입문이 있을 뿐이다. 즉 1905년 중건과정에서 천태문이었던 공간을 좌우 건물의 지붕과 벽체를 연결해서 내부공간으로 만들어 독성전을 조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성전의 아치형 출입구와 力士

2009년 팔상독성나한전 지붕보수과정에서 세 건의 상량문 종이기록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공사인원 21명 중에서 승려는 3명, 18명은 민간장인임을 밝혀 조영역량이 승장중심에서 민간중심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 여러 장인들이 기교를 다형 문설주와 창호를 내었다고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팔상독성나한전 건물의 외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독성전 아치형 출입구다.

출입구의 반원은 하나의 나무를 둥글게 휘게한 고난도의 기술을 구사했다. 독성전의 독성(獨聖)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연각(緣覺)을 이른다. 독성은 흔히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하다 성자가 된 나반존자(那畔尊者)로 알려진다. 그런데 독성전은 산신각처럼 우리나라 불교에서만 나타나는 민간 기복신앙의 사례다. 육당 최남선선생 같은 분은 독성을 단군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팔상전 닫집에 서로 서로가 연기법으로 결합된 방승(方勝), 전보(錢寶), 서각보(犀角寶) 등의 팔보문양이 있고, 독성전에 곽분양 행락도(郭汾陽行樂圖) 민화에 나오는 백자도(百子圖)의 자손번창의 벽화양식이 여러 편 그려져 있으며, 나한전 천정에 문자 길상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불교 속에 편입된 민간 기복신앙, 곧 한국불교의 독특한 유불선(儒彿仙)의 습합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독성전에서 반원형 출입구와 함께 아치형 바깥 판벽에 풍성하게 초각한 모란꽃 문양과 남녀인물상도 주목을 끈다. 남녀인물상은 모란꽃 화판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다. 인물 조각상의 크기와 관계없이 이 조형은 건축, 곧 세계이며,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상징에 다름 아니다.

강화도 전등사 대우보전 추녀에 조영한 나부상과 동일한 모티프다. 이같은 조형은 남양주 흥국사 대웅전 추녀, 법주사 팔상전 귀공포 등에서도 나타나고, 경주박물관 소장 석탑상에도 각 면마다 두 명의 인물상이 탑의 지붕을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 보인다. 인물상은 중국 북송의 토목건축책 <영조법식>에서 말한 ‘각신(角神)’에 다름 아니고, 고구려 벽화고분 삼실총 등에서 신성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하늘의 역사(力士)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팔상전 닫집에 베푼 팔보문양과 평면 우물천정의 삼태극연화문, 그리고 대들보 머리초로 입힌 드문 사례의 불수감 머리초다. 나머지는 감실천정의 세부다.
천정 곳곳에 민간 기복신앙 포용

세 불전의 천정은 다양한 주악비천과 공양비천, 가무비천상 벽화들의 커다란 갤러리다. 천상의 소리인 범패와 무용의 작법, 부처님과 아라한의 응공에 환희의 신심으로 올리는 육법공양의 벽화가 파노라마처럼 연속의 띠를 이루고 있다. 바탕에 신성한 붉은 구름이 여름날의 적란운처럼 뭉개뭉개 가득 피어 오르고, 온 몸을 휘감은 천의(天衣) 자락은 우아함과 율동미를 두루 갖춘 채 신명으로 한껏 부풀어 휘날린다. 펄럭이는 천의의 띠 그 자체가 음악이고, 무용이고, 신명이다. 천의의 의태 속에 펄럭이는 의성어가 이미 충분히 깃들어 있다. 비천의 표정에는 신심이 우러나온 듯 기쁨이 충만하고, 온 몸에 신명의 기운이 분출한다.

주악비천이 갖춘 악기는 삼현육각의 젓대, 해금, 북, 장구는 물론이고, 영산재에 쓰이는 태평소, 나각, 생황, 바라를 비롯해서 농악의 징, 괭과리, 궁중의식의 박, 운라, 나발에 이르기까지 전통악기의 진열장을 연상케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의 동작엔 힘과 에너지가 일렁이는데, 대단히 힘차고 역동적이다. 커다란 쟁반이나 함 등에 담아 나르는 공양물들도 풍성하고 다양하다. 수박, 석류, 가지, 불수감, 연꽃 등이 공양물로 오른다. 득남과 수복강녕을 바라는 민간 기복신앙의 상징이며 민화적 요소들이다.

특히 부처님의 손 모양으로 생긴 과일인 불수감(佛手柑)은 석류, 복숭아와 함께 민간에서 다남자(多男子), 다복(多福), 다수(多壽)를 상징하는 ‘삼다(三多)’의 하나로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조형의 본질은 생명력의 씨방이자, 우주적 모태들이다. 단지 민간과 접촉하면서 철학적 깊이가 대중의 흥미에 부합해 갔을 뿐이다. 대중성을 구하다 보면 철학적 깊이와 근원을 잃게 마련이다. 비천의 형상도 대중 속에서 취했다. 범어사 팔상전 벽화에서 비천의 형상은 인간적인 진솔함을 풍기고, 또 다분히 민중적이어서 이웃처럼 다정하고 친근감이 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의 변모다. 작법의 춤패 역시 대단히 무속적이며, 현실적이다. 풍속화나 감로탱에 보이는 무당과 사당패를 비천의 조형 모티프로 삼았음을 짐작케 한다. 민간의 기복신앙을 흡수한 한국불교의 독특함과 포용력의 면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대중성으로 불교의 활로를 개척해나가는 한 시대의 흔적이 점점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를 넘어선 인상주의의 찰라에 가깝다.

빗반자 천정에 베푼 주악비천벽화
꽃-보주-물고기 원융무애의 법계

각 불전의 천정 가운데는 감실을 마련해 두었다. 닫집이 아닌 감실천정의 형식은 매우 이례적이며 보기 드문 사례다. 팔상전과 나한전의 감실천정은 형식적 특수성과 함께 문양의 내용면에서도 고유성으로 독특하며, 그 소재들이 신선하다. 팔상전의 감실천정은 생명력의 필드(field;場)다. 필드의 내재적 법칙은 대칭성과 순환, 반복의 원리다. 필드는 관계의 통일장이다. 원융무애하여 조화로운 불교 화엄세계를 하나의 대칭적 필드를 통하여 대단히 함축적이며 심미적인 조형세계를 구현했다. 칸 칸 중앙에 연화좌의 불성이 빛나고 있고, 사방에서 붉은 새싹들이 돋아나며, 연꽃의 씨방에서 씨앗 형태의 보주들이 무더기로 분출하는 장면은 조형에 담은 철학적 사유의 근본으로 작동하고 있다.

법계(法界)는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무진연기의 세계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그 세계에서 숱한 꽃이 피고, 숱한 생명이 유영한다. 팔상전 감실천정은 새싹과 꽃과 보주, 물고기 모두가 상즉입하는 화엄의 무진법계 장(場)이다. 현상학적인 형식논리 너머에 조형의 진리를 함장해 놓았다.

나한전 감실천정의 장엄은 길상(吉祥)과 수복강녕(壽福康寧)의 기복을 담은 문자도여서 이채로움을 더한다. 수복강녕이나 쌍 희(囍)자 문자장엄은 경복궁 자경전 등 궁궐에서 통용되는 것이기에 사찰장엄에선 의외의 소재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기복신앙을 불교 깊숙이 수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임에 분명하다. 나한전 감실천정은 책 표지 장식 목판인 능화판(菱花板) 문양이나 변상도 목판처럼 굉장히 짜임새 있고 빈틈없는 구도를 갖추었다. 한 가운데는 태양처럼 빛나는 커다란 원 안에 卍자를 오방불 구도로 배치하여 금강계 만다라의 오방불을 고도로 압축해 놓았다.

원의 중심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시다. 법신불로부터 팔방으로 진리와 자비의 붉은 빛이 퍼져나가는데, 법신의 빛을 꽃이 피어나는 생명력으로 아름답게 묘사해서 인상 깊다. 동심원의 물결처럼 팔방으로 퍼져나가는 파동이 돈오점수의 한 과정을 보는 듯 하고, 파장의 끝엔 마침내 붉은 꽃 한 송이로 만개하는 기승전결의 극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신묘하기 그지없다. 그 칸칸에 목숨 ‘수(壽)’자를 빨강, 청색, 초록, 주황색으로 번갈아 베풀어 수복강녕과 장수의 복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천정은 통도사 해장보각 천정에서나 드물게 찾아볼 수 있다. 명멸해가는 봉건왕조의 퇴락 속에서 불교부흥의 유일한 활로로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중의 기복욕구를 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시대적 숙명이였을 것이다. 시대의 개방적 흐름과 함께 대중 속으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합송하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국불교의 도도한 흐름을 장엄의 편린 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독성전 출입구에 새긴 남녀인물상. 우주법계를 떠받치고 있는 力士다.



 

팔상독성나한전 전경. 한 건축에 세 불전을 경영한 독특한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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