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 현대물리학과의 새로운 접점

열반 경지선 우주와 내가 하나
‘양자 얽힘’은 불교교리 뒷받침
불교교리, 과학 발달따라 각광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의 이론 물리학자 손 캐럴(Sean Carroll)박사가 쓴 〈현대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양자역학을 설명하다가 캐럴 박사는 불쑥 이런 말을 한다.

“현대물리학이 고대 불교의 지혜를 재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캐럴 박사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과학자들은 불교적 진리를 비롯하여 종교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해설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지만 모든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이 불교교리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종교적 현상이나 종교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해설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여기서 논의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캐럴 박사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내용이 불교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과, 관측 장비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뇌/신경과학이 불교의 선(禪)과 열반(涅槃)처럼 주관적인 종교체험내지는 종교현상에 관한 것들의 의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과학적 바탕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불교의 ‘선’과 ‘열반’의 의미를 물질과학인 물리학과 마음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뇌/신경과학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선지식들이 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말 중 가장 자주하는 것은 적적성성(寂寂惺惺)과 고도의 정신적 안정일 것이다. ‘깨어 있음’과 ‘정신적 안정’은 그런가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넘어 가게 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둘은 ‘안정과 동요(動搖)’라는 모순된 마음상태(paradox of calm commotion)를 뜻한다. ‘선’을 가리켜 ‘모순된 마음상태’라고 하는 것은, 적적성성은 정신이 별처럼 초롱초롱하게 깨어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깨어 있음’은 두뇌신경의 흥분 즉 활발한 활동(동요)에 대응하고, 정신적 안정은 두뇌신경의 낮은 활동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뇌파를 측정하거나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사용하여 선정 중에 있는 선승들의 뇌를 조사해보면 ‘안정과 동요’라는 모순된 심리적 사건이 두뇌에서 실제로 일어난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선이나 명상 및 기도를 할 때는 부교감신경계의 활동이 높아져서 생리적으로는 대사율이 낮은 상태에 이르고, 심리적으로는 안정과 평화감이 나타나며, 교감 신경계 반응을 억제하여 스트레스를 차단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뇌파를 측정하면 감마파도 나온다는 사실이다. 위스콘신대학교 데이비슨(R. Davidso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 승려는 깊은 명상 속에서 놀랄 만큼 강력하고 침투력이 강한 감마뇌파를 발생시키는데, 이때 신경계의 광범위한 영역이 초당 30-80회의 통일된 펄스를 나타내어 마음의 광범위한 영역을 통합하고 하나로 묶는다.”

일반적으로 감마파는 극도의 흥분이나 불안 및 긴장을 나타내는 파로서 스트레스파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선정에 든 선승들에게서 나오는 감마파는 불안과 스트레스와는 상관없고, 서로 떨어져 있는 신경회로를 하나로 묶거나 시각이나 청각같이 서로 다른 감각적 특질들을 통합하여 고도의 집중과 정신통일을 나타낸다. 학자들은 극단적인 각성과 정신적 안정이 결합될 때 마음의 평화를 얻고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태의 극치가 바로 열반이다. 열반은 불에 탄 재와 같이 그릇된 욕망이 꺼진 상태이고 자타(自他) 구별 없이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열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흙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는 그런 영역이 있다. 그 속에는 이 세간도 없고 출세간도 없고…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이것은 괴로움의 끝이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변하지 않는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있고… 그렇지 않다면 태어남, 변화, 지어짐으로부터 벗어남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영역은 초월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으로 지각하는 세계를 뜻한다. 같은 육근으로 보는 세상이지만 범부가 지각하는 세상과는 달리 열반의 경지에서 보는 세상은 땅이나 물과 같은 개별적인 요소도 없고, 이것들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고 부처님은 설한다. 구성요소도 없고 만들어진 것도 아닌 그 세상은 ‘이것’이나 ‘이것 아닌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즉 열반의 경지에서 지각하는 세상은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 우주와 ‘나’가 하나로 된 세상이다.

신경과학자 앤드류 뉴버그(Andrew B. Newberg)는 fMRI를 사용하여 깊은 선정 가운데 있는 선승들의 뇌를 조사하였고, 불교의 선을 오래 동안 수행해오던 신경과학자 제임스 오스틴(James H. Austin)은 우주와 ‘나’가 하나가 된 경지를 직접 체험하였다. 두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선정에 든 사람의 두뇌에서는 공간과 방위를 감각하고, 자타를 구별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정위연합영역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한다고 한다. 자타를 구분하는 두뇌의 기능이 정지한다면 우주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두뇌의 어떤 기능이 정지된 것으로 인해 자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는 두뇌의 착각에 의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물리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양자역학은 관측자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부정한다. 양자역학의 정통적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모든 물리량은 관측자가 측정하였기 때문에 그런 양이 나오는 것이지 관측자가 측정하기 전에는 그런 물리량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어떤 물리량이 실재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생각에 아인슈타인은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떤 물리계를 대상으로 물리량을 측정하여 질량-에너지 전기량 등의 값을 얻었다면 이 값을 주는 물리적 실재가 있기 때문에 이런 값을 얻은 것이다”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자 포돌스키(Podolsky), 물리학자 로젠(Rosen)과 더불어 직접 측정하지 않고서도 물리량을 알아낼 수 있는 실험방법을 1935년 발표하였다. 이 실험을 EPR 파라독스라고 하는데 원리는 다음과 같다.

스핀값이 ‘0’인 입자가 전자와 양전자라는 두 개의 입자로 분리되어 서로 반대방향으로 진행한다고 하자. 스핀은 팽이가 도는 것처럼 어떤 입자가 자전을 할 때 그 회전의 세기와 방향을 말해주는 물리량이다. 모든 소립자들은 실제로 팽이처럼 회전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스핀을 갖고 있다. 코펜하겐해석에 의하면 측정 전에는 전자도 양전자도 허깨비 같은 존재다. 어느 쪽의 스핀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스핀이 1/2이거나 -1/2로서 그 값을 측정하게 될 확률이 똑 같다는 것뿐이다. 분리 된 후 시간이 흘러 전자와 양전자 사이의 거리가 수백 광년쯤 떨어졌다고 하자. 이 문제를 분석하고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자의 스핀을 측정하여 그 값이 1/2이면 그 즉시 수백 광년 떨어진 양전자의 스핀이 -1/2로 결정된다. 이것은 수수께끼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정보의 전달속도는 빛과 같다. 전자의 스핀이 1/2로 결정되었다는 정보가 전달되어야 양전자의 스핀값이 결정될 터인데 그렇게 되려면 수 백 년이 걸려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자의 스핀값이 결정되는 즉시 수백광년이나 떨어진 양전자의 스핀값이 즉시 결정된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측정했다면 -1/2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는 양전자의 스핀값이 1/2로 나타날 것이다. 정보전달에 걸리는 시간을 무시하고 양전자의 스핀값이 즉시 결정된다는 것은 파라독스이다.

이런 파라독스가 생긴 것은 측정 전에 입자의 실재를 부정하는 양자역학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양전자의 스핀이 얼마인지를 양자역학이 예측을 못할 뿐이지 측정 전에도 전자와 양전자는 이미 결정된 물리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보아는 이렇게 응수했다. 측정 전에는 두 개의 파편이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관측 결과 몇 백 광년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판명 될지라도 측정 전의 물리계는 단일체로 보아야 한다. 분리되었다고 생각하고 계를 기술하면 이미 물리계에 교란을 준 것이다. 1982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아스펙(Alaine Aspect)이 EPR이 제안한 문제와 관련된 실험을 실제로 수행하였다. 실험 결과 보아가 옳음이 판명되었다. 수백광년 떨어져 있어도 거리에 상관없이 전체는 하나로 얽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 얽힘을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고 한다. 우주의 만물은 태초에 한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우주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모든 만물은 양자적으로 얽혀 있다. 적어도 물질계가 하나인 것은 두뇌에 의한 착각이 아니다. 그렇게 전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면, 오직 하나인 텅 빈 마음이라면, ‘나’라는 것이 어디 있고 ‘우주’라는 것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전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세계를 주체와 객체, 내부세계와 외부세계, 육체와 영혼이라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현대물리학이 불교교리를 과학적으로 뒷받침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현재의 과학으로선 불교적 진리를 많은 사람들이 타당하다고 인정할 만큼 만족스럽게 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질과 정신을 함께 기술하는 과학이 탄생할 때 비로소 불교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로서의 면목을 갖추고 새롭게 조명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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