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30회 - 신라의 불탑 3

신라, 당나라 공격 막기위해
불심바탕으로 ‘사천왕사’ 건립
절 존재 감추고 황제안녕 빈다며
‘망덕사’로 당 속이는 묘책 발휘
호국불교 상징 지키려는 의지

▲ 사진1. 사천왕사지 목조쌍탑지. 경주시 배반동 선덕여왕릉 진입로에 있다. 신라 문무왕 당시 당나라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목탑지<사진1>는 경주시 배반동의 선덕여왕릉 진입로에 있다. 이곳은 신라 시대 사천왕사의 목탑지로, 사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 문무왕 당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호국의 사연을 가진 목조불탑이다.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도로 건너편에는 주민들의 밭으로 이용되는 경작지가 있는데, 밭의 한 가운데엔 초석들이 아무렇게나 뒹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사천왕사지와 함께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망덕사지 목탑지이다.<사진2> 이곳은 현재 주민들이 밭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삼국유사> 제2권 문무왕 법민조에는 사천왕사와 망덕사가 창건된 경위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내용을 요약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사진2. 망덕사지 목조 쌍탑지. 사천왕사지로부터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인들은 본래 지은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그 옆에 새 절을 지었다.

서기 668년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당나라 유격병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무르며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다음 해 고종이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어 말하였다. “신라가 당의 군사를 요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해치는 것인가?” 그 뒤 고종은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 때 서쪽을 통해 당나라에 들어 간 의상대사가 김인문을 만났다. 김인문이 이 사실을 알려주자, 의상대사는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왕은 크게 걱정하며 여러 신하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최근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에 다녀와 비법을 전수받았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왕의 부름을 받고 온 명랑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낭산(狼山)의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도량을 개설하면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급히 보고하였다. “무수히 많은 당나라 군사가 우리 국경에 들어와 바다 위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왕이 해결책을 묻자, 명랑법사는 “채색 비단으로 임시 절을 지으시면 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채색 비단으로 절을 꾸민 뒤, 풀로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맡은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에 밝은 스님 12명을 모아, 명랑을 앞세워 문두루(文豆婁) 비법을 쓰게 하였다. 그러자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아직 싸움을 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바람과 파도가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들이 모두 가라앉았다. 그 후 절을 고쳐 다시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였다.
그 뒤 신미년(서기 671)에,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아 또 다시 5만의 당나라 군사가 신라에 쳐들어왔다. 그래서 그 비법을 또 사용하자 예전처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이 당시 감옥에 가두었던 박문준(朴文俊)을 불러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비법을 쓰기에, 당에서 두 번이나 대군을 보냈는데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는가?”
이에 박문준이 아뢰었다. “저희들은 당나라에 온 지 오래되었기에 본국의 사정은 잘 모르옵고,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황제의 만수를 빌고자 오래도록 법석(法席)을 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사신으로 보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먼저 듣게 된 왕은 절을 숨기기 위해,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은 뒤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이 도착하자 곧 새 절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곧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외다.” 말을 마친 사신은 끝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 사람들이 금 일천 냥을 주었더니, 그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신라에서 사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장수를 빌고 있습니다.” 그 뒤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 새로 지은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 불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신라가 사천왕사를 지은 공덕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강한 군사력이 아닌 깊은 불심을 통해 나라를 지켰다는 점에서, 호국불교에 대한 신라인들의 뚜렷한 목표의식과 믿음이 느껴진다. 이렇게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부처님의 힘을 통해 당나라를 막아내고, 신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불심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신라인들은 본래 지은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그 옆에 새 절을 지었다. 또 사신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사천왕사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는데, 이처럼 호국불교의 상징물을 지키려 한 신라인들의 노력과 의지가 사천왕사와 망덕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에는 사천왕사를 조성하고 호국의 의지를 불태웠던 그만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 바로 <금광명경>등의 경전에 나오는 ‘사천왕’신앙이 그것이다.

사천왕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엿볼 수 있는 수미산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수호하는 신을 말하며, 사대천왕, 호세사천왕 등으로 부른다. 인도에서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힌두교사상에는 브라만, 뷔쉬뉴, 시바의 3대신을 비롯하여 그들을 보좌하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신들은 불교사상의 발전에 따라 불교화 되어 부처님의 권속으로 포함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신들이 범천, 제석천 등이며, 사천왕 역시 부처님이 계신 곳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사천왕 중에 동쪽의 드리다라쉬트라(Dhritarashtra)는 '나라를 지킨다'라는 뜻으로 지국천왕(持國天王)이라 한다. 이 왕은 ‘건달’이라는 용어의 어원이 되는 ‘건다르바’를 부하로 다스리는데 건다르바는 향기를 먹고사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남쪽의 비루다하카(Virudhaka)는 '자꾸 늘어난다'는 뜻으로 증장천왕(增長天王)이라 하며, 서쪽의 비루파카샤(Virupaksha)는 '큰 눈을 가졌다'는 뜻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이며, 북쪽의 바이스라바나(Vaisravana)는 ‘두루 많이 듣는다’의 뜻으로 다문천왕(多聞天王)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대천왕의 모습은 전하는 경전마다 차이가 있다. 먼저 손에 들고 있는 지물만 보더라도 칼, 보주, 창, 비파, 보탑 등 매우 다양하여 이를 조각 등으로 표현한 나라마다 시대마다 사천왕의 모습은 달리 표현된다.

<금강명경 사천왕품>에 의하면 사천왕의 불법수호 의지와 영험을 강조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이 금강명경은 하늘 사람들의 궁전에 비추며,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 지옥과 아귀와 축생들의 모든 강물을 말려 없애 주며, 모든 공포를 없애줍니다. 또한 이 경은 다른 지방의 원수와 도둑을 물리치며,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하고 굶주리는 것을 없애 주며, 온갖 병을 낫게 하며, 나쁜 천재지변을 소멸하며, 모든 근심을 없애 줍니다. 즉 이 경은 모든 중생들의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 가지 고통과 번뇌를 없애 주나이다......중략.....세존이시여, 우리들 사천왕과 하늘 사람과 용왕·귀신·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들은 법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며, 모든 나쁜 귀신으로서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무리들을 막나이다. 만일 이 나라에 해로운 일이 있거나, 원수가 국경을 침노하거나, 흉년들고 병이 도는 여러 가지 재난이 있을 적에, 어떤 비구가 이 경을 받아 지니면, 우리들은 그 비구에게 권하여 우리 힘으로써 그 비구를 그 나라의 도시나 작은 고을에 빨리 가서, 이 미묘한 금광명경을 널리 말씀하여 유포케 하여서, 이런 가지가지 재변을 소멸케 하겠나이다!

이 경설에 의하면, 외세가 국경을 침범하고자 하면 사천왕이 그들을 막아주고 나라와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내용이 있다. 신라인들 역시 이에 근거해 사천왕사를 짓고 쌍탑을 조성한 것이다. 이같은 사천왕의 불법 수호 신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불교국가<사진3>에서도 신봉됐다.

▲ 사진3. 일본 오사카에 있는 사천왕사지 5층목탑. 외세가 국경을 침범하고자 하면 사천왕이 그들을 막아주고 나라와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내용이 있다. 이같은 사천왕의 불법 수호 신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신봉됐다.

한편, <삼국유사> 외에도 <삼국사기> 역시 망덕사 창건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해 전한다. <삼국사기> 제8권 신라본기8 신문왕 5년(685)조를 살펴보면, ‘여름 4월, 망덕사(望德寺)를 완성하였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유사와 비교했을 때, 망덕사의 창건 시기에 있어 차이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서는 문무왕 때 망덕사 창건을 시작하여 신문왕 때 완공한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제 9권 경덕왕 14년(755)조에는 망덕사의 탑과 관련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망덕사(望德寺) 탑이 흔들렸다.’라는 기록과 함께 언급된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신라가 당나라를 위해 이 절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망덕사라 지었다. 두 탑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높이는 13층이다.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더니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였다. 이러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됐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닌가 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을 통해 당과 망덕사의 연관성을 잠깐 엿볼 수 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은 당나라 중기에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분명 당의 침략을 막고 신라를 수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앞서 살펴 본 기록에 따르면 망덕사는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과 함께, 그 이름은 당의 사신에 의해 지어졌다. 때문에 당나라에서 황제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을 때, 신라에 있는 망덕사의 두 탑이 흔들렸다는 점에서 당나라와 망덕사가 갖는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망덕사는 강한 외세로부터 나라를 수호함과 동시에, 당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신라인들의 신앙심을 간직한 호국불교 사상의 상징물로서 작용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