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이 있는 사찰③ 북한산 노적사

경내에 들어서면 노적봉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원래 진국사였던 노적사는 1978년 종후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중창 불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원 이름은 진국사…성능 스님 창건
북한산성 11개 승영 사찰 중 하나
1960년 무위 스님이 노적사로 명명
2009년 네팔서 진신사리 이운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이 시는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노적사 전신(前身)인 진국사(鎭國寺)를 읊은 것이다. 요즘 노적사 가는 길은 많이 평탄화되고 포장이 되어 이덕무 시에서처럼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수 백 년 전 여정에 비해 다소 수월해 졌을 뿐,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산허리에 굽이치는 길을 따라 오르다가 평탄한 듯하고, 다시 비탈길 오르기를 몇 번 해야 닿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눈앞에 다가오는 노적봉의 웅장하고 오묘한 모습은 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노적봉은 다른 곳에서 보아도 뛰어나다. 그러나 노적사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노적사 경내에 들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대웅전이 아닌 노적봉이다. 참으로 장관이다. 노적사는 힘하나 안들이고 노적봉을 덤으로 얻은 셈이다. 얼마나 큰 부처님의 가피인가. 노적봉 암벽은 천만 길이나 되고 우뚝 솟아난 모습 때문에 부지 중에 두려운 마음이 생겨 의지할 곳이 없었다. 자첨(子瞻)은, ‘중국 여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면’이라고 했지만 누구든 직접 이 산중에 와서 본 사람은 그의 말을 꼭 믿지는 않을 것 같다. 중장대가 절 뒤에 있어 상장대와 마주보고 있다. 올라가 둘러보니 백운대가 노적봉 위로 솟아있지만 여기서 보면 어느 것이 더 높은지 구분할 수가 없다.

적멸보궁 내부. 유리창문 너머 사리탑이 보인다.
진국사(노적사)는 1712년(조선 숙종 38) 당시 팔도도총섭인 계파성능(桂坡聖能)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북한산성에는 산성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많은 승군들이 머물렀는데, 성능스님은 중요시되는 요충지에 11개 사찰을 창건하고 승군이 머물게 했다. 진국사는 이 때 창건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진국사 창건주인 성능 스님은 육신은 북한산에 있었지만 자신의 주 수행처였던 화엄사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런 스님의 심경은 ‘북한지’에 잘 나타나 있다.

“천승(賤僧)이 외람돼 여러 상공들의 심부름을 받아 본분을 내던지고 힘을 다해 바삐 일한지가 벌써 30년이다. 이제야 비로소 무거운 짐 내려놓고 옛 절로 돌아가련다.’ 성능 스님은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가 곧 입적했다. 스님이 떠난 뒤 호국사찰 진국사는 이내 속세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 후 언젠지 모르지만 소실돼 빈터만 남았는데, 1960년 무위(無爲)스님과 창암 유흥억거사, 박금륜행, 김진공성, 불자 등이 복원해 노적사라 명명했다. 이후 주지 스님이 여러번 바뀌다가 절이 본격적으로 중창된 것은 1978년 종후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종후 스님은 대웅전, 나한전, 요사채, 종각 등 원력 불사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2009년 네팔서 이운된 사리를 모신 진신사리탑.
그렇다면 어떻게 노적사가 적멸보궁 사찰이 됐을까? 원래는 종후 스님이 와서 태국 불교 승왕으로부터 사리 3과를 이운해 사리함에 모셨지만, 10년전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됐다. 종후 스님은 다시 원력을 세워 사리를 모시려던 중 2009년 인연이 된 네팔 팔탄타쉬지하초사서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이운했다. 그리고 사리탑을 만들어 봉안하고 적멸보궁도 건립했다. 그해 10월엔 진신사리탑 제막 법회와 적멸보궁 현판식도 봉행했다. 한편 2005년 종후 스님은 노적사 재산 일체를 조계종에 헌납했다. 이제 노적사는 명실공히 공찰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노적봉을 지키고 있었다.

주변 가볼만 한 곳 북한산성길

사진은 중성문의 모습.
대서문, 사실상 북한산성 정문격
북한산성문, 수문 뺀 13문만 남아

북한산성길을 가고자 하면 사람들은 주로 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입구로 들어선다. 잘 뚫린 아스팔트길로 해서 북한산초등학교,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 이른다. 아쉽지만 아스팔트길이다. 차량 통행이 줄어 쾌적하다. 대서문(大西門)이 가장 먼저 보인다. 대서문은 사실상 북한산성 정문에 해당한다. 다른 문들은 산 위로 올라간 곳에 세운 반면 대서문은 구파발로부터 평지를 따라 접근할 수 있었기에 옛사람들의 북한산 통로는 대부분 대서문으로 통했다.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소로가 뚫렸고,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당시 경기지사 최헌길 씨가 미군 불도저를 동원해 5m 폭의 길을 냈다고 한다. 이제는 산행 인구가 늘면서, 대서문길도 차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 이외에는 정문으로서 큰 의미는 없다. 그러면 북한산성의 문은 몇 개나 있을까? 북한산 등산을 어느 정도 한다 하면 도전하는 코스가 북한산성 일주 코스다. 흔히들 ‘12성문 종주’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그 출발은 대서문에서 하고 성벽을 한 바퀴 다 돌고 다시 돌아오면 12개의 성문을 만난다. 그렇다면 북한산성의 성문은 12개였을까? 아니다. 대서문 옆 계곡에 수문(水門)이 있었는데, 1915년 홍수에 무너졌으며, 나머지 유구(遺構)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깨끗이 씻겨 나갔다 한다. 또 하나의 문은 중성문(中城門)이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다음해(숙종 38년 1712년) 숙종은 친히 이 성을 살폈는데, 대서문이 있는 서북 방향이 평지라서 적의 침략에 취약하므로 성 안에 겹쳐 성을 쌓았으니 중성(重城)이며, 이 성의 문 이름을 중성문이라 하였다. 그러니 북한산성의 문은 14개였으며 지금은 수문을 뺀 13문이 남아 있다.



“마지막 불사인 선원 건립 올해부터 추진”
주지 종후 스님 인터뷰

종후 스님은 큰 일이 아니고는 좀체로 산문 밖을 나서지 않는다. 입춘을 앞둔 2월 2일 종후 스님은 경면주사로 입춘 부적을 직접 쓰고 있었다. 요즘 사찰서 흔치 않은 광경이다.

“열심히 기도 하다보면 반드시 부처님 가피를 얻습니다. 노적사도 기도처로서 손색 없는 천혜의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 불사라 생각하고 올해부터 선원을 만들려고 합니다.”

종후 스님은 오래전부터 선원을 개원하고 싶어 했다. 일찌감치 노적사 인근에 선원을 지을 터도 찜해 두었다. 하지만 국립공원지역이라서 ‘허가’가 어려웠다.

종후 스님은 “원효 스님과 의상대사 등 유명 선지식들도 오래전 이곳 북한산에서 정진하셨습니다. 이런 요새에 건축물 허가가 안나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경내에 적은 규모라도 선원을 지어놓고 참선은 산 속에서 하도록 시스템을 구상중입니다. 수도권에 있는 수좌 스님들이 멀리 안가고 결제때면 언제나 마음편히 정진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불사를 진행할 것입니다.”라고 각오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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