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지금 현재 사는 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주어집니다!

▲ 그림 최주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혼자만 공부할 수는 없는 거지만
혼자만의 자기의 그 구멍을 뚫지 않으면,
역대의 광년을 거치면서 진화되고 형성된 그 자기가
바로 그 자기를 뚫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밝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함께 한자리에서 도반으로 공부한다는 자체만으로 그 마음이 너무나 갸륵하고 성스럽고 고마워서 제가 항상 죄송한 마음입니다.
법당을 지금 짓고 있지만 좁아서, 땅을 사 놓고도 제대로 못 이루어서 추운데도 이렇게 여러분이 앉아 있을 자리가 변변치 않아 마당에 서서 그냥 듣는 분들이 계시니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한편 생각하면 옛날에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공부하실 때 먹을 것도 변변히 못 잡숫고 소금을 봉다리에다 넣어서 주머니 차듯 옆구리에다가 차고 그렇게 물에 타 잡숫고 다녔던 그 고행의 뜻을 아마 여러분도 생각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추운 것이 다 달아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공부하는 도리는 시공도 없고 공간도 없고 모든 게 다 없지만 우리 사람들이 살려니까 시간도 만들어 놓고 또 일 년, 해우년도 만들어 놓고 몇 해니 몇 해니 하고 나가는데 질서를 지킨다 하기 이전에 그냥 순서대로 살아나가기 위해서 방편으로 여러분이 해 놓고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편 생각해 볼 때, 이 마음이 아니라면 몸이 움죽거리지 않는다는 거, 자기의 그 마음의 영혼이 빠지면 송장이 된다는 것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부처님께서도 그랬고 역대 조사들도 그랬습니다. 공부할 때 이 들이고 내는 구멍은 한 구멍이다. 자기가 여기 있으면 부처도 여기 있는 것이고 바깥에 나가면 바깥에 나가는 대로 자기가 있는 자리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변소에 가면 변소에 있는 것이고 못났든 잘났든 자기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데, 들이고 내는 자리도 한 구멍인데 그 들이고 내는 자리, 통하는 자리, 바로 거기를 지금, 닫힌 문을 열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거기다 집중하고 생활을 하는데 어디에다 눈을 돌릴 새가 있겠습니까?
옛날의 조사들도 그랬고 역대 부처님들도 그랬습니다. 들이고 내는 구멍이 아니라면 천지를 다 준다 해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저기 계신데 안 가려느냐 해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몸이 움죽거리지 않고 마음도 움죽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조사들이 됐고 역대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이차적으로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라.’ 이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을 움죽거리지 않게 하는 그런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한데 합쳐라. 너로 만들라 이런 소리죠. 마음은 체가 없어서 수억만 개를 한데 갖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 좋다는 데 있으면 이리로 뛰어가고 저기 좋다는 데 있으면 저리로 뛰어가고 그러는 사람들은 벌써 마음이 한 고장에 집중된 게 아니라 들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고행하실 때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요? 부처님이 굴에 들어가실 때에 거기 독사가 나와서 사람을 다 잡아먹으니까 “거기 들어가지 마십시오.” 했단 말입니다. 생략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는 사과 하나를 들고 들어가셨습니다. 그 사과는 무슨 뜻이냐. 이거는 공한 것을 말합니다. 둘이 아님을 말하는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나는 들어가도 괜찮다 하는 뜻입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들한테 보여 줬건만 모든 사람들은 사과를 사과로만 본 것입니다. 뜻을 보지 않고 사과로 봤던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해명을 하는데 “내 몸이 살아야 모든 중생들을 건질 테니까 네게 내 몸을 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거나 먹어라.” 하고 줬다고 기록을 해 놨습니다. 그런데 그 사과는 그리로 준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먹은 것도 아닙니다. 그 뱀도 부처도, 들어가신 그분도 모든 게 동일하게 하나가 돼 버렸으니까 사과는 방편으로 들고 들어갔던 것이지, 사과를 대신 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무사히 그냥 들어가셔서 편안히…, 나타났던 그 뱀이 일심으로 화한 거죠. 기다랗게 놓으면은 한 일(一)이요, 동그랗게 뭉치면 원심이요, 머리를 들었으면 한마음의 한 상투라고 해도 되죠. 심봉이라고 해도 되고. 그러니 어찌 둘이 되겠습니까.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그냥 계시다 나왔지만 벌써 한마음으로 동일하게 됐던 것이죠.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모습을 잡아먹을 수가 없는 거죠. 물 수가 없죠.

그러니 뜻이 얼마나 광대하고 무변하고 묘한 도리입니까. 이 묘한 도리를 여러분이 아시려면, 그저 길에 오다 가다가도 알고 듣고 배우고 하시려면…, 육조 스님처럼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면서도 10여 년을 넘게 면벽을 하셨다는 거. 면벽이라는 건 앉아서 있는 것만 면벽이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게 움죽거리지 않을 때가 면벽입니다. 그랬으니 다니시면서도 행선이 되고 와선이 되고 입선이 되고 좌선이 된 것이죠.
우리가 공부할 때에 ‘한눈 팔지 말라.’ 이랬던 뜻이 뭐냐. 이 마음을 움죽거리게 하지 말라. 이 마음을 움죽거리게 하면 네 몸이 좋다는 데 있으면 다 따라다닐 것이다. 못났든 잘났든 약하든 건강하든 내 몸 밖에 좋은 게 어딨습니까? 내 집 밖에 좋은 게 어딨습니까? 어디 나가셨다가도 내 집에 들어오시면 편안하시죠? 그런 거와 같이 내 몸이라는 이 집, 내 집 밖에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산더미처럼 좋은 게 있다고 하면은 불끈 그냥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거기만 보고선 그냥 간단 말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좌(坐)를 할 때에 여기 움죽거리지 않는 믿음이 있다면 천리만리 좋은 게 있다고 들린다 하더라도 그냥 한꺼번에 (가슴을 가리키시며) 여기에다가 동일하게 일임하면은 됩니다. 그런 건데 몸뚱이까지도 딸려 가는 것은 벌써 그건 마음이 움죽거린다는 뜻입니다. 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러니 놀랍게도 뚫을 것도 없는 것을 뚫는 게, 문 없는 문을 찾으려고 애쓸 때, 만법이 들고 나는 그 자리를 이 마음 하나 돌리면은 그게 쉽게 뚫릴 텐데 자꾸 유혹을 해서, 자신들 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이 유혹을 해서 자꾸 이렇게 마음을 들뜨게 만든단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막론하고 바깥에서 천지를 다 준다, 여기 역대 부처님이 다 계시다 이러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다 되신 겁니다.
이렇게 좋다고 들떠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머리로 배우고 말로 배우고 이래서 그냥 머리로다가 말을 하고 다니니 무슨 뜻이 오고 가는 사이 없이 가고 오겠습니까.
우리가 그냥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역대 조사들과 더불어, 유마힐까지도 거기에…. 제불이니까. 모든 일체제불이 다 마음이 오고 가는 사이 없이 여러분에게 화해서 나투시면서 응해 주시는,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찰나찰나 응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르시고 그냥 들떠서 돌아간다면 그런 것을 영 모르죠. 그래서 여러분이 내 모습을 보고 믿고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뜻, 가르치신 뜻과 진리의 뜻과 우리 사는 방법의 뜻이 삼합이 똑같으니까 우리가 따르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고깃덩어리야 한 철 살다가 한 철 없어지고 모습을 바꿔 가지고 다시 나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 가지고 다시 나오느냐 하는 미래는 지금 현재 사는 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이런 소리가 있죠. 눈먼 거북이가 천 년을 물속에서 있다가 한번 세상을 보려고 나오는 그 사이에 구멍 뚫린 뗏목이 하나 턱 그 시간에, 눈도 뜨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시간에 딱 맞춰서 뗏목이 떠내려 오겠습니까? 눈먼 거북이가 물속에서 뚝 올라오는 그 시간에 말입니다. 그것이 천 년을, 눈먼 장님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그렇게 다스리며 지냈기 때문에 그게 온 겁니다.

그래서 거북이의 모습을 벗고 아라한이 되고 부처가 됐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혼자만 공부할 수는 없는 거지만 혼자만의 자기의 그 구멍을 뚫지 않으면, 역대의 광년을 거치면서 진화되고 형성된 그 자기가 바로 그 자기를 뚫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밝게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냥 장님이고 그냥 한 발 못 딛는 병신이고 그렇다는 얘기죠. 왜냐? 하나는 보이지 않는 데를 못 보니까 장님이요, 하나는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이 보이지 않는 데 있어야 할 텐데 있지 못하니까 한 발 병신이요, 그렇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장님이나 한 다리 병신이 안 되려면 그만큼 자기가 못났든 잘났든….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예전에 그렇게 생각해 본 예가 있거든요. 못났든지 잘났든지, 아무리 잘난 관세음보살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잘난 부처님이 나를 그렇게 바깥에서 이끌어 준다고 하더라도 못난 내 마음의 어머니만 못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못났더라도 나를 먼저 알아야 그 잘난 분들을 다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부터 알아야 되겠기에 여러분한테 각자 나부터 알고 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저쪽에다 마음을 두고 믿고,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덩달아 따라서 남 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자기가 그 요량과 지혜로 문을 뚫어야 합니다. 자기가 요량껏 발전시키는 데에 지혜가 열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요렇게 하셨으니까 나도 요렇게 해야겠다가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세상에 따라서, 세상을 살아나가는 차원에 따라서 우리는 자꾸자꾸 바뀌어서 행동과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여기 좋다고 해서 여기로 마음이 뜨고, 저기 좋다고 그래서 저기로 마음이 뜨고 그러지 않고, 내가 선 자리가 바로 내 자리라고 생각하고 내 몸을 내 집이라고 생각하실 때에 비로소 들이고 내는 그 한 구멍이, 바로 문이 열린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질문하시면 돼요.

질문자1(남) 큰스님, 직접 만나게 돼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온 신도입니다. 그동안 큰스님께서 설하신 많은 법문을 항상 가슴에 새기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공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저희들이 부산지원에서 이번에 한마음 촛불재를 3일 동안, 초닷새부터 3일간 지원장 스님 이하 여러 스님과 같이 아주 성대히 거행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느낀 것을 간략하게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예를 올리고 지원장 스님하고 또 한 분의 스님하고 두 분께서 중앙에 서시고 신도들이 죽 돌아가면서 촛불을 붙이는데 한 스님께서 굉장히 많이 우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연유로 저렇게 눈물을 많이 흘리는가 싶어서 처음에는 좀 의아하고 그래서 이틀 동안 그것을 관해 보니까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자기의 아픔같이 생각을 하고 저렇게 우시는구나. 그리고 또 옆에 계신 스님은 아주 그 면도칼처럼 그 뭐랄까, 부산에 가면 고기 청과 조합이 있습니다. 거기 가면은 고기 경매를 하는데 위의 어른한테 “이거 얼마짜립니다.” 하면 그 사람이 탁 받아 가지고 면도칼로 탁 치듯이 아주 그렇게 정리를 잘하는 걸 제가 느꼈습니다. 아, 그래서 저분들이 우리들의 사표가 되고 우리가 따라야 될 분들이구나.

그래서 저도 올해는 촛불재 때 3일간 휴가를 내었습니다. 시종일관 빠지지 않고 3일 동안 절에서 하는 절차에 따라서 3일간 해 보니까 정말 꿈으로도 보여 주면서 저를 경책하는 그런 아주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도 좀 떳떳해지고, 제가 이 법당 제일 뒤에서 여기 스님 앞에 나서기까지 7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4년 동안은 울다가 보니까 다른 것을 배우지도 못하고 이제는 조금 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촛불재가 정말로 자신과 일체 조상의 무명을 밝히는 데는 명약이라는 거를 요번에 좀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것이 죽은 사람의 불성이기도 하고, 생명 종자이기도 하고, 산 사람의 마음의 불성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현실과 상통하는 반면에 모든 그 아픔이 역대에 올라오면서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고 이렇게 올라오면서 인간으로서 형성이 된 거기까지 얼마나 아팠던가. 얼마나 뼈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느끼고 진화가 되고, 그렇게 몇 생을 넘어왔던가. 이런 것이 합쳐지다 보면 스님네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없이 흐르는 겁니다.

질문자1(남) 눈물이 아니었고 피눈물 같은 그런 애절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큰스님 예. 그러니까 그러한 뜻으로서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할 수만 있다면 그 장소는 바로 역대 제불의 도량이 될 것이고, 그 도량에서는 일체제불의 마음이 한마음이 돼서 모두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미물의 짐승도 영혼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천도가 될 것입니다, 그냥 모두. 그게 그 뜻입니다. 만약에 조상이 죽어서 미물의 짐승이 됐어도 그 자식이 이렇게 공부하는 덕분에 거기에 같이 할 수가 있는 거죠. 줄이 닿지 않으면 같이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줄이 닿으니까 같이 들어갈 수 있죠. 그러니까 거기서 그냥, 제자리에서 인도환생을 하죠.

질문자1(남) 그래서 두 분 스님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님처럼 아주 콤비가 잘 맞는 그런 멋진 천도재인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하하하. 뭐 지장보살만 됩니까? 관세음보살만 되고 지장보살만 된다면은 안 되죠. 뭐 약사도 돼야 하고 칠성도 돼야 하고, 주해신도 돼야 하고 주산신도 돼야 하고, 지신도 돼야 하고 귀신이 될 때는 귀신도 돼야 돼요. 그래야만이 귀신을 건질 수 있으니까요. 하하하. 이 소리 잘 듣고 뜻을 잘 새기십시오.

질문자2(남) 예. 편히 앉고 싶지만 제가 이러고 싶습니다.

큰스님 그래, 마음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질문자2(남) 예. 스님 또 뵙게 되어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저는 조금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저는 청년법회 때 저의 아버님 문제와 대학 진학 문제로 질문 드렸던 울산 청년입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천연적으로 주인공을 믿으려 하니 안되는 게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원하던 대학 모두 합격되었습니다.
스님,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듯했습니다. 네 곳 대학 중 제가 가려던 대학은 2차 추가 합격까지 가는 주인공의 나툼이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나는 그 대학에 갈 수 있다, 없다는 생각이 잠들기 전은 물론 잠이 깬 후에도 연속되는 나날이었습니다. 제가 주인공 노트라 일컫는 일기장엔 제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 결과가 밤이면 적히곤 했습니다.

또 확실히 제 주인공을 느끼고 싶고 그래야만 용기가 더 날 것 같아 선원에 나가 청소며 세차며 선원 행사며 ‘이 모든 것이 내가 대학 가려는 마음과 근본은 둘이 아니다. 더 열심히 쓸고 닦자. 순간순간을 백으로 살자. 내가 없기에 힘들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했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도 관했습니다. ‘주인공, 내가 그 대학에 간다면 저렇게 보이지 않게 힘들어 하시는 부모님껜 작은 효도가 될 수 있잖아. 그리고 주위의 모든 분들과 대행 큰스님께 좀 더 밝은 모습으로 새해 인사 드릴 수도 있잖아.’ 하고요. ‘그것도 웃음 보시, 기쁨 보시가 되잖아. 자, 우리 최후의 발표 날까지 만이라도 열심히 해 보자, 응? 주인공!’ 하며 말입니다. 스님, 비록 제가 간 대학이 일류 이류라 일컫는 대학은 아니지만 제게 너무나 많은 걸 일깨워 준 대학이고 제겐 최고의 대학입니다. 스님, 힘들고 괴로워 포기하려고도 했던 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최선을 다하게 하고 이번 일로 많은 가르침을 준 주인공의 고마움을 말로써는 다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스님, 두서없는 저의 작은 체험담이지만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꼭 건강하십시오.
큰스님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한마디 합니다. 잘되는 것만이 부처님 법은 아닙니다. 화해서 찰나찰나 용도가 바뀌어서 내 앞에 닥칠 때마다 그렇게 하고 잡고 가다 보면은 신심도 생기고 발전도 되어서 나중엔 큰 것도 집어삼킬 수 있다 이 소리죠. 나중엔 큰 것도 대치할 수가 있다. 이러다 보면 용맹스럽게 진짜 정진할 수가 있고, 정진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물리가 터지고 발전이 되면서 그 한다 안 한다도 다 없어진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 줄을 잡았으면 만 가지 천 가지가 닥친다 하더라도 그렇게 잡고 나갈 수 있어야만 된다는 얘기죠, 공부할 때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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