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29회 - 신라의 불탑 2

높이 약 55~80미터로 추정
조성 당시 동양 최대 목탑
망루 역할 충분… 호국불교 기반
탑의 섬세함·화려한 장식 돋보여
신라예술 극치 보여주고 있어

지난 호에서 알아 본 경주 분황사 남쪽의 넓은 벌판 위에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사진1> 하나가 홀로 자리하고 있다. 그 동안 견뎌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이 돌은 과거 수많은 목재와 기와의 무게를 견디고 지탱했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바위가 바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쳤던 심초석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심초석의 크기는 435cm × 300cm, 두께는 128cm에 이르며, 무게는 약 30톤에 달한다. 오랜 시간도 차마 앗아가지 못한 심초석의 웅장한 규모는, 찬란했던 옛 불탑의 위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 황룡사 9층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쳤던 심초석으로 추정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지금으로부터 1,370년 전, 파란만장한 삶과 외교적 국난을 오로지 불심으로 극복하려 했던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의 원대한 꿈이 모여 만들어졌다. 조성 당시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던 이 불탑이야말로 신라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불탑신앙의 결정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초석을 도화지 삼아 머릿속에 황룡사 9층 목탑을 그려보기에 앞서, 우리는 신라인들이 이러한 불탑을 조성한 이유와, 현재는 그 흔적만이 남게 된 원인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삼국유사> 제 3권 탑상편 황룡사 9층탑 조의 내용을 통해, 탑을 조성한 목적과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자.

신라 제 27대 선덕왕 즉위 5년(636), 중국으로 유학 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 이 때 문수보살은 자장법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 국왕은 전생에 인도 크샤트리아 계급의 왕이었는데, 이미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그 특별한 인연으로 여타 오랑캐 종족과는 다르지만, 산천이 험한 탓에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미신을 믿는구나. 하지만 나라 안에 훌륭한 큰 스님들이 있으니 군신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평화롭다.” 말을 끝낸 뒤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자장법사는 이것이 문수보살의 화현이라 생각하여 슬피 울며 물러갔다.

어느 날 자장법사가 중국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나던 때였다.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타나더니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가?”라고 묻자 자장은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신인은 자장에게 절하고 나서 또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이에 자장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과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倭國)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이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온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이를 들은 신인이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소. 그 때문에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이니, 그대는 어서 신라로 돌아가시오!”라고 말하자, 자장법사는 “신라에 돌아가면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신인은 말했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나의 큰아들인데, 범천왕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소. 그대가 신라에 돌아간다면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신라에 항복할 것이며,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의 길이 편안해질 것이오. 또, 탑을 세운 뒤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감히 외적이 신라를 해치지 못할 것이오.”…(중략)… 643년,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이어서 선덕여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간청하자, 왕이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제에 기술자를 청하여 데려와야겠습니다.” 곧이어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찾아가 요청하니, 아비지(阿非知)라 하는 기술자가 명을 받고 와서는 나무와 돌을 재었다. 또, 이간(伊干) 용춘과 용수 형제가 그 건탑 불사를 주관하는데, 그들이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명이나 되었다.

탑의 중심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자신의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꿨다. 이에 의심이 생긴 아비지가 탑 조성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졌다. 곧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나타나 그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아비지는 건탑 불사를 중단한 것을 후회하고 마침내 9층탑<사진2>을 완성하였다.

▲ 황룡사 9층목탑 복원모형. 30층 아파트와 맞먹는 80m 높이로 추정된다. 탑의 꼭대기에 오른다면 경주 시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므로 분명 망루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을 것이다.

이처럼 황룡사 9층탑은 당나라 유학승 자장법사의 건의와 선덕여왕의 결단, 백제의 명장 아비지의 기술력이 빚어낸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 그 자체였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탑을 9층으로 조성한 이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탑의 제1층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화(中華),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 등, 이렇게 이웃나라를 상징하는 9층을 쌓아 진압하고자 하는 군사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장법사의 호국불교 사상과 선덕여왕의 호지불법 정신이 힘을 합쳐 9층탑이 완공된 뒤, 신라는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탑이 세워질 당시, 자장법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받아 온 사리 100과를 황룡사 탑 기둥과 통도사 금강계단, 대화사 탑 등에 분산하여 봉안하였다. 이렇듯 불탑 조성의 주된 목적은 사리를 봉안하여 예경하는 신앙심의 발로에 있다. 하지만 중국의 불탑 조성에서도 살펴보았듯, 탑이 적을 살피는 망루 역할을 위한 군사적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군사적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목탑 내부의 층계를 이용하여 탑의 최상부인 9층까지 오를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신라가 사라지고 대지의 주인이 바뀌며, 황룡사 9층탑 또한 그 모습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었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9층목탑이 사라지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전해진다. 탑은 처음 조성한 이후 고려 숙종(肅宗) 원년(1096)까지 지진과 벼락 등의 피해로 여섯 번이나 보수와 중수의 과정을 겪었다. 또 고종(高宗) 16년(1238) 겨울에는 몽고군들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륙존상, 절의 전각 등 모든 것이 재앙을 입어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 뒤 황룡사 9층목탑은 재건되지 못했고, 현재까지 커다란 심초석만이 남아 과거의 영예를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룡사 9층목탑의 내부구조나 외형은 확인할 수 없게 됐지만, 천만 다행으로 신라인들이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암벽에 황룡사9층탑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 탑의 모습과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사진 3>
▲ 경주 탑곡마애불상군. 황룡사9층탑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은 신라인들이 세운 목탑의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먼저 탑의 기단에는 두 마리의 사자로 짐작되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이어서 탑의 가운데 큰 기둥이 투시되고, 각 층의 처마 끝에는 모두 풍탁(風鐸·풍경)이 매달려 있다. 이처럼 풍탁을 탑에 시설한 점은, 신라인들이 시각적인 신앙심과 함께 청각적인 수행의 마음을 높이고자 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탑상부가 시작되는 노반 위부터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신라예술의 극치를 감상할 수 있다.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황룡사 9층목탑은 한 변의 길이가 22m인 정사각형의 형태라는 것과 총 면적은 약 150평인 490㎡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64개의 초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7칸의 규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편 황룡사 9층목탑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인 찰주본기(刹柱本記)<사진4>는, 1964년 도굴범들에 의해 우연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찰주란 목탑을 세울 때의 중심 기둥을 말한다. 찰주는 큰 돌 위에 세우게 되는데, 이 때의 받침돌을 찰주석이라 한다. 황룡사 찰주석 밑에는 금동 사리함이 묻혀져있다. 신라 경문왕 12년(872)에 황룡사를 중창하며 금동 사리함의 안팎에 74행 700여자의 글자를 새긴 것을 바로 ‘황룡사찰주본기’라 이른다. 찬자는 박거물(朴居勿)이고 글쓴이는 요극일(姚克一)이며, 건탑 연기, 탑의 규모, 조성 의의와 중수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 황룡사찰주본기. 연도, 규모 등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찰주본기를 살펴보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 철반이란 탑신부 위의 속칭 상륜부라 부르는 탑상부를 받치던 노반을 말한다. 이러한 노반이 철이라는 금속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철반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에 따라 상륜부가 42척이고 탑신부와 기단부가 183척이라면, 황룡사 9층탑의 총 높이는 225척이 된다. 그렇다면 225척이라는 높이를 요즘의 단위로 환산하면 과연 얼마나 될까?

본래 1척(尺)은 손을 폈을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말한다. 자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온 상형문자인데, 처음엔 18cm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것이 차차 길어져 한(漢)나라 때는 23cm 정도, 당(唐)나라 때는 24.5cm 정도로 쓰였으며, 이보다 5cm 정도 더 긴 것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척은 약 35cm이며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했다. 하지만 세종 12년의 개혁 시에 31.22cm로 길이를 바꾸어 사용했고, 902년에 일제의 곡척(曲尺)으로 바뀌면서 30.303cm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1963년에 계량법이 제정되어, 현재는 척을 거래·증명 등에 있어 계산단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상의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225척은 당나라척의 경우 약 55m가 되고, 고구려척의 경우 현대 30층 아파트의 높이와 맞먹는 약 80m가 된다. 이처럼 높고 웅장한 탑의 9층 꼭대기에 오른다면 경주 시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니, 탑은 분명 훌륭한 망루의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 목적을 토대로 지어진 황룡사 불탑에는,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라인들의 강력한 호국불교사상이 깃들어 있다.

또한 찰주본기에 의하면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舍利) 100과를 황룡사탑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연못에 있는 용의 부탁에 의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세 곳에 분산 배치함으로써, 사리신앙을 장려함과 동시에 사리를 안정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호국불교정신과 신앙심의 강한 결속을 토대로 탑을 세운 신라는, 23년 후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 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서는 신라인들의 호국사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사천왕사와 망덕사 목탑에 대하여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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