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 스님(범어사 주지) 성도재일 철야정진 법문

▲ 수불스님은 … 지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5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사미계를, 1977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8년 범어사 승가대학 졸업 후, 1979~1989년 노스님 시봉 및 제방선원 수선안거를 성만했다. 이후 스님은 1989년 안국선원을 개원하고, 부산과 서울에서 간화선 대중화에 앞장 서왔다. 현재 조계종 제14교구본사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안국선원 선원장,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선원장, 부산불교연합회 회장이다. 저서로 〈흔적 없이 나는 새-전심법요 선해(禪解)〉 등이 있다.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은 1월 26일 범어사 설법전에서 화두 참선을 주제로 법문을 했다.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으로, 조계종은 간화선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선가에서도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해 불교 수행에서 가장 어려운 수행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간화선 수행을 하다 헤매기도 한다. 25년간 승속의 수행자에게 간화선을 체험시킨 수불 스님은 법문에서 “간화선은 뼈저리게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알고 공부하면 누구나 큰 힘을 얻을 수 있다”며 “특히 눈 밝은 선지식에게 화두를 받아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끝까지 일념으로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다. 

조계종 수행의 근간인 간화선
생사문제 해결하기 위한 수행
제대로 알고 공부하면
누구에게나 큰 힘 가져다 줘
눈 밝은 선지식에 화두 받아
기간 정해놓고 참구하며 점검받아야
화두는 성품 자각 위한 의심으로
생명 실상이 무엇인지 눈뜨기 위해
지속적으로 참구해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2,600년 전에 새벽별을 보고 깨달은 날을 기념해, 오늘 우리 함께 그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도재일 전날로 여러분께서 화두를 들고 철야 용맹정진을 하시기 때문에, 비록 저도 스스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조심스럽지만 한 번 마음을 내어서 ‘화두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법으로, 우선 화두에 대한 개념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화두는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 철이면 한 철, 일 년이면 일 년, 길어야 삼년 안에 결판을 봐야 하고, ‘그 이상 화두 들고 공부한다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화두는 금생에도 들고, 금생에 깨치지 못하면 다음 생에까지 화두를 놓지 말고 의심해야 한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기 때문에, 조금 전 제가 한 말과 상충된다고 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화두는 죽어서도 들어야 한다.’는 개념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화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화두는 깨닫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화두를 드는 시절인연이 열리면, 그때 결단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혼자 화두를 들면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다 실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에게 화두를 받고, 일정한 기간 내에 화두에 대한 공부인연을 제대로 맺는 것이 화두를 올바르게 드는 것입니다.
보통 화두를 강조하기 위해 “평소에 늘 화두를 챙겨라.”, “화두를 늘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까닭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공부인이 화두만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하다보면, 화두에 매몰되어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을 많이 봐왔습니다.

눈 밝은 선지식에게 화두 받아야
제가 알고 있는 간화선은 뼈저리게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간을 정해놓고 화두를 간택해서 참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지식을 의지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선지식과 함께 하면 더욱 좋고, 선지식에게 화두를 받아서 일정한 장소에서 화두를 드는 것도 무방합니다.
또 선지식한테 화두를 받았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화두를 잘 들고 있는지를 점검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늘 점검을 받아서 시간낭비 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혼쭐이 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제가 화두를 3년, 5년, 10년 들었습니다.”라는 소리는 잘 모르고 하는 말일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화두공부에 매진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는 말 그대로 ‘의심’입니다. 조사선에서는 화두라는 개념을 정형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공안이 정형화되면서, 공안에 인연되어 일어난 의심이 곧 ‘화두’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는 말 그대로 의심이어야 합니다.
화두 의심은 성품을 자각하기 위한 의심입니다. 남을 의심하는 의심이 아닙니다. 근원을 살펴서 ‘알지 못하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지?’, ‘생명의 실상이 무엇인지?’ 이런 근본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눈뜨기 위한 의심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입에 사탕만 물고 있는 것처럼 화두를 물고서 계속해서 굴리고 있게 됩니다. 그렇게 화두를 입에 물고 있다가 잘 안 되면, 다른 화두를 받아서 또 입에 물고 있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화두는 활구(活句) 화두가 들려져야 하고, 사구(死句)를 들고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활구’는 의심하지 않으려 해도 의심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구’는 죽은 화두로서, 억지로 붙들어서 살려내려고 하는 어리석은 공부입니다. 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살릴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숨이 다 끊어진 것은 살리고 싶다 하더라도 살릴 수 없습니다. 백날 천날 붙들고 있어봐야 허망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그런 실질적인 의심을 해야 ‘참의심’에서 나아가 활구 의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두가 들려지면 동중일여, 몽중일여가 되고, 그 단계에서 화두일념이 됐을 때를 보임(保任)이라고 합니다. 즉 화두 의심에서 보임하는 것입니다.

10년, 20년 나름대로 세속과 연을 끊고 공부에 진력하는 것을 보임이라 하지만, 그것은 참다운 보임이 아닙니다. 보임은 화두 의심 속에서 이어져야 보임입니다. 화두가 맹렬하게 들려져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고 시절인연이 올 때까지 화두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화두는 짧게 들수록 좋습니다. 또 화두를 들기 위해 ‘면벽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면벽이란 눈앞에 보이는 벽이 아닙니다. 진정한 면벽은 정신적인 벽으로, 눈앞에 가로놓여서 꽉 막는 ‘의심덩어리’입니다. 화두가 들려지면 그 의심을 따라서 앞을 꽉 가로막는 벽이 나타납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24시간, 48시간, 72시간 지속적으로 의심하면 할수록 은산철벽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밥 먹을 때든, 화장실 갈 때든, 화두 의심이 지속적으로 들려지게 됩니다. 정신적인 벽이 눈앞에 가로놓아져 있어서, 공부가 될 때까지는 ‘의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의심’을 붙들고 씨름하게 됩니다. 그 벽을 마주하고 공부해본 적이 있습니까? 참의심을 들고 의심하게 되면, 그런 벽이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이 100°C로 끓을 때까지 하라
공부를 할 때는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큰 가마솥에 물을 넣고, 100°가 될 때까지 장작불에 풀무질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물이 50°, 60°, 70°로 올라갑니다. 그러다보면 풀무질 하는데 힘이 듭니다. 90°에서 100°로 올릴 때, 말도 못하게 힘이 듭니다. 그때는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90°가 지나면 비등(沸騰)이 되어서, 물이 튀기도 하고 막 끓는 모습이 제법 100°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100°를 넘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완전히 100°가 끓어 넘치게 되면, 언제 끓었나 할 정도로 물의 비등이 가라앉게 됩니다. 이때는 끓는 모습이 없어지고 고요해서, 이게 100°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가 됩니다.
그렇게 비등점을 넘지 않으면, 자기 얼굴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비등점을 넘어 물이 거울같이 평평해졌을 때는, 자기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시절인연이 다가옵니다. 아주 명징해지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의심할 적에는 방해도 받고 도움도 받고 온갖 변화가 화두 드는 속에 있지만, 화두에 의지해 끝까지 방해를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의심해 나가면, 결국에는 맑고 고요한 상태에 들게 됩니다. 시절인연이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100° 끓어 넘치게 수행을 하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되니까 70°, 80°쯤 가서 힘이 드니 좀 쉬었다 하자 하고 주춤합니다. 그러다가 또 신심나면 다시 애쓰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좋은 세월 다 보내게 됩니다.
환자는 의사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화두를 들 때는 곁에 선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환자가 의사 없이 낫겠다고 몸부림 쳐봤자, 그것이 잘 되겠습니까? 물론 요행수는 있겠지만, 확률적으로는 매우 낮습니다. 명의를 만나게 되면 그 분이 병을 낫게 해주는 것처럼, 눈 밝은 선지식을 가까이 했을 때 화두 의심도 제대로 들 수 있고, 나아가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만 보내다가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 참선다운 참선을 해본 적이 없게 됩니다. 이름하여 참선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화두참선이 어렵다고 물러서게 됩니다. 그냥 쉽게 호흡하면 되고, 아무 생각 없이 마음 내려놓고 생각 끊고 고요하게 있으면 더 좋다고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쉽고 편하게 빨리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 힘든 화두 참구는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간화선 공부를 제대로 알고 공부할 수 있을 때, 누구에게나 큰 변화와 힘을 가져다주는 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화두를 든 사람들 중에, “지금 하고 있는 의심이 제대로 하고 있는 의심인가?” 하면서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에 제가 그랬습니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 가운데, 경계는 고요하고 바깥 소리는 크게 들립니다. 안에서 망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간간히 화두가 들려지면서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니, 이게 화두가 들려지고 있구나 하면서 혼자 스스로 착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화두를 든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한참 뒤에 알았습니다. 화두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끊어진 것도 아니고, 간혹 가다 나도 모르게 의심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여기에 속으면 공부는 끝입니다. 그것을 공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화두는 누구든지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화두가 맹렬하게 들려질 수 있도록, 선지식이 호법을 서줘야 합니다. 본인이 그 화두 속에서 지속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화두가 활발발해지는 그런 현상을 직접 체험하도록, 선지식이 강하게 화두를 각인시켜줘야 합니다. 화두를 한 번 물면 끝까지 늘어져서, 이가 빠지든 목이 끊어지든 화두 의심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공부가 되니 안 되니 따지지 말고, 정성껏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선지식을 생각해서라도, 그분들을 만난 것이 굉장한 인연이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의 정법을 믿고, 생사를 걸고 한번 해보십시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성도재일을 맞아 여러분도 심기일전 용맹정진 하셔서, 활구참선의 일미(一味)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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