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불교 70년- ①종단

1945년 8월15일 오후 2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 항복 선언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 있던 한국에게 광복의 기쁨과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줬다. 하지만 ‘장미빛 환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38선을 설치하고 남북을 분단시켰고 오래지 않아 한반도는 좌우 대립의 갈등에 몸살을 앓았다.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저서인 <불교 근대화의 이상과 현실>에서 “해방공간의 불교는 한국 근대불교와 현대불교의 가교 역할을 한 무대이자 연결고리”라면서도 “근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향으로 가려했던 현대불교는 해방공간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그 만남은 화해와 상생이 아닌 갈등과 대립의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평가했다.

실제 한국불교는 격랑의 근현대사 속에서 적지 않은 부침을 겪었다. 광복 이후 종정 한암 스님과 종무총장 지암 스님은 자진 사퇴했으나 교단을 인수한 지도부는 주로 대처승이었다. 대처승 지도부는 교단의 개혁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안주했다.

그러던 중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은 한국불교 혁신을 위한 결사를 시작한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공주(共住)규약’을 정하고 이를 따라 실천하는 스님들만 방부를 같이 정진했다. 처음은 성철, 자운, 보문, 우봉, 청담 스님으로 시작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성수, 종수, 지관 스님 등 20여 명으로 늘었고, 비구니 묘엄, 묘찬, 지영, 재영 스님 등은 백련암에서 참여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지난한 갈등 끝에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고 다양한 종단들이 만들어졌다. 조계종과 뿌리는 같으나 분리해 만들어진 태고종이 있으며, 천태종·진각종·관음종 등 주요종단들이 중창되거나 새롭게 창종됐다.

해방공간 속 ‘정화·개혁’ 화두
갈등 거쳐 통합종단 출범돼
1970년 대처측 태고종 분리
천태종·진각종 등 종단 출범
종단협 창립… 불교 발전 도모
신생종단 난립 상황 대책 필요

▲ 1962년 1월 22일 열린 비구·대처승 양측 대표모임. 불교재건회의 앞서 열린 회의에서 대표들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출처=민족사 간행 〈한국불교 100년〉
정화운동과 조계종 출범
1949년 6월에는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1950년 3월에 그 시행령이 발효됨에 따라 자경농의 농지 소유를 원칙으로 한 유상매수와 유상분배가 이뤄졌다.

당시 종단인 ‘조선불교’의 교정이었던 만암 스님은 수행승들의 생활고와 수행 공간 부족 등 문제가 심각해지자 1954년 4월 비구승들에게 전통사찰 18개를 내준다는 방침을 정하였지만 대처 주지들의 반대로 인해 시행되지 못했다. 이즈음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지지 담화가 발표되었다. 즉 1954년 5월 사찰 내에서 대처승을 축출하라는 대통령 유시가 내려졌고 이후 1962년 4월까지 8년에 걸쳐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선학원을 중심으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 전국비구승대회가 개최되고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만들려는 종헌 제정, 공포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에 대응적인 교단의 다수 구성원인 대처승들은 이 같은 정화에 반대했다.

결국 정화운동은 자주적인 변화보다는 공권력이 개입된 가운데 이뤄졌고, 1955년 8월 12∼13일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비구승 종단이 성립됐다. 이 대회 이후 교단의 운영권과 전국 사찰의 운영권이 비구승으로 넘어 갔다. 그러나 대처승은 이에 불복하고 법정 공방으로 확산됐다.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자 대처승 측은 비구 측을 관제 불교로 규정하고 사찰령 규제의 철폐를 주장했다. 당시 대처 측의 사찰 재진입과 이를 막기 위한 비구 승려의 할복 기도와 법원 난입 사건 등이 터지면서 사회문제로 크게 비화되기도 했다.

1961년에는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권은 비구 측과 대처 측 어느 쪽도 한국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자율적으로 불교를 재건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비구와 대처 양측이 참여해 합의를 이뤘고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대한불교 조계종이 출범하게 됐다.

이 같은 시대 상황에 대해 김용태 동국대 HK교수는 본지 칼럼을 통해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어난 불교정화는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비구승 중심의 수행 및 계율 전통 회복이라는 불교적 가치를 표면에 내세운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독교 우위 정책에 입각하여 정치적 반대파가 된 불교계 실세 대처 주지들을 제거하고 정권 연장을 도모하려는 정략적 판단이 개입됐다”고 평가했다.

▲ 1994년 4월 13일 개최한 범불교대회. 기존 종회의 권한을 개혁회의에 이양할 것을 결의했다. 사진출처=민족사 간행 〈한국불교 100년〉
조계종, 시련과 개혁의 역사
새롭게 출발한 대한불교조계종은 종단의 재정비와 현대화를 추진하여 20세기에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도제양성 △역경 △포교의 3대 지표를 천명했다. 이를 위해 역경원을 설립하여 팔만대장경의 완역을 추진했고 도제양성을 위해 전국 주요 사찰에 총림을 설치해  선원과 강원, 율원을 세웠다. 또한 1980년대에 총무원 산하에 포교원을 설치해 포교에 전담하도록 했다.

1962년 5월에는 사찰령을 계승한 불교재산관리법이 통과되고 그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재산 관리 뿐 아니라 불교 단체 등록 및 운영을 국가에서 관리·감독하게 된다. 또한 1969년 정부가 국립공원제도를 시행하면서 가야산 해인사와 지리산 화엄사 등 종단 사찰의 재산을 아무런 협의나 보상 없이 국립공원 주요 부지로 지정했다. 당시 해인사 방장 성철 스님은 “사찰은 신성한 수도도량으로 국민관광지화 되면 국민정신이 황폐화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시행했다. 이 같은 국립공원제도는 2000년 이후까지 관람료 문제 등을 야기시키며 정부와 마찰을 빚게 한 단초로 자리잡았다.

1980년에 들어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 10월 27일 새벽에 전국 3천여 사찰에 계엄군이 진입해 강압적인 수색을 하고 총무원장을 비롯한 주요 사찰 소임자 스님들을 불법 구금하는 10.27법난이 일어났다. 

수사 주체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수사지시를 받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산하 합동수사단이었다. 합동수사단은 불교계 정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을 수립한 뒤, 1980년 10월 27일에 조계종 승려 등 불교계 인사 153명을 강제로 연행하고,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곳을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 병력 3만 2천여 명을 투입해 수색했다. 당시 무차별 폭력과 고문이 자행됐고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2008년 3월 ‘10·27법난에대한피해자의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이 공포되면서 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 절차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조계종이 현재와 같은 현대적 시스템을 갖춰나간 것은 1994년 개혁 이후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3선 연임을 강행하자 대중의 반발이 일어나 종정과 총무원장이 같이 퇴진하고 종단제도개혁이 추진됐다.

당시 종헌과 종법이 대대적으로 개정되어 총무원장 선출을 선거인단의 간선제로 하고, 교육과 포교를 전담하기 위해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두어 3원 체제로 변화하게 됐다. 또한, 지방자치시대에 발맞춰 교구자치제도를 도입하여 교구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게 바꿨다.

이후 조계종은 제도 개선 기반 위에 각 부분별 영역을 전문화시켜 나갔다. 사회복지의 요구가 높아감에 따라 전담할 조직으로 사회복지재단을 법인으로 신설하고, 청소년단체로 파라미타청소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조계종출판사를 신설하기도 했다.

개혁종단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1995년 취임과 동시에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총무원은 종단의 공식 예산 이외에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기금으로 20억원을 조성해 노동·인권·복지·환경·통일 사업에 투입했다. 위안부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을 경기도 광주에 설립했으며, 외국인 노동자와 장기수들을 초청해 위안법회를 열었다. 이같은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은 현재의 화쟁위원회와 노동위원회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1994년 주요한 변화 중 하나는 비구니 스님들의 중앙종무기관 참여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조계종 중앙종무기관의 소임을 맡은 것은 1998년 포교원 사무국장에 임명된 향원 스님이 처음이었으며 부장급은 2005년 탁연 스님이 처음으로 문화부장을 맡았다. 최근 비구니 스님들의 중앙종무기관 참여가 늘고는 있지만, 그 수준은 ‘생색내기’에 그치고 있어 제도 개선이 교구되고 있다.

2000년대 접어들어 종단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건립해 불교중앙박물관과 중앙종무기관이 한 곳에 입주시키며 일신한다. 또한 불교문화재연구소를 설립하여 불교문화재의 발굴과 보존을 전문화시키고, 템플스테이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을 설치했다.

아울러 조계사 일대의 정비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전법회관을 건립했고, 공주에 한국문화연수원을 건립해 중앙연수 시설을 갖췄다. 전문 모금기관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을 설립해 불교계 자비나눔 문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다.

태고종, 전통의식 脈이어
현재 태고종은 1970년 대처승 측이 별도로 종단을 설립해 통합종단에서 탈퇴하며 시작된다. 태고종의 가장 큰 특징인 한국불교의 의례와 예술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전래된 전통가사인 홍가사(紅袈裟)를 그대로 수지하고 있으며 범음범패(梵音梵唄)와 불화단청(佛畵丹靑) 등 국가지정 불교 무형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면서 불교문화의 창달에 힘쓰고 있다. 특히 영산재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태고종은 1980년부터 승려합동득도를 실시해 선교육(先敎育) 후득도(後得度)제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 제도의 시행으로 매년 약 200여명의 자격 있는 승려가 배출돼 산하사찰에서 수행정진과 전법교화에 진력하고 있다.

태고종은 지방교구와 해외 등에 21개 종무원을 두고 있으며 그 산하에 3,000여 사찰과 7,000여 스님이 있고 간행물로는 종단 기관지인 주간 <한국불교신문>과 일제 강점기 한용운스님이 창간한 오랜 역사의 월간지 <불교>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982년 동방불교대학을 설립해 20여 년 동안 1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태고종은 2004년에 시작한 한국불교전통문화 전승관 건립사업이 2007년 완공되면서 ‘사간동 시대’를 연다. 전승관에는 불교문화예술 상설공연장과 불교문화재 및 예술품 전시관, 전통예절 및 인성교육관, 대륜불교사상연구소 등을 갖춰 포교와 교육을 위한 불교종합문화센터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종단의 지속사업으로 중앙복지원을 설립하여 사찰의 복지단체조직화를 통해 종단의 사회복지사업을 확대 실시하고 있으며 전국적인 자원봉사단을 구성하여 불우한 이웃을 돕는 자원봉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종단 집행부와 반대 측의 갈등이 지난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천태종의 중창
한국 천태종의 개창조는 고려 의천 대각국사이며, 중창조는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 1911~1974)이다. 상월원각대조사는 15세에 출가해 고행수도 끝에 41세에 대각을 이루고 평생을 불교중흥과 중생구제에 진력했다. 1945년에 구인사를 창건했고, 1967년 천태종을 중창했다. 2대 종정은 남대충(1925~1993)대종사이며, 현 3대 종정은 김도용(金道勇, 1943~) 스님이다.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법화경)>이며, <법화삼대부(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와 <천태사교의>를 중요 경전으로 한다.

천태종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空), 가(假), 중(中) 세 개의 진리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삼제원융(三諦圓融)을 근간으로 하여 일념삼천(一念三千),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사상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천태묘법의 사상을 바탕으로 개인완성, 불국토 건설, 법성체 결합의 3대 강령과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의 삼대지표를 실천하는 것을 종지로 삼고 있다.

천태종은 구인사 입교법회를 통해야 신도가 될 수 있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제도를 정착시킨 것도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다. 한 종단 신도라는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천태종은 총본산 체제를 갖춘 중앙집권적인 종단 운영을 하고 있다.

현재 천태종은 본산 구인사를 비롯 전국에 200여 사찰이 있으며, 500여 스님(독신 비구, 비구니)들이 신도들을 교화하고 있다. 천태종은 특히 부산의 삼광사, 서울의 관문사 등 도심 사찰의 건립과 포교에서 남다른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4년제 종립 금강대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사회복지법인과 나누며 하나되기 운동본부을 통한 대북 교류에도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의 모습. 올해 개산 70년을 맞는다.
진각종 창종
진각종은 한국을 대표하는 밀교 종단이다. 진각성존으로 추앙되는 회당(1902~ 1963)대종사는 1947년 달성군 성서면 농림촌에서 육자진언(六字眞言)을 통해 불법의 도리를 깨달았다. 이후 회당대종사는 1947년 5월 최초의 교화도량을 경북 영일군 기계면 이송정에 마련해 명칭을 ‘참회원(懺悔園)’으로 명명했다. 1948년 8월 교명이 교화단체 참회원으로 정해졌다가 다시 1951년 심인불교건국참회원(心印佛敎建國懺悔園)으로 변경했다.

1953년 8월 종단의 체제 완성을 위해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 헌법이 제정됐고, 그 해 12월 대종사의 유법에 따라 종명을 ‘진각종'으로 명명했으며 1954년 1월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 유지재단을 설립해 법적인 토대가 완성됐다.

이후 진각종은 한국과 세계 각지에 심인당을 개설했으며 1996년 종립대학인 위덕대학교를 개교했다. 이어 1998년에는 사회복지법인 진각복지회가 설립됐다.

관음종 창종
관음종은 개산조인 태허 대종사(1905~ 1979)가 1957년 3월 10일 일승 불교 현정회 설립으로 시작을 알렸다. 1988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 폐지에 따라 대한불교관음종으로 종명을 개명했다.

현재 관음종은 재단법인인 공익법인으로 견실한 종단 운영을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법인 서울복지원을 운영하며 복지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 또한 서울불교문화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고, 대학 내 관음장학회를 두어 도제양성에 힘쓰고 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설립
이 같은 주요종단들은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창립해 우호와 국제 불교 교류 등의 공동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967년 5월 국내 불교계 대표 75명이 모여 불교계의 대동단합과 총화를 기하고 호국불교의 사명을 다하고자 대한불교총연합회를 발기했으며, 1969년 3월 12개 종단 대표 발기인 200명이 모여 한국불교총연합회를 창립했다. 1975년 18개 종단이 문화공보부에 등록돼 있었다.

당시 연합회에는 원불교 역시 가입해 있었으나, 국내에서는 민족 종교의 입장을 고수하고 해외에서는 불교로 입지를 굳혀 논쟁이 돼 왔다.

1980년 11월 한국불교종단연합회로 명칭을 바꿨으며 1989년 현재의 명칭인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됐으며 28개 회원종단으로 확대돼 활동하고 있다.

종단협은 매년 한·중·일 3국 불교도들의 국제회의인 한중일불교우호교류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봉축위원회 활동을 통해 ‘부처님오신날’ 연등축제를 주최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종단만 200여개, 이유는?
광복 이후 한국 불교를 변화를 살펴보면 큰 줄기로 내려오는 조계종과 주요종단 설립이외에도 무수한 군소 종단들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현재 200여 곳의 종단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2년에 발간한 <한국의 종교현황>에 따르면 연락처가 확인된 종단 수는 265곳이었고 그 가운데 137곳의 현황을 파악해 소개했다. 최근에는 우후죽순 생겨난 ‘유사 조계종’에 대한 우려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많은 종단이 만들어진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전문가들은 종교법인을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로 변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차차석 동방대학원대 교수는 ‘한국불교의 현재와 미래-불교 종단의 분파활동과 문제점을 중심으로’ 제하의 논문에서 “신생종단이 급증하는 시기는 1988년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보존법’이 시행되는 것과 밀접하다”면서 “종교법인 등록제가 시행되면서 이 무렵 66개의 신생종단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생종단의 등장이 아니라 이들 종단들의 정체성이 모호해 불교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냐’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차 교수는 “현재 한국불교계의 대다수 신생종단은 창종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면서 “새로운 이념과 실천방안은 말할 것도 없고, 과연 불교적인가 하는 의문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신생 종단이 한국불교 발전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낮아보여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