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뿌리가 스스로 밝게 진행하도록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 그림 최주현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무조건 남을 이익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그 점을 아시고
생활 속에서 자비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밝은 깨어 있음으로 살아가려면
질문 한 해가 밝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떠한 물질적인 유혹과 감정적인 일렁임에도 휩쓸리지 않고 내 마음 중심을 세워서 살아가리라 발원했는데 살아가는 제 모습을 보면 이리저리 눈이 돌아가고 귀가 쏠리는 것이 작년과 별다르게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안의 근본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밝은 깨어 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새해를 맞이해서 올해는 한층 더 분발해서 자유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함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물에 가면 싱그럽고 물이 좋죠? 그러니 물은 말없이 날더러 물같이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꽃을 볼 때에 꽃도 나같이 살라고 하는 겁니다. 모진 풀뿌리를 봤을 때도 나를 보고서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나같이 살라 하니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 모로 봐서 지극하게 믿고, 믿는 것을 바깥으로 믿지 말고 안으로 믿을 때에, 진실하게 믿고 놓는 작업을 할 때에, 맡겨 놓는 작업을 할 때에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까 그 속에다 맡겨 놓을 수 있는 그런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진실하게 구하는 법도 나오고 진실하게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명심하여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인공을 찾다가도 어떠한 일이 용도에 따라서 부닥치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바깥으로 끄달리고들 하십니다. 안으로부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바빠서 못 온다. 뭐 주인공 찾는 거니까 집에서 해도 된다.’ 이렇게 해 가지고 잘못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왜 교수 노릇을 하면서도 자기네 아들딸들을 학교로 보냅니까? 내 집 아이가 수술을 꼭 받아야 하는데 왜 남의 의사한테 맡깁니까? 내 집 아이는 내가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그 마음이 그게, 남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거를 알면은 해도 괜찮건만 내 자식이라는 그 착에 의해서 수술하는 칼을 못 대죠.
안에다 물을 줘야 바깥의 나무들이 잘 자라듯이 벌써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알아들었다고,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과 구함이 진실해야만 하는데 말이죠. 조금 전에 얘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도다.’ 하고 그렇게 모든 걸 둘로 보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고, 나한테서만이 이끌어 줌이 나온다고 생각할 때 모든 해결은 그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나를 깨닫게, 증득하게 해 주는 것도 그 속에서만이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실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가짜입니다. 곧 죽어도 옳은 거는 옳게 안으로 놓고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한 철 나왔다가 부닥침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한 철 날 때에 부지런히 해서 깨달아야만 요다음 생에…. 아니,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 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내가 자유스럽게 보고 자유스럽게 듣고 자유스럽게 남을 알고 자유스럽게 어디서 온 걸 알고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자유스럽게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다면 그때에 비로소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면은 스스로 법신이 되고 스스로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도 될 수 있고요. 그러니 여러분이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무조건 남을 이익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그 점을 아시고 생활 속에서 자비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통 밖에 나와서 통을 굴리려면
질문 스님께서는 법문하시는 중에 통 밖에 나와야 통을 굴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량적으로는 그 말씀이 이치에 맞습니다만 실참의 경우에선 어떠한 경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말씀 중에 통이란 무엇이며 통 밖은 무엇인지, 또 굴린다고 할 때의 굴려지는 대상은 무엇이겠습니까?

답변 통이라 하는 것은 이 마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서, 몸뚱이 속에서, ‘내가 나다. 내가 하는 거지. 내가 누구한테 뭐를 줬지.’ 하며 나라는 걸 세우고, 모든 것을 나라는 고집으로써 상대해서 거기에 억눌려 있는 사람을 통 속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어디고 우주 바깥에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지고서 우리가 넓고 지혜롭게 생각한다면 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죠. 벗어나야만이 나를 굴릴 수가 있지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나를 굴릴 수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 속에 내 마음이 갇혀 있는데 말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내 마음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벗어나는 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벗어나는 길도 아니요, 벗어나지 않는 길도 아니요, 그러면 진짜 어떠한 게 벗어나는 길인가? 여러분이 그대로 지금 살고 계시고 마음 속에서 그대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굴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마음 속에서 마음 이전의 마음을 깨달아야 물리가 터지고 그 모든 것을 다 알게 됩니다. 나의 마음 속의 마음을 깨달아야만이 그때에 진짜 정말 공부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정신세계의 나와 물질세계의 내가 둘이 아니게 서로 상응 상조하는 작용을 한다면 바로 중용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게 진짜 벗어나는 길인데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내가 공한 줄 안다면…
질문 마음을 보려면 먼저 사대와 오온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공해서 없는 경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공한 줄 알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답변 물론 우리가 부처님 법의 언어로 말한다면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공(空)했는데 무엇을 가질 게 있고 놓을 게 있느냐.’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것이 말만 알았지 뜻을 모를 때는 안 것 그 자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참작해서 한번 침착하게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스님이 화두를 줬다 그러면 이차적으로 이 화두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 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납니다. 삼차적으로는 여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임하고서 앉으나 서나 끊이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좌선을 해도 이것을 꼭 가지고 ‘뭣고 뭣고 뭣고?’ 하고 돌아갑니다. 자기가 스스로 벌써 공했기 때문에, 내가 공하고 세상이 공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마저도 공했고 내가 가질 것도 가진 것도 공해 버렸으니까, 모든 것이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그 점은 뭐냐.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걸 한번 침착하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든 거를 나쁘다 좋다 해 왔고, 여러분이 다 움죽거리고 있고 여러분이 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판단 못하고 남한테 이끌려 가는 것도 바로 자기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이 준 화두, 바로 이것을 꽉 쥐고 굴리질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일 초도 머무르지 않고, 그냥 머물렀다가 돌아가고 머물렀다 돌아가고 이것이 한정 없이, 어느 한군데 고정적으로 국한된 게 없이 전부 변천해 돌아가고 부서져 버리고 상해 버리고, 또 나는 만날 때마다 변하고 또 말할 때마다 딴 말 하게 되고 만날 때마다 딴 사람 만나서 딴 사람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공했다는 얘깁니다. 갖가지로 소소영영하게 가지고 소소영영하게 하면서도 공했다는 얘깁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우리가 간다는 얘기죠. 놓고 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항상 그릇은 비어 있다는 얘긴데, 마음으로 만들어서 지어 가지고, 문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것을 마음으로 지어 가지고 그 큰스님이 이렇게 하시니까 이것이 불법이다 하는 걸 쥐고서는 그거를 놓질 못하고 가기 때문에 외려 자기 마음이 자기 문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열지 못하고 닫지 못하는 그런 이치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참선이라는 거, 예전의 스님네들이 참선이라는 것은 꼭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주 제일등으로 쳤죠. 그러면은 참선이 어떤 것이 참선이냐. 참선은 행선도 참선이요 좌선도 참선이요 입선도 참선이요, 모든 행 전부가, 일거수일투족 전부가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 ‘아! 결제가 되면 한 철 선방에 가서 나야지. 앉아서 좌선을 해야 그것이 으뜸이지.’ 요렇게 변경이 돼 버렸단 말입니다, 마음이. 육신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지고, 마음 떨어지면 코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다 떨어질 것을 뭐가 그렇게 쓸모가 있다고 그렇게 이 육신을 가지고 매달리고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과거로부터 가지고 나온 내 몸뚱이 속에 실려 있는 그 그림자, 그 의식들, 그 모습들은 다 내가 지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타의에서 오는 어떠한 경우라도 이것은 타의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돌려야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좋은 것이나 언짢은 것이나, 좋은 것이라면 바로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주인공에 모든 것을 감사하게 놓고 일임하고, 또 잘 안되는 것은 그 모든 과거로부터 그림자처럼 그 컴퓨터에서 입력이 돼서 나오는 거니까 다시 거기다 입력을 하는 것이, 바로 주인공에다 다시 맡겨 놓는 것이 입력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다 맡겨 놓고 ‘당신만이 잘 이끌어 줄 수 있어. 당신만이 모든 거를 다 간파할 수 있어. 어떠한 애고든지 어떠한 병고든지,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고 지켜보고, 그러고 지켜보다 보면 체험을 하게 되고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진짜 참선입니다. 무조건 틀고 앉았다고 그래서 참선이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모든 일체, 앉으나 서나 또는 자나 깨나 일하나 어떠한 거든지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나는 알지 못하나 내 주인공이 전체를, 전체 동서남북 상하를 다 가지고 있다는 거를 알게 되자, 믿어지고 바로 거기에 어떤 여건이 있다면 거기에다가 상응한다 이거죠. 그러면 ‘당신이 전부 하시는 거니까 당신이 이것도 해결을 해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즉시 그것이 반영된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성냥불을 탁 켜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 도리를 안다면 어떠한 거든지 못할 게 없고, 어떠한 거든지 주인공이 하는 것이니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을 겁니다. 모두는 내 것도 아니면서 전체 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내 것이 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일체 한생각에 나도 건질 수 있거니와 남도 건져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의 능력이 바로 샘솟듯 한다. 그래서 감로수가 돼서, 그 감로수로써 양식을 삼는다는 얘기입니다. 감로로써 양식을 삼는다면 어떠한 사람이든지, 내 중생이든지 남의 중생이든지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와 조상이 둘이 아닌 이유
질문 스님께서는 법문 중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다르지 않다. 조상한테 제사 지내는 것이 곧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인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 따로 숭배하고, 조상 따로 모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왜 조상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지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못한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설명해 주세요.

답변 부처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해골바가지들을 보고 정례를 올리신 겁니다. 내가 법문 중에 몇 번 얘기를 했죠? 공동묘지엘 가니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늙었더라고. 이런 걸 보면 아이도 조상이고 또 조상도 자기 자손이에요. 이런 이치를 부처님께서는 왜 해골을 가지고 가르치셨을까요? 해골과 조상이 둘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정례를 올리고 “이것이 전에 내 부모였느니라. 내 형제였느니라. 내 친구였느니라. 내 할머니였느니라. 내 할아버지였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겁니다. 죽었으면 누구든 자기 조상 아님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바다에 파도가 쳐서 거품 같은 물방울이 수만 개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라앉으면 다 바닷물인 것입니다. 이 경우 물방울은 육신을 가진 중생이고 바다는 근본 자리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물방울 하나가 가라앉는 것밖에 안 되는데, 누구라 가릴 것 없이 몸을 벗었다 하면 바다로 돌아갑니다. 죽으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땐 모두가 다 내 조상이다 이 소리죠. 일단 바닷물로 돌아가고 나면 그 바닷물의 어느 것이 내 조상인지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바닷물 전체가 다 내 조상인 거죠.
생명의 근본은 그렇게 크고 넓으면서 하나예요. 그 생명의 바다에 잔잔한 물로 그대로 한자리하고 있다가 그냥 방편으로 적게도 크게도 나투면서 한 물방울이 되어 나와서 보여지는 게 우리가 사는 겁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은 바로 이러한 것이니라. 바다를 봐라. 수만 개의 물방울이 흩어졌다가 바람이 자니 다시 가라앉아 지금은 그대로 다 바다이니라.” 하시는 거죠. 그런 이치로 그 해골바가지와 뼈다귀들도 그렇게 한번 일어났다가 가라앉은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 조상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그리고 그 또한 내가 아니겠느냐 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조상님이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따로 나누어서 예배를 올린다는 게 없는 법이죠. 모든 것은 본래 한자리이기 때문에 참된 예배는 밖으로 가질 않고 안으로 드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는 곧 조상에게 하는 예배이면서 부처님께 하는 예배인 것이고, 또 동시에 나에게 하는 예배인 거예요. 그것이야말로 일체가 더불어서 함께 하는 예배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예배는 자기한테 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조상님에게 했다고 해도 맞지 않으며, 부처님한테 했다고 해도 맞지 않는다고요. 그것은 예컨대 돈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돈으로 물건을 사 오지만 거기엔 오고 감이 없어요. 단지 그냥 사 올 뿐이지 ‘돈을 저 사람에게 줬다. 그래서 물건을 받았다.’ 이런 게 없는 거죠. 자연스러운 인연일 뿐이지. 그와 같이 법이란 오고 감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일 뿐이에요.

그래서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도 내 마음의 떡이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겁니다. 그 마음의 떡 하나에 인등이 있고, 향이 있고, 청수가 있는데 일일이 떡을 들고 다니면서 제사를 지내려니 그게 얼마나 구차해요? 그건 오히려 조상을 모독하는 겁니다. 또 부처님을 모독하는 거고요. 그건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모시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우습게 만드는 겁니다. 왜? 마음으로부터 나와 조상이, 나와 부처가 하나인 줄 안다면 그럴 수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조상님들에게 감사한 생각을 하되 늘 자기와 더불어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질 않고 거죽으로만 조상님을 공양한다면 안 되죠. 그런다면 조상님의 중생적 모습만을 보고, 조상님의 참 근본인 진실한 부처의 모습, 모습 아닌 그 모습은 못 보는 셈이지요. 그런 사람은 참된 수행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뜻으로 본다면 조상과 부처가 함께 한 그 근본 자리는 항상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몸이 춥지도 않은 그 법 안에는 법양식이 가득가득 채워져 있거든요. 그 자리엔 언제나 충만하게 물도 있고 향도 있고 등도 있고, 일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밝고 명랑하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참뜻으로부터 잘 정돈된다면 조상님들도 다 올바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한 집안에서 진짜 중이 한 사람만 나온다면 자손의 십 대뿐만 아니라 이십 대까지도 그 복덕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촛불을 어떻게 밝혀야 하나요?
질문 해년마다 새해맞이 촛불재를 하게 되는데요, 가령 삼형제가 함께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일반적으로는 촛불재를 모실 때 어떤 한 분만이, 예를 들어서 큰형만 모신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백중이나 개별적으로 재를 모시는 등 여러 번의 행사가 있습니다만 과연 이런 뜻깊은 행사에 어떤 형제가 대표로 하는가, 아니면 한 번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가르침 듣고자 합니다.

답변 이 세상에 나올 때 제각기 다 혼자 나오죠? 갈 때도 혼자 가요. 대신 가 주는 사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밝히는 것도, 컴컴한 두뇌를 밝히는 것도 바로 제각기 각자 있는 거죠. 그런데 환경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식구가 오지 못하고 하지 못할 때에 그 한마음으로써 대신하는 거지, 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혼자 대표로 하면 되지!’ 이러지는 마세요. 촛불재라는 것은 이 모든 유의 법이나 무의 법에서 내가 형성되고 살아나갈 때에 컴컴했던 일을 다시금, 내 깊은 마음으로 인해서 두뇌로 밝은 물리, 지혜를 내기 위해서, 또 항상 뿌리가 깊은 밝음을 스스로 밝게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이건 들고 켜고 하는 데에 방편이라고 하지마는 방편이자 진실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거나 이렇게 열심히 뛰는데도 안된다거나 이런 것도 업에 속하는 거니까, 그것도 본인이 촛불을 들고서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 주거나, 부모가 해 주거나 이래도 그건 훨씬 더 물리가 터지게 돼 있는 겁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조건이죠. 내가 해 놓지 않고 내가 무엇을 받을 게 있겠습니까? 내가 해야만이 한 것만큼 받을 겁니다. 그러니까 촛불재라는 것이 아주 못났든 잘났든 또는 업보가 많든 업보가 적든 하여튼 누구나가 다 해야 될 일이라고 봅니다.
예전에도 원주에서 이런 예가 있었지요. 아들이 뭐 둘이나 되나요? 단 하난데, 그냥 공부를 그렇게 해도 남을 따라설 수가 없어요. 안 자고 공부를 하는데도 그렇대요. 그래서 해마다 이 촛불재를 그때도 했는데 하여튼 그 어머니가 그 소릴 듣고 그냥 아들의 촛불을 저녁마다 켰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일 년 내지 몇 개월 안 가서 물리가 터져 가지고 그 반에서 일등을 하더랍니다. 이것이 거짓이 아니에요. 이것이 내가 한 것만큼 내 앞에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두뇌가 컴컴했던 것이 그렇게 밝아졌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제가끔들 촛불재 하는 거는 상당히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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