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27〉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전국 각지에서 차출한 승인공장
정조의 효행이 집약된 유불습합
힘과 구상적 아름다움 갖춘 비천
김홍도가 그렸다는 삼세불 후불탱

대웅보전 어칸과 좌우협칸 천정에 장엄된 전체문양.

사도세자 능침사찰이자 승풍규정소

용주사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陵寢)인 현륭원(顯隆園;현재는 융릉)의 능침사찰이다. 왕과 왕비의 능(陵)을 ‘능침’이라 부른다. 능침의 가까이에서 능을 수호하고, 관리하며 제례와 명복을 두루 비는 사찰이 능침사찰이다. 왕릉주변에 입지하여 능을 수호하면서 두부(=조포)를 만들어 관에 공납하곤 해서 불교천대의 유가적 조롱으로 ‘조포사(造泡寺)’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능침사찰이 봉은사, 봉선사, 여주 신륵사, 화성 용주사다.

정조는 정조 13년(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華山)의 현륭원으로 천장(遷葬)한 후, 그 이듬해에 갈양사의 옛터에다 능침사찰로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한다. 용주사 창건은 국왕인 정조를 중심으로 전국의 건축 및 장엄역량이 결집된, 결과적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실원당 건립이었던 까닭에 창건되자마자 전국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대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의 하나로 격상되었다.

정조 즉위 원년인 1776년에 전국에 걸쳐 원당사찰 철폐령을 내린 사실과는 전혀 다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28세 때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애절한 마음과 효성의 발로에서 기인한 것이다. 현륭원 공사시 산역(山役)을 왕이 친히 감독하고, 애절히 곡을 하였으며, 1790년 용주사 창건 이후 11년 동안 한 차례에 6,230명이 수행하는 행차에 13차례에 걸쳐 창덕궁에서 화성 현륭원까지 원행(遠幸)을 한 것만 보아도 정조의 절절한 효성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용주사는 부왕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孝) 실천이 집약되어 유불의 습합형태로 나타난 능사(陵寺)였던 것이다. 지금도 용주사 가람의 건축에 행랑채를 갖춘 삼문과 태극 소맷돌, 홍살문, 경희궁 화강암 석주를 연상케 하는 돌기둥, 대방(大房) 등 궁궐이나 관가적 건축요소가 곳곳에 남아있으며, 유교적 제사공간인 재각(齋閣: 호성전)과 부모은중경판을 보장하고 있어 용주사 고유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대웅보전 천정에 장엄된 세 가지 문양 세부.
국가적 역량이 투입된 창건역사

용주사 창건공사는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되었다. 재정은 궁궐과 관, 민에 이르는 전국적인 모금과 시주로 마련했다. 예조로부터 통팔도권선문(通八道勸善文) 등을 받아 불교승단에서 전국적으로 시주를 받는 형식으로 진행해서 8만7천냥을 모았고, 공사인력 역시 전국 각지에서 유능한 승인공장(僧人工匠)을 차출하여 관청 감독관의 파견 하에 공사가 진행되었다. 건축의 도편수를 비롯해 화원, 단청편수 등 장인 대부분이 전국 각지의 사찰에서 특별히 차출된 승인공장, 곧 승장(僧匠)들이었다.

〈조선사찰사료〉에 실려있는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 에는 건축도편수를 비롯한 단청편수, 탱화화원의 역할과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 때, 대웅전 건축편수는 전라도 장흥 천관사에서 차출된 문언스님이었고, 단청도편수 및 삼장탱화원은 가선, 민관스님, 대웅보전 후불탱 삼세여래체탱화원은 김홍도로 밝히고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팔도 전체에서 승속을 막론하고 유능한 건축가, 단청장, 화원, 조각승 등 불모(佛母)들을 차출해서 국가적인 역사로 용주사 가람을 경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칸 주심기둥의 용미장식(사진 왼쪽)과 닫집의 비천상
우주적 에너지를 표출한 용미

대웅보전은 내4출목을 갖추었다. 사찰건축의 공포구조는 가구식 역학구조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체(體)는 건축에 흐르는 신령한 기운의 조형적 상징체계라 할 것이다. 내4출목의 첨차와 살미장치는 성리학적 질서만큼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이며 단정하다. 힘보다는 반듯하며 절제된 격조를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한 곳은 다른 기운을 베풀었다. 어칸 주심기둥에 표현된 용미(龍尾)에는 생동감과 힘을 실었다. 용의 몸통 가득 베푼 붉은 색채에서 핏줄이 흐르는 듯 더운 기운이 흐르고, 율동적인 용틀임엔 힘이 한껏 팽배해 있다. 무엇보다 극적인 대목은 용 몸통과 함께 S자로 뻗어나가는 생명력의 굵은 꽃가지다. 용 몸통 따라 뻗어나가는 넝쿨 갈래에서 붉은 연꽃 한 송이가 미어터지고 있다. 용과 꽃의 형상이 서로 닮았는데, 서로의 기운을 더욱 고양시키는 형세다. 용과 연꽃의 형상은 자연의 물상 소묘의 단계를 넘어 공간에 흐르는 내면적이며 우주적인 에너지를 표출하는 이형사신(以形寫神)에 다름 아니다. 형상의 상을 통해 정신의 체를 드러내는 사의적인 상징체계인 것이다.

대웅보전의 천정은 2단의 층급우물천정으로 경영했다. 천정에 베푼 문양은 좌우대칭이고 궁궐 박석 위의 품계석처럼 자기자리가 흐트러짐이 없이 확고부동하다. 분할된 평면영역에 세 문양이 저마다 영역의 틀에 정확히 베풀어져 있다. 세 문양은 국화형식을 빌린 것과 쌍선학, 범자종자불의 세 문양이다. 쌍학은 문관 당상관의 공복에 수놓은 흉배(胸背)를 연상케 하는데 쌍학이 취한 색상과 구도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움과 기품도 두루 갖추었다. 신령한 오색구름이 흐르는 검은 천공에서 두 개의 천도(天桃)를 취하는 형상을 담고 있다. 천도는 여의보주의 알레고리다. 작은 우물반자 틀 안에 섬세한 붓질과 풍부한 색채를 베풀어 회화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의지가 뚜렷하다.

대웅보전에 모신 삼세불과 후불탱, 그리고 닫집
나무아미타불 새긴 범자종자불

문양의 핵심은 아무래도 닫집이 있는 중앙 칸의 범자종자불 문양이다. 붉은 소란반자의 표면에 먹선을 넣은 연꽃이 피어나 사방표면을 덮은 가운데 여섯자 범자종자불이 별처럼 돋아난다. 한가운데는 비로자나 법신불을 상징하는 ‘옴’ 범자종자불이 있고 그 주위에 스스로 회전하는 여섯 넝쿨문을 그려 넣었다. 넝쿨에 신성한 생명력의 기운이 넘친다. 그 넝쿨문은 우주법계에 가득한 부처님의 거룩한 자비와 진리 그 자체다. 기운의 기세는 대소, 강약, 고저의 다양한 변주를 거듭한다. 고저장단의 리듬을 갖춰 뻗치는 넝쿨의 형세가 대단히 율동적이고 아름답다. 그 중 몇 곳의 반자에는 범자종자가 아니라 한자로 ‘나무아미타불’의 문자불을 모셔 조형의 궁극적 본질을 자내증으로 천명하고 있다. 문자불의 조형언어는 천정의 꽃은 단순한 자연의 꽃이 아니라, 대단히 정신적이며, 고차원적인 형이상학적 이미지임을 거듭 환기시켜 준다.

용주사 대웅보전 장엄에서 단연 주목되는 곳은 닫집과 후불탱이다. 당대 최고의 승장 기능이 녹아 든 닫집은 웅장하고도 묵직하며 거룩함이 넘친다. 닫집조형에서 눈길을 먼저 끄는 것은 닫집 전면에 독립조형으로 매단 여의보주다. 닫집 외부의 영역에 독립된 형태로 보주를 장엄한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갓 발현한 듯한 붉은 보주에선 신성의 주술적 기운이 보주를 한 바퀴 휘감아 돌며 약동하는 뜨거운 생명력을 토해내고 있는 듯 하다. 흡사 태양의 형국이지만, 본질은 진리 그 자체의 여래(如來)일 터이다. 붉은 보주는 붉은 기운이 주위를 감싼 구(球)의 형식을 갖추어 생명력과 자비가 흐르는 법계우주의 모티브를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불교장엄에서 보리수나무와 연꽃이 중의적(重義的)이듯이, 닫집의 보주 역시 대단히 중의적이며 고차적인 오브제 임에 분명하다. 닫집 일곽의 부속조형에서 좌우 천계에서 환희의 표정을 지으며 천의를 휘날리며 하강해 내려오는 2구의 비천상 조형도 언급을 빠트릴 수 없는 아름다운 조형이다. 비천조형은 수류부채(隨類賦彩)의 색채와 인물묘사 등에서 범어사 대웅전 불단의 비천조형과 닮은 인상을 풍겨 낯설지 않다. 한 분은 다소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취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 분은 남성적인 힘을 갖추고 있어 비대칭의 대칭을 구현하고 있다. 펄럭이는 천의 자락은 대단히 리드미컬하며 힘이 넘친다. 주사와 녹색의 색채대비 역시 생동감을 고취시킨다. 비천의 손엔 모란 형태의 꽃가지와 용의 뿔, 불로초 영지 등 영험의 지물을 쥐었고, 천의의 끝자락엔 위봉사의 비천벽화처럼 복주머니를 매달고 있어 눈길을 끈다. 풍부한 소재를 두루 갖춘 이 비천상은 힘과 구상적 아름다움을 겸비한 빼어난 아름다움의 수작이 아닐 수 없다.

명암법이 적용된 대웅보전 후불탱의 세부 모습
명암법의 서양화풍 후불탱화

대웅보전의 후불탱화는 여러 가지로 문제작이다. 용주사 창건내용을 담고있는 ‘수원지령등록’에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 등 도화서 화원들의 감독 아래 25명의 화승이 후불탱화를 그렸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탱화 하단의 화기(畵記)에 일반적으로 작성하는 시주질(施主秩), 녹화질(綠化秩) 기록이 결정적으로 없어 이 후불탱을 누가 그렸는가에 대한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용주사 후불탱에는 불보살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의 얼굴과 손 등에 음영을 통한 명암법의 구사, 즉 서양화풍을 구사하고 있어 특히 주목된다. 의례적인 평면양식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얼굴에서 생동감과 입체감을 두루 살려내고 있다.

탱화 속에 시대의 변화 기류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용주사는 조선의 진경시대가 지닌 인문적 소양과, 예(禮)와 효(孝)라는 시대정신, 종교적 염원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한 시대의 마음과 숨결을 집약한 사찰이라 할 것이다. 용주사에 한 시대의 시대정신이 인문의 강물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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