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일요법회-정각 스님(일산 원각사 주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인으로서 사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은 식상한 만큼 등한시 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자칫 놓치고 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일산 원각사 주지 정각 스님은 ‘사람’과 ‘사랑’에서 찾았다. 1월 11일 조계사에서 열린 법회에서 스님은 종교, 인간이란 단어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며 종교의 의미를 되짚었다.

Q : 종교의 의미는?
A : “서로 기대 살 수 밖에 없는 ‘인간’
관계성 위에서 타인 염려·연민하며
삶의 지평 넓혀가는 것이 종교”

정각 스님은...1986년 송광사로 출가해 1987년 보성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0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한국불교 경전신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중앙대학교 객원교수, 중앙승가대 강사, 조계종 교수아사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중앙승가대학 겸임교수로 교육과 연구활동을 하면서 특히 불교 의례와 불교 문화재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스님의 대표 논저로는 〈납탑경전의 시대적 변천고〉, 〈지장신앙의 전개와 신앙의례〉 등으로, 총 16권의 저서와 20여편 이상의 논문이 있다.

‘스님’이란 명칭의 기원은?
오늘은 종교에 대한 의미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우선 관련 이야기를 하기 앞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죠. 몇 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된 사건이에요. 신부, 목사와 달리 절에서는 왜 스님이라고 부르냐며 ‘님’자에서 용어상 차별이 생기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명칭을 달리 불러야 한다면서 누군가는 심지어 ‘스’라고 부르자고 하더군요.
스님이라는 명칭은 어디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용어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1908년 범어사에서 출간한 〈권왕문〉입니다. 화주자 명칭으로 스님 한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하 승님’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중 승자인 ‘僧’에서 승님이 시간이 흐르면서 스님으로 바뀐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이와 더불어 스님을 일컫는 ‘중’이라는 한글은 1500년경 언해본에서 확인되죠. 중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신라시대에는 왕을 이르던 몇 가지 명칭이 있었습니다.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용어가 그렇습니다. 이중 차차웅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웅으로 변화되고 발음이 축소되면서 차충, 충, 중 등으로 변형됩니다. 고대국가의 왕을 칭했던 차차웅이라는 용어가 생략되면서 중이 된 것이죠. 〈화랑세기〉에 보면 차차웅은 무(巫), 무당을 뜻합니다. 무(巫)를 살펴보면 하늘과 땅을 잇고 그 옆에 사람 인(人)자가 위치해있죠. 하늘과 땅을 연결짓던 사람이 무당, 즉 신정일치국가에 있어 제사장이면서 정권을 가진 왕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가르침 중 으뜸되는 것=종교
흔히 세상을 살아가는데 추구해야갈 가치가 4가지 있다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첫째 진리, 둘째 선함, 셋째 아름다움, 넷째로 성스러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진선미를 바탕으로 등장하는 것이 성스러움의 가치입니다. 이 4가지 가치는 학문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형이상학, 인식론과 연결되고 선함은 윤리학, 아름다움은 미학,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학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는 곧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宗敎),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으뜸(宗)되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은 언제 어디에서 처음 사용되었을까요.
그 기원은 중국 수나라 때 천태종 창시자였던 지의 선사가 저술한 〈법화현의〉라는 책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종(宗)은 수많은 경전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며 교(敎)는 그 가르침을 언설, 글로써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화엄경, 금강경, 법화경 등 불교의 수많은 경전을 바탕으로 한 종교가 있을 수 있죠. 종파에 해당되는 것이 곧 종교였던 셈입니다.
종교라는 의미가 변색된 것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영향이 큽니다. 당시 1백여명의 일본 스님들이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온 후 종교철학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일본 근대불교의 중흥자라고 일컬어지는 스즈키 젠코가 영단어 ‘religion’을 종교라고 번역했습니다. ‘religion’의 re는 라틴어로 ‘다시’ ‘재생’이라는 뜻이 있으며, ‘ligion’이라는 말은 ‘연결하다’ ‘결합하다’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다시 연결한다’는 뜻이죠. 무엇을 다시 연결할까요.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야훼가 태초에 빛을 만들고 흙에서 사람을 만들어 아담과 이브를 탄생시켰죠.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 먹자 하늘에서 야훼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담아 너는 어디있느냐”
아담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앗쑴’이라고 답했습니다. 히브리어 앗쑴은 영어로 ‘여기 그리고 지금(here and now)’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기가 위치한 현 상황을, 사과를 따먹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기 그리고 지금’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죠.
여하튼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힘든 나날을 보냅니다. 어떻게 하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즉 관계성의 회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종교(religion)구요.

종교는 인간, 사랑과 떼놓을 수 없어
종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성과 여기라는 공간성 속에서 나는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인간의 인생에 있어 근본문제를 생각해보자 이거죠. 그 의문을 던지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의미가 될 것이며 종교의 의미 역시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 가운데 언제나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 자신의 움직임을 하나의 흔적으로 남기면서 오늘, 내일을 살아가고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겠죠.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인간이라는 단어 중 사람 인(人)은 땅에 손과 발을 딛고 기대어 있는 형상을 나타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두 명의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이 서로 의지해 서 있는 것이죠.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을 잘 표현하고 있죠.
즉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라고도 하죠. 사람과 비슷한 단어 중에 사랑이 있죠. 사랑이라는 말은 1461년 간행된 능엄경 언해에서 최초로 확인됩니다. 석보상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등장해요. 생각 사(思)자를 쓰고 사랑의 고어인 사량으로 번역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남을 보살펴준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아마 종교의 의미 역시 사람, 사랑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종교의 근본 의미를 한가지 더 말씀드리죠. 종교란 단어는 서구적 의미에서 미사라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금세기 유명한 종교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종교의 본질은 미사라는 용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미사는 ‘내몰다, 내쫓다’라는 뜻의 ‘미떼레(Mittere)’에서 유래됐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다시 파견하다는 뜻의 영단어 mission으로 변형됩니다. 즉 종교는 여기 머물지 말고 또 다른 삶의 지평으로 나를 내모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삶의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또 다른 삶을 향해 나아가게끔 나를 촉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종교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연민하는 마음 그게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면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자애로운 자(慈)와 슬플 비(悲)자를 써서 남을 위해 슬퍼할 수 있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연민은 과연 무엇입니까. 철학자 니체는 어렸을 적 여자 옷을 입고 여자아이처럼 자랐습니다. 여성적 감수성을 길러주기 위해 부모가 택한 방식이었죠. 어느날 니체는 마부가 말을 세게 채찍질하는 걸 보고는 마차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연민의 눈물이었던 거죠.
바로 니체처럼 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마음이 종교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힘겨워하는 소 한 마리를 보고 나는 과연 연민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하고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인이란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관세음보살을 수천번 외운다한들 남을 보는 시선 속에 연민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사람을 두고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삼국유사〉에 보면 관세음보살과 관련된 일화가 실려있습니다. 분황사에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그려져 있었던 듯합니다. 경덕왕 희명이라는 사람의 아이가 눈이 멀자 분황사 좌전에 있는 관세음보살 벽화 앞에서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천수천안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두 눈이 없는 내게 눈을 준다면 그 자비로움이얼마나 크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래를 읊자마자 아이 눈이 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눈 하나를 내줄 수 있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인거죠. 다음 두 편의 시를 감상해보죠.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어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이 시를 대하며 동체대비심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남의 슬픔 가운데 같이 슬퍼하고 타인의 고통가운데서 연탄 한 장이 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마음입니다. 종교인들은 연탄 한 장을 머릿속에 기억하며 신앙생활을 이끌어가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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