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필화·이기향 교수 부부

 

▲ 유필화(사진 오른쪽)ㆍ이기향 교수 부부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필화 교수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MBA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빌레펠트대학교의 초빙교수로 재직한 후 독일경영연구원 USW에 몸담았다가 1987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경영학 교수로서 후학을 키우고 있다. 현재 우리는선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기향 교수는 서울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예술학교를 거쳐 이화여대 대학원 디자인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디아나대 연극대학 방문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한성대 예술대학원 대학원장ㆍ의류패션산업전공 교수로 있다. 사진=노덕현 기자

미국 유학시절 함께 공부하며 독려
유필화 “불서 탐독으로 신심 키워”
이기향 “법륜 스님 강의로 불교 심취”
부부 일심동체 수행·신행도 함께
〈부처에게 배우는 경영의 지혜〉 발간
독일서 현대 불교사상과 예술 전파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수행을 하는데 도반(道伴)이 얼마나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앞 다투어 대답했다.
“절반입니다.” “삼분의 일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대답을 모두 듣고는 말했다.
“도반은 수행의 전부이니라.”
도반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던 부처님 말씀처럼, 도반은 우리가 만나는 인연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인연이다. 더군다나 부부가 도반이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금상첨화이며 부처님의 가피이자 행운이다.
서로 도우며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좋은 벗이란 뜻의 도반. 유필화 교수(61·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와 이기향 교수(60·한성대 예술대학원) 부부는 서로의 도반으로서 한길을 같이 가는 든든한 동반자이자, 애인이며, 때로는 선생님이자 친구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뚜렷한 입지를 굳혔다. 유필화 교수는 경영학 교재의 정석으로 꼽히는 30여 권의 책을 펴낸 한국을 대표하는 경영학자로, 불교적 시각에서 경제와 경영을 바라본 다수의 저서를 펴내 국내 뿐 아니라 서구 경영학계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이기향 교수는 탱화, 붓다와 보살, 단청과 같은 불교문화를 소재로 영상과 사진, 의상과 바디페인팅, 퍼포먼스 등 다양한 시도를 선보여 불교예술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놨다는 평을 얻고 있다.
보통 개인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배우자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감사하고 칭찬한 덕분에 지금의 자리까지 함께 올 수 있었다. 지금도 이 교수는 남편이 강의가 있는 날이면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갖다 준다. 유 교수도 아내가 전시와 학사일정으로 바쁠 때는 집안일을 거들어 서로의 편의를 봐준다. 이들 부부는 30여년을 늘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며 각자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힘든 유학생활 불교로 마음 달래
유 교수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불자였던 모친의 영향으로 그는 어릴 적부터 불교와 친숙했다. 중학교 시절 도선사 청담 스님과 보문사 정진 스님을 친견하기도 했다. 1972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9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유 교수 나이는 결혼적령기였기에 그의 모친은 아들에게 꼭 맞는 배필을 찾아 함께 유학길에 오르게 하고 싶었다. 결혼 할 때 한번쯤 배우자 궁합을 보듯, 유 교수의 모친도 지인들로부터 소개받은 세 명의 며느리 후보(?)의 사주(四柱)와 유 교수의 사주를 들고 한 스님에게 찾아갔다.
“제가 이 사람 어머니께 간택 받았어요. 아마, 부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시어머니는 부처님이 보내신 분이 아니었을까요?”

첫 만남에서 이 교수는 남편에게서 ‘아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점점 만날수록 남편의 순수함과 학문에 대한 열정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건전하고 합리적이면서도 좋은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유 교수라면 결혼해도 되겠다 싶었다. 1979년 6월에 혼인한 부부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이기향 교수의 집안은 불교였지만 스스로가 불자도 아니었고, 사실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만 해도 불교가 주는 이미지와 문화를 조금 촌스럽게 생각했다. 유 교수와 미국으로 떠날 때만해도 서양미술을 삶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7년 반 동안 생활하면서 한방 먹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인으로서 겪었던 정체성에 혼란이 왔죠. 한국에 대한 존재감은 없고 그들에게는 한국이 ‘Korean War(6.25 한국전쟁)’로만 알려져 있는 정도였거든요.”
이 교수가 불교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였다.
“남편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시어머니께 끌려가다시피 가서 불교 강의를 들었어요. ‘기초교리강좌’였던 것 같은데 법륜 스님이 강의를 하셨어요. 졸지 않고 들어본 강의 중 정말 최고였어요. 그간 고민하고 갈등하던 모든 문제의 해답이 거기 들어있더군요. 그걸 모르고 고통스러워 한 시간들이 너무 억울했어요. 유학가기 전 이걸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 생각이 들었죠.”

이 교수는 어려서부터 주변의 어려운 일에 감정이입이 잘 되는 편이라 눈물도 많고 연민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생활, 인간관계에서 오는 힘든 점도 적잖이 있었다.
그럴 때면 서재에 가서 남편이 즐겨 읽던 불서들을 펼쳤다. 신기한 것은 그때그때 마다 이 교수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해답들이 책 속에 있었다.
“부처님은 어떤 문제든 간에 그에 대해서 현명한 답을 주셨어요. 제가 갖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를 비롯해 환경·사회 문제 등 다방면에서 지혜의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불교밖에 없더라구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술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지금껏 달려온 이 교수는 예술을 하는 것이 좋고 멋지고 즐거웠지만 무엇을 주제로 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막연히 서양미술에 대한 열망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때 불교와의 인연은 이 교수의 뿌리를 바라보게 해준 큰 사건이었다.
부처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 이 교수는 1995년부터 개인전을 비롯해 국내외 의상 초대전, 패션쇼, 미술의상쇼, 무대미술, 연출 등 120여 차례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때마다 그가 소통하고자 한건 ‘불교문화를 이 시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서원이다.

▲ 이기향 교수가 2011년 불교여성개발원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열린 패션쇼 ‘춤추는 단청’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가 처음 자신의 전공인 의상 디자인에 불교를 접목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90년대 초,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표현하려던 중에, 모든 예술이 ‘행복’을 위한 방편이며 행복을 추구하는 데는 부처님 가르침만한 것이 없다는 데 결론이 닿았다.
처음에는 외로웠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출품 때도 겪었지만, 촌스럽다고 느끼는 불교를 최첨단의 패션에 접목시키겠다는 생각은 주변의 싸한 반응으로 되돌아왔다.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불교 색채를 드러냈어요. 스님들조차 조금 거북스러워 하셨죠. 연꽃이나 불보살이 그려진 옷을 입으면 불교를 가깝게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교수는 서양예술을 흉내 내느라 우리 것의 귀함을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럴 때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랬고, 경전을 모티브로 작품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이 교수가 옷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세련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부처와 보살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인간의 아름다운 인체에 부처님 이야기와 〈화엄경〉 〈법화경〉 등의 스토리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995년 열었던 국내 첫 개인전 ‘피안을 향하여’는 시어머니를 통해 처음 불교를 알았을 때의 감동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았다. 성지순례차 올랐던 인도 영취산에서의 환희심을 표현한 ‘영취산의 환희(1999)’,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를 모델로 한 ‘화(華)의 구도여행(2003)’, 〈금강경〉의 ‘공(空)’과 ‘색(色)’을 주제로 한 ‘我! 나 훔쳐보기(2008)’, 불교여성개발원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패션쇼 ‘춤추는 단청(2011)’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패션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시도로 국내는 물론 해외 유명 패션잡지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불교 진리는 모든 것과 통한다
미국유학 시절, 이 교수가 한국에 대한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을 동안 유 교수도 졸업논문에 대한 압박으로 스트레스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독서광인 그는 불교서적을 탐독했고, 당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원으로 유학중이던 박광서 교수(서강대 물리학과)와 교류하면서 숭산 스님과 화공 스님과 인연을 맺고 신행활동을 했다.
“다행히 박광서 교수가 인연이 있던 한국 사찰이 있어 그곳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상당한 마음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미 정착한 교민들과 유학생들과는 살아온 배경이나 문화가 달랐지만 불교라는 큰 그늘 아래서 함께 부딪힘 없이 신행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유 교수는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MBA를,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내로라하는 명문대학을 단 한 번의 늦춤도 없이 걸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불교와 그의 아내 이 교수의 역할이 컸다.
“아내가 있었기에 유학생활도 할 수 있었어요. 아내는 도반이면서 같은 길을 가는 가장 가까운 벗이랄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죠. 우리는 서로 사소한 것에도 고마워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추운 겨울 따뜻한 밥 한 끼 해주는 것조차도 고마워 하는거죠. 또 서로 칭찬도 잘해주고…. 이런 사소한 습관이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 유필화 교수가 지난 2004년 독일에서 열린 그의 저서 〈부처에게 배우는 경영의 지혜〉 독일어판 출판기념회에서 강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와 마케팅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업경영과 마케팅분야에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유 교수는 기업 등에서 매월 여러 차례 강연, 그리고 주요 언론사에 기고문을 통해 ‘불교경영’을 전파하고 있다.
“서양사상에 매달린다 해도 유럽과 미국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고, 동양사상에 접목하면 차별성을 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불교의 진리는 경제, 경영, 사회 전반 어디에서나 적용할 수 있죠. 저는 대학시절부터 30년 동안 경영학을 공부해오다보니 어떤 분야를 보더라도 기업경영을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임제록〉의 ‘수처작주(數處作主)’만 해도 그렇습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종처럼 회사 일을 하는 이 보다는 내 일처럼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길 바라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하면 불교의 가르침을 기업경영에 적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유 교수는 국내 기업들이 경영 이념을 정립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서구의 것을 좇아 왔기에 기업인과 종사자 할 것 없이 치열한 경쟁과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1세기 경영이념을 인간중심의 전통동양정신과 불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불교가 나라의 정신이고 불교문화가 나라의 문화였으니, 우리 정신문화에 맞는 경영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로 일본의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실제로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출가를 했는데, 직원들의 행복을 기업경영의 최고목표로 둔 훌륭한 기업인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불교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마인드가 약합니다. 미국 기업들은 직원을 쉽게 해고하죠. 우리나라 지식층의 80%가 기독교 신자입니다. 광복 후 엘리트층은 절대적으로 기독교 영향을 받았거든요.”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얻은 영감을 유 교수는 1997년 〈부처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라는 책을 펴냈다. 유 교수의 책은 2004년 독일어판으로 발간돼 서구 경영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때 부부는 명석한 혜안과 심미안을 조화롭게 선보였다. 유 교수의 독일 출판기념회에서 아내 이 교수는 불교적 메시지를 담은 무용 공연 ‘선향(禪香)’으로 서구인들의 갈채를 받았다.

교불련·우리는선우 등 신행활동도 한마음
유필화·이기향 교수는 나란히 교수불자연합회와 ‘우리는선우’ 등에서 활동하면서 몽골, 티베트 등을 돕는 일에도 동참하는 등 불교계에서는 유명한 부부 불자다. 그래서인지 신행활동도 열심이다. 유 교수는 10여 년전부터 참선수행을 하고 있으며, 매일 퇴근 후 집에 오면 작은 불상을 모신 법당에 삼배를 올린다. 이 교수 또한 매일 꾸준히 광명진언과 자비명상을 하며 마음을 비워낸다.
이 교수는 현재 우리는선우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남편을 도와 법회와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대중을 위해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간다. 한성대 불교동아리 지도교수를 10년째 맡고 있는 이 교수는 유 교수와 함께 우리는 선우 청년회를 만들어 청년포교에도 나설 계획이다.

“우리는선우를 세계적인 신행단체로 만드는 것이 당면과제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선우가 활성화되려면 기존의 회원뿐 아니라 청년들의 활동도 활발해져야 한다고 판단해 청년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현재 이들 교수 부부는 각자의 전공분야에 불교를 접목하는 일에 천착하고 있다. 니까야를 비롯한 빨리 경전을 재밌게 읽고 있다는 유 교수는 불교와 경영학 및 인문학을 접목한 책을 집필해 현대사회에 전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교수는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을 통해 한국미술사를 새롭게 써가고 있는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강우방 원장 문하에서 단청에 대해 심도있게 배우며 자신의 작품에 단청을 어떻게 체화시킬지 연구하고 있다.
이처럼 하는 일도, 해왔던 공부도, 그리고 사는 방식도 다를 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이 ‘불교를 통한 깨달음’이라는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 길에는 자비와 사랑이 배어난다.
한 번은 이 교수가 남편에게 애교스럽게 “다음 생에 나하고 또 만날 거예요?”라고 물었다. 유 교수는 아내의 질문에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가 지은 웃음의 의미는 2006년 출간한 그의 시집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에 실린 ‘웃음’이란 시에 잘 나와 있었다.

“나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또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된다는/… 〈중략〉 나는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어찌할 수 없이 웃음이 나옵니다/그러나 웃음이 그치면 어김없이 눈물이 흥건히 괴어있습니다/… 〈중략〉 당신은 참으로 고마운 분입니다/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소중한 선물을 주시고 가셨으니까요/나는 당신이 오실 때까지/ 그것을 고이 간직하겠다고/다시 한번 다짐합니다/그것은 눈물 어린 웃음입니다”

▲ 이기향 교수가 단청을 소재로 그래픽작업을 거쳐 만든 작품앞에서 부부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노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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