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 현대과학과 불교사상

모든 생명현상, 성주괴공 원리
무상은 찰나에도 변화하는 의미
연기 성품은 ‘空’, 色性空 성립

부처님 가르침으로 과학을 들여다보고 우주 만물의 성주괴공을 풀어 나간다면 현대과학 발전에 불교가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천체 물리학을 비롯하여 현대과학의 첨단이론과 불교사상의 접점을 불교 과학자들의 시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문명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찾기’에 나서본다. 〈편집자 주〉

오늘날의 우리는 뉴턴과 엥겔스 시대에 가능하였던 미숙한 자연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현대의 성숙한 자연과학이라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세계관을 마땅히 구축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아주 다르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 문명이 지니는 모순에 대해 그 반성적 기초를 지니고 있지도 못하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적 배경 속에서 서구 문명과 여러 면에서 그 맥락을 달리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세계관은 여타의 다른 종교와 달리 자연과학의 성과와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정합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물론 전 우주적 진리가 하나의 통일적 전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여러 표현은 물론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연과학의 세계상과 종교적 세계관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불교와 과학은 아주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불교의 궁극적 관심은 태어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안고 있는 존재론적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혹은 그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자연과학의 관심은 자연세계를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잘 응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나 주제도 무척 달라 보인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0세기 이후에 자연과학의 세계 이해의 성과가 불교의 세계관에 접근하여 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일체의 사물이 서로의 연관성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현대 과학의 성과 위에서 가능해진다. 이는 곧 불교에서의 연기론(緣起論)에 기초한 세계관을 자연과학이 예증해 주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한 사람이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세계상을 보거나 현대 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불교의 세계관을 볼 때, 이 두 세계 사이에 놀라운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큰 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을 때, 그 각각의 길이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길이 하나의 같은 산 안에 품어지는 것과 같다. 두 길을 따로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에 다다르기까지 그들이 같은 산을 오른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지만, 정상에 이르고 나면 같은 산을 올랐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불교와 과학은 산에 오르는 방법 자체를 아예 달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헬기를 타고 산 정상으로 가는 방법과 밑에서부터 한 걸음씩 걸어서 정상에 이르는 방법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찰나멸론, 현대물리학서도 성립

불교 전체를 표현하는 핵심적인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무상과 무아, 연기와 공이 될 것이다. 무상에서 시작해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제행무상’, 일체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다 변한다고 하셨다. 왜 그런지를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살펴보자.

우리나라에는 석회암 동굴이나 광산이 많은데. 이는 먼 옛날에는 그 지역이 바다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석회암은 산호나 조개껍질 등이 침전되어 고정되면서 만들어진 퇴적암이므로, 그 형성 시기에는 이들 지역이 조개와 같은 해양생물이 살 수 있는 얕고 따듯한 바다였다는 것이다. 히말라야나 알프스와 같은 고산 지역도 바다였다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밀어올린 게 알프스 산맥이고 인도-호주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이 충돌하면서 밀어 올린 게 히말라야 산맥이다. 이런 충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이들 산맥은 지금도 조금씩 높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는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 같은 생명체의 흔적이 퇴적암 층에 새겨져 있다. 이들 지형은 수십 억 년 동안 진행된 지구 생명의 역사와 지각 변동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생명체가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 공룡 같은 것만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생명종의 수는 역사상 지구상에 언젠가 존재했었던 생명종의 천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지금 보는 생명종의 천 배가 넘는 종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생로병사하는 개개의 생명체뿐 아니라 생명종도 진화하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적도에 있던 땅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바다가 되면서 지구의 모습도 변해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구의 자전이 멈출 수도 있고 태양의 빛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가 모두 성주괴공하는 무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짧은 시간 동안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긴 시간 동안에도 변화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긴 시간이란 짧은 시간, 즉 순간의 모임 혹은 순간의 지속이므로 순간적인 변화가 없다면 긴 시간에 걸친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뿐 아니라 찰라에 생멸하면서 변화한다는 의미도 또한 지녀야 한다.

인도의 논리학이 만들어 낸 이 찰라멸론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성립한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져 있고 원자핵은 다시 무수한 소립자로 이뤄져 있는데, 그 소립자의 수명은 100만분의 1초가 안 된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생성되고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소립자들로 원자가 만들어지고 그 원자에 의해 우리의 세계가 이뤄지니,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전의 모습과 같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찰라에 멸하고 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순간순간 변하는 우주, 찰라에 생멸하는 우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매순간 이뤄지는 소멸과 생성은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이 아니라, 미립자 전체의 긴밀한 상호연관과 상호의존의 맥락 위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과정의 한 단편이고 한 입자의 소멸이 다른 입자의 생성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과정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한 입자가 그대로 다른 입자로 변하면서 무언가가 그대로 지속되는 소박한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무아를 부정하는 일이다. 여기서의 윤회는 한 입자의 소멸이 다른 입자의 생성에 영향을 미치면서 분리될 수 없는 전체의 과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멸과 생성은 지속되는 하나의 사건도 아니고 단절된 두 개의 독립된 사건도 아니다. 소멸하는 입자와 생성되는 입자는 같은 입자가 아니면서도 이어지는 입자, 불일불이의 입자다. 그래서 윤회하는 무아, 무아의 윤회가 성립한다.

생과 멸이 이렇게 무한한 과정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체의 모든 것이 무아이면서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관되는 세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립자에서부터 원자, 분자, 세포를 거쳐 생명의 세계와 천체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상호 의존과 연관의 구조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 전체는 무아의 존재자들이 모인 무상의 세계다. 이 무아와 무상의 존재자들이 서로 연관하여 의존함으로써, 즉 연기함으로써 세상이 이뤄진다. 이 연기의 세계를 살펴보자.

연기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기적은 개개의 존재자에 없던 속성이 상호 의존과 연관의 맥락 위에서 새롭게 발현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소와 산소 원자로 물 분자가 이뤄지지만 각각의 원자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물 분자의 속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물 분자의 속성은 수소나 산소 원자에서 나온 게 아니라, 수소와 산소 원자가 서로 의존하고 연관되는 관계의 맥락에서 창발되기 때문이다. 이 창발의 과정 때문에, 원자를 이해했다고 분자를 이해할 수 없고 분자를 이해했다고 생명물질을 이해할 수 없으며 생명물질을 이해했다고 세포를 이해할 수 없고 세포를 이해했다고 생명체를 이해할 수 없다. 역으로 보면, 사회나 역사나 문화는 개개인의 행위로 환원되지 않고 생명은 세포로 환원되지 않으며 세포는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런 상호 의존과 연관의 연기를 경에서는 갈대의 묶음, 바퀴 등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수레, 목재와 풀과 볏집과 공간으로 이뤄지는 가옥 등으로 비유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퀴 등의 부분이 모여서 수레라는 전체를 이루지만, 수레라는 전체가 없다면 바퀴는 바퀴의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더 이상 바퀴라고 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퀴 등의 부분으로 수레라는 전체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각각의 부분은 수레라는 전체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각각의 부분은 전체를 이루는 다른 부분에 의지해 있을 뿐 아니라, 전체는 부분에 의지해 있고 부분은 또한 전체에 의지하는 구조를 지닌다. 그게 연기의 구조다.

이 모두는 각각의 요소가 모두 무아무실체이기 때문에 벌어진다. 92종의 원자가 모두 변치 않는 그 스스로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면, 세상은 92가지의 다양성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92종의 원자가 모두 무아무실체적이어서, 수소 원자가 산소 원자를 만나면 물이 되고 탄소 원자를 만나면 메탄가스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다양성이 가능해진다.

원자에서 분자, 생명물질, 세포, 생명체, 생태계를 거치면서 그 각각의 단계의 존재자들이 모두 무아이기 때문에 무한한 상호 의존과 연관의 가능성, 무한한 연기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렇게 모든 존재자가 무아무실체적이고 무자성하기 때문에, 그 모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모두 연기의 구조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연기하는 존재자의 성품은 그 자체가 공한 것이다. 이렇게 색의 성품 자체가 공하기 때문에, 색성공(色性空)이 성립한다. 따라서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뭔가 있어도 언젠가는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것도 아니며, 뭔가 존재하는 듯이 보여도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세계가 색이고 이상의 세계가 공이라는 것도 아니다.

공이란 존재자의 성품이 그 자체로 공하다는 것이어서 언제나 색과 함께 하는 공, 곧 중도의 공이다. 우리가 숨 쉬는 이 세계는 무아와 무상의 존재자들로 이루어진 연기와 공의 중도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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