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화엄산림법회 ‘여래명호품’-종범 스님(前중앙승가대 총장)

 정각은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

여래 명호의 수는 공덕 크기 의미

깨달음은 분별의 작용이 떠난 상태

망상에 사로잡히면 실상 보지 못해

꿈꾸는 줄 알고 탁 알아차려야

 

▲ 종범 스님은 … 중앙승가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으며 승가원 이사장, 삼보법회 교양대학 학장,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장, 조계종 개혁의회 의원, 행원문화재단 이사, 한국불교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불교를 알기 쉽게〉 등이 있다.

 불교에서는 늘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중생들은 그 막연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늘 꿈 꾸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고 거기에 매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중생들. 하지만 자신이 꿈꾸고 있는 줄 알고 눈을 뜨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종범 스님은 법문한다. 그래서 중생과 부처는 다르지 않다. 그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는 정각  

화엄경 중 ‘여래명호품’을 오늘 공부해보겠습니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정각을 말씀하는 경전이에요. 정각은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각을 이루면 정각지신이라고 해요. 바르게 깨달은 지혜의 몸을 얻는 것이죠. 이 상태는 바로 무념의 상태죠. 좋다 싫다 이런 생각이 끼어들지 않아요. 분별의 작용이 떠난 상태를 말하는 거죠. 진실의 모습, 진여실상처럼 바로 보는 것을 직조라 합니다. 그렇다고 깨달은 사람이 아픈 감각 이런 걸 못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게 지혜의 몸이고 지혜 광명이기 때문에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로 인생이라는 말이 있어요. 상대편의 생각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생각이 좋았어도 상대방이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해줘야 해요. 이 생각이 어디서 나왔느냐. 밤낮 없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생각의 근원은 마음에 있어요. 마음의 근원을 보는 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마음을 보아서 마음과 같이 항상 머무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이고 이를 정각이라고 하지요.

정각지신은 부모에게 받은 몸에 머무르지 않고 바르게 깨달은 지혜의 몸에 항상 머물러요. 보광이에요. 광명이 넓어서 부처님 있는 곳이 따로 있고, 없는 곳이 따로 있고 하지 않지요. 시방세계 항상 있는 부처님이 계시죠. 부모에게서 받은 몸은 아무리 잘나도 200년이 못 가지만 시방삼세 부처님은 항상 계세요. 부처님께서 영리해서 지혜의 몸을 얻었죠.

‘정각을 이루었다’는 비유로 화엄경 십지품에서는 ‘바다 같은 넓은 강물에 빠졌다’고 해요. 물에 빠졌으니 물에서 나가려고 죽을 힘을 다해 애를 쓸 거 아닙니까? 애를 심하게 쓰면 꿈에서 탁 깨게 되고 물에서 슬슬 놀면 꿈에서 못 깨죠. 꿈에서 탁 깨면 물도 꿈도 없는 거예요. 그 자리가 깨달은 세계죠. 생사가 없는 세계 이것이 바로 최고의 세계죠.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부처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현·문수 보살이 부처님의 세계를 이야기 합니다. 이들을 설주 즉 설법하는 주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시니 그 장소가 금강지, 즉 금강으로 된 땅입니다. 금강이 뭐냐 금강은 ‘부증불감’ ‘구경청정’입니다. 즉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항상 청정하다는 뜻입니다. 딱 깨보니 전체 세계가 부증불감 구경청정이고 연화장 사자좌에요. ‘무애’ 두려움이 없어요. 화엄에서는 온 법계가 연화좌고 사자좌예요. 그 땅이 견고하여 금강으로 이루어졌어요.

깨달으면 생각이 없어지고 지혜가 나와요.

정각을 얻으면 의식이 사라져요. 의식은 자기 경험에 의해서만 아는 허망한 생각이기에 망념이라고 해요. 정각을 얻으면 이런 의식은 싹 없어지고 지혜만 나타나요. 생각이 바뀌어서 지혜로 충만한 정각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이를 선각, 묘각, 정각, 원각, 대각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깨달음을 말하는 거예요.

이행은 있다 없다, 보인다 안 보인다, 지옥과 극락, 안다 모른다 이런 이분법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정각은 번뇌 망념이 다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법성계에서도 탐진치가 기본인데 계속 구하는 겁니다. 전부 의심하고 잘난 체하고 자기 소견 내고 화 내고 욕심 내고 이것이 아주 근본 망상이 되는 겁니다.

수행자의 망상에는 단망 망상이 있어요. 망을 끊고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죠. 이렇게 단망이 눈앞을 가리면 끊으려고만 하지 선각지가 안 나오는 거죠.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문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망을 끊고자 하는 생각이나 좋은 걸 구하고자 하는 생각이 녹아지면 식망상이라 합니다. 망상을 쉬는 게 됩니다. 이는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전부 망상입니다. 진여실상을 바로 보면 무념직조입니다. 오온이 다 공함을 조견하면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꿈 깨면 그만입니다. 생각 사라지면 그만이죠. 그런데 이게 참 문제입니다. 무엇을 생각해도 생각뿐입니다. 오직 근심걱정하는 생각뿐입니다. 그걸 부처님이 깨달은 것일 뿐입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습니다. 캄캄한데 저기 귀신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두려워해요. 불 탁 켜면 귀신 없어요. 불 켜기 전에 무섭고 오그라드는데 귀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에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자기를 괴롭히고 생각의 감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쁘다 생각하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아들이 아버지한테 뭐라 말했다고 화를 내요. 이때는 ‘말’이 문제가 아니에요. 아들놈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괘씸한 생각에 괴로운 겁니다. 같은 말을 손자가 하면 안 괴로워요. 말 자체는 손자가 한 말이나 아들이 한말이나 같은데, 아들한테는 기대를 많이 하니 내 생각의 괴로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걸 몰라서 괴로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도 죽음을 무서워하는 우리의 생각이 무서운 거예요.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무서워하고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집착해요. 삶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이 삶에 매달려 있는 거예요.

이런 두 가지 생각이 없어지는 게 정각입니다. ‘달 무상법’은 무상법을 통달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모양은 다르지만 본성은 다르지 않아요.

중생은 형상만 보는데 형상을 보면 이슬 구름 얼음이 다르지만 본성으로 보면 다 물이죠. 형상으로 보면 사는 모양이 있고 죽는 모양이 있고 전부 다 차별이에요. 물이나 비를 쫓아다니던 사람이 물과 비가 다르지 않음을 알면 무상법을 통달한 것이 됩니다.

무상법과 대지혜를 항상 가지고 활동하니 장애가 되는 곳이 없어요. 불을 봐도 화성이 공하다는 것을 아니 두려움이 없어요. 죽음을 봐도 죽음 자체가 진여실상임을 아니 장애가 없죠. 뜨거우면 뜨거울 뿐이고 있으면 있을 뿐입니다. 배고프면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감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전부가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입니다.

형상으로 보면 파괴되는 대상이 있는데 실상으로 보면 없어져도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얼음이 녹는다고 해서 물이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 몸이 죽는다고 해서 이 몸의 법성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몸의 본성을 모르니 괴로워하는 겁니다.

요즘 재수 없으면 100살 산다고 해요. 오래 사는 게 수복이라고 하지만 오래 행복하게 살려면 건강 돈 사람 3박자가 두루 갖추어져야 해요. 가난하고 병들어 혼자 사는 건 고독생 빈곤생 질병생이라고 해요. 하지만 건강, 돈, 사람 이 세가지를 갖춘 사람이 많지 않아요.

작년 인생은 금년 인생이 아니죠. 70 인생과 80 인생은 달라요. 인생무상은 항상 있는 겁니다. 작년 인생은 사라져 버렸어요.

 

 

꿈 꾸는 자와 꿈에서 깬 자

같은 방에 있어도 잠에서 깬 사람은 자기 집인 줄 아는데 잠자는 사람은 몰라요. 꿈에서 못 깨었으니 모르죠. 꿈 꾸는 사람은 자기 집에 있으면서도 자기 집이 아니라고 하는 그 차이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같아요. 정각을 이룬 후에는 같다는 말이죠.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같은 줄 모릅니다. 꿈 깨서 보면 잠든 사람이나 꿈 깬 사람 다르지 않아요. 우리가 정각 세계에 있는데 망념이 가려서 모를 뿐입니다. 그걸 가르치는 겁니다.

여래명호품이라는 것은 여래의 명호가 세계마다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말해 주는 거에요. 이름이 많다는 것은 활동이 많다는 것이고 실체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깨우치는 여래의 신업이 불가사의해요. 신업은 오직 중생제도를 말합니다. 여래명호가 여래출현과 여래의 공덕에 의해서 붙여지는 것입니다. 여래명호품이라는 것은 여래의 신업을 말하는 겁니다. 공덕업이 무궁무진한 겁니다.

여래명호품은 결국 이름이 많다는 것이고 공덕이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여래의 신업이 이렇게 무궁무진하는 것이죠. 정각신업, 신업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사성제품은 초기불교나 대승불교에서는 괴로움이 뭐고 어디서 생기고 없애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고 이런 설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바세계는 괴로움을 설명하는 용어가 다양해요. 여기서는 괴로움 자체를 설명하고 있어요.

화엄경은 전부 정각 세계를 설명합니다. 설법은 내용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깨우치기 위함입니다. 깨우치는 것, 선각지, 무이념, 두 가지 생각이 없는 데로 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뭐냐. 마음의 본성을 봐서 마음이 항상 머무는 것, 두 가지 생각 없는 무애자재함을 말하는 겁니다.

망념에서 벗어나는 게 깨달음입니다. 공부를 해 갈 때 망념이 일어나면 좋은 생각도 일어나고 나쁜 생각도 일어나는데 망념이 없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망념에 집착하면 혹은, 생각에 몰입하면 수행 마장이 됩니다. 깨달음의 장애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선각지, 무이념, 두 가지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게 삼세에 항상 머물러 시방에 널리 빛나면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방법이 공덕으로 가르치니 여래명호품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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