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28회-신라의 불탑(1)

선덕여왕, 분황사 모전석탑 조성
당나라 문화 창의적으로 계승
벽돌 이용한 고층 전탑
신앙심 표현·국력 위상 높여
부처님 출가일 열반일 맞춰
탑돌이 봉행 신라 풍속 고착화

▲ <사진1>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선덕여왕이 634년에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한 불탑이다. 안산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조성했다.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으로만 남아있으며 1962년 국보 제30호로 지정됐다.

분황사 모전석탑
‘모전석탑’이란 말 그대로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란 뜻이다. 이러한 모전석탑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전탑을 모방하거나, 전탑의 특징인 들여쌓기와 내어쌓기 양식을 모방한 경우이다.

‘분황사모전석탑’〈사진1〉은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이 재위 3년만인 634년에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한 불탑이다. 그 당시 돌을 다루는 석공들이 ‘안산암’이라는 돌을 일일이 벽돌크기로 다듬어 9층의 석탑을 이룩한 것이다.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한 선덕여왕은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대국의 문화라고 하여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선별하여 받아들이되 철저하게 신라문화와의 조화를 도모했다. 이러한 원칙은 불탑을 조성하는데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당나라 수도인 서안에는 벽돌을 이용한 고층 누각식의 전탑이 유행하고 있었다. 신라의 많은 유학승들은 목탑이 아닌 벽돌로 조성한 고층 누각의 불탑을 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아마 신라 수도 경주에도 중국의 고층전탑과 견줘 손색없을 정도의 불탑조성을 왕에게 제안했을 것이다. 비록 평지라 하더라도 9층으로 우뚝 솟은 불탑을 경주 시내에 조성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불탑을 예경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사진2〉 이는 불교에 대한 신앙심의 표현과 국력의 위상까지도 높일 수 있는 불사였기에 왕실에서 직접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사진2>분황사9층탑 복원모형
그러나 전탑을 조성하려면 양질의 흙과 벽돌을 구울 수 있는 풍부한 땔감, 그리고 벽돌을 말릴 수 있는 넓은 공간 등 몇 가지 환경적 요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벽돌은 돌과 비교했을 때 내구성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조성한 것이 신라 사람들이다. 이는 당나라 문화를 신라만의 방식으로 바꾼 창의력의 완성품이라 할 수 있다.

안산암은 화성암의 일종으로 화산이 폭발하면서 땅 속 깊은 곳에 있던 마그마가 지표면 가까이 솟아 나와 갑자기 식어서 굳어진 것이다. 색깔은 회색을 띠고, 내화성이 강하며 재질이 단단해 풍화에 잘 견딘다. 또 발달된 결 때문에 채석이 용이한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주도를 비롯하여 남부 해안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 <사진3>각 4면에 있는 감실 입구와 금강역사상. 감실안에는 후대에 조성한 입불상을 모셨다.
이러한 안산암을 이용한 분황사 불탑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단층 기단위에 화강암으로 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올렸다. 1층 탑신에는 4방에 돌로 여닫이문을 달고 그 안에는 불상〈사진3〉을 모신 예불공간을 두었다. 문 좌우에는 양감이 강조되어 사실적으로 표현된 금강역사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한쪽은 입을 벌린 공격자세의 밀적금강역사(아금강)와 맞은편은 입을 다문 방어자세의 나라연금강역사(훔금강)이다.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사자상이〈사진4〉 배치되어 있다. 탑에 사자상이 출현하는 것은 경전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이다. 558년에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가 한역한 〈대비경(大悲經)〉의 사리품(舍利品)에는 다음과 같은 경설이 전한다.
▲ <사진4>분황사 모전석탑 기단에 조성되어 있는 사자상.
아난아! 내가 열반한 뒤 앞으로 오는 세상에 북천축국에 기바가(祁婆迦)라는 비구가 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는 과거에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였기 때문에 대승(大乘)에 안주하였다. 그래서 그는 여러 중생을 가엾게 여기며 그들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보살장(菩薩藏)을 지녔고, 대승을 칭찬하고 널리 선양하였다. 또한 이 비구는 나의 사리와 형상과 탑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 이를 바로잡아 고치고 수리하여 황금으로 장엄할 것이다. 당(幢)과 번(幡)을 세우고 보배로운 지붕[寶蓋]에는 풍탁 같은 방울그물[鈴網]이 미묘한 소리를 낼 것이다. 여래의 한량없는 형상과 여러 탑을 조성하니, 그 모든 탑들은 모두 반달(半月)과 사자(師子)로 장엄하여 모든 하늘과 사람들의 무리로 하여금 마음에 믿음과 즐거움이 생기도록 할 것이다. (大正藏12, p.955, 중)

라는 내용이다. 이 경설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탑을 조성하고 사자로 장엄해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과 즐거움이 생기도록 하라는 것이다. 분황사 탑은 물론 백제 미륵사지석탑, 통일신라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4사자석탑 등에 사자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분황사는 향기가(芬) 나는 임금(皇) 즉 선덕여왕을 지칭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에는 '7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라 하여 전불(前佛)시대(부처님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부터 일곱 곳의 인연 있는 절터가 있는데, 천경림(天鏡林) 흥륜사(興輪寺), 삼천기(三川岐) 영흥사(永興寺), 용궁남(龍宮南) 황룡사(黃龍寺), 용궁북(龍宮北) 분황사(芬皇寺), 사천미(沙川尾)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 천왕사(天王寺), 서청전(胥請田) 담엄사(曇嚴寺)가 그렇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용궁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분황사와 남쪽에는 황룡사가 위치할 정도로 신라의 중앙정부에 버금가는 주요한 사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황사가 건립될 당시 주지는 신라를 대표하는 자장율사였으며, 뒤를 이어 원효스님이 이 절에 주석하였기에 그가 창시한 법성종(法性宗)을 분황종(芬皇宗)이라고도 한다.
▲ <사진5>1910년대의 분황사탑. 최소한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분황사의 불탑은 원래 9층이었다. 하지만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당하여 절은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가 되었고 탑은 최소한의 형태〈사진5〉만 유지된 채 일제 강점기를 맞이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15년 이 탑을 수리하였지만 복원에는 실패하여 현재는 3층으로만 남아 있다. 그 당시 2층과 3층 사이 석함(石函)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각종 옥류와 패류, 금은제 바늘과 침통, 가위 등 역시 함께 출토됐다. 특히, 중국 북제의 천보(天保) 4년(553년)에 만들어진 상평오수(常平五銖)와 송나라 때 만들어진(1102년경) 숭녕통보(崇通?)도 출토됐다. 이 같은 사실은 분황사 탑이 고려시대에 전면 보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탑은 1962년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륜사 불탑
문헌상 기록으로 신라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사찰은 흥륜사(興輪寺)이다. 흥륜사는 미추왕 2년(263)에 아도가 신라로 와서 천경림에 절을 세우고 흥륜사라 하였으나, 곧 폐사되고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 22년(535)에 공사를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한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진 흥륜사는 신라 불교에 있어서 매우 비중 있는 사찰로서 법흥왕과 진흥왕이 만년에 출가 수행한 절이기도 하다. 특히, 금당에는 아도(我道), 위촉(厭觸),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스님의 신라 10성을 모셨다. 이들 열 분은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며 정신적 지주들이었다. 이러한 흥륜사의 기록을 통해서 신라인들의 불탑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

삼국유사 제5권 김현감호(金現感虎)조에 의하면,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8일부터 15일까지 7일 동안 경주에 사는 남자와 여자들이 흥륜사에 모여서 전각과 탑을 돌면서 복을 비는 모임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음력 2월 8일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자 카필라 성을 넘어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출가일이 된다. 또한 2월 15일은 쿠시나가라의 두 그루의 사라나무사이에서 사자처럼 오른쪽으로 누운 채 열반에 드신 날이다. 7일 간격으로 있는 성도일과 열반일을 신라의 불자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종의 ‘불교도 주간’으로 정해놓고 신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흥륜사를 찾아 탑돌이 법회를 한 것이다. 탑돌이의 공덕을 잘 알고 이를 실천하고 있었기에 이미 신라의 풍속이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오늘날 경주 오릉의 북쪽에는 사적 15호로 지정된 천경림 흥륜사지가 있고, 지금은 흥륜사〈사진6〉란 명칭의 사찰이 운영되고 있다. 1910년대에 이곳에서 사찰의 금당터로 짐작되는 흙으로 쌓은 기단과 석불 등이 발견됐고, 이곳의 지명이 ‘천경림’ ‘흥륜들’이었기 때문에 큰 논란 없이 이 장소를 신라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지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나 1972년과 1977년 6월에 흥륜사지 발굴 작업이 실시되어, 이곳에서 ‘영묘사(令妙寺)’와 ‘영묘사(靈廟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한편 2008년 10월 경주공업고등학교 운동장 배수공사 현장에서는 ‘흥(興)’,‘사(寺)’,‘왕(王)’자가 적힌 명문기와가 출토됐다. 이로 인해 현재 흥륜사지로 알려졌던 곳은 선덕여왕이 창건한 영묘사이고 경주공고 자리가 흥륜사일 것이라는 설이 논란이 되고 있다.

▲ <사진6>천경림 흥륜사 전경. 신라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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