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뛰어넘어서 실천을 하는 데에 노력을 하라!

▲ 그림 최주현


한번 이해를 잘해 보십시오.
걸어오면서 한 발 한 발 없어지는데
뭐가 남아서 고가 있으며 뭐가 남아서 업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항상 이날까지 설법을 해 왔는데 이제는 여러분이 질문을 해서 서로 응대가 있어야만 알아지는 데 좀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오늘도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여) 큰스님! 질문 올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 선원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조금씩 체험이 되는 과정을 시나 글로 적어서 스님에게 몇 번 보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스님께서 “백지 편지를 써 보세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지 편지라는 편지 아닌 편지를 쓰기 위해 저는 한 일 년여를 몸부림을 치면서 참구에 참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들어가는 길은 천 갈래 만 갈래이지만 나오는 길은 한 길뿐이라는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참으로 경이로움의 세계였습니다. 여태까지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에 정말 정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선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까 ‘산은 산이다. 물은 물이다.’ 하는 그런 것이 나오는 길이 한 길임을 알고 나면은 무슨 별천지 세계가 벌어질 줄 알았던 그런 희망이 공부를 조금 더 해 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평상심,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그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기고만장한 세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법회도 조금 빠져먹고 옛날 그림책 구경도 조금조금 하면서 그럭저럭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 지원의 스님께서 질문을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는데 산이 산이 아니며 물이 물이 아니라는 그 말씀에 저는 멍해졌습니다. 그래서 산이 산이 아닌 도리, 물이 물이 아닌 도리를 참구하기 위하여 두 달여를 몸부림을 쳤습니다. 참구에 참구를 거듭하고 보이지 않게 피를 철철 흘리면서 문 아닌 문에 부딪치면서 너무나 답답한 가슴을 이길 길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헤매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증조모님 제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음식을 장만해서 제사상을 차리고 있는데 지방을 써 가지고 상 위에 탁 올리는 순간 큰스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큰 바다에 파도가 일어 한 줄기 물방울로 나투어진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옴이요, 파도가 멎어 물방울이 가라앉음이 가는 것인데 그 큰 바다에 하나가 돼 있는 조상을 어느 물이 내 조상이라고 붙잡고 늘어지려 하는가, 언제까지.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그 말씀이 딱 떠올랐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너무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느끼고 ‘아,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고정된 관념을 깨면, 증조모님이라는 그 고정관념만 깨서 절대의 바다로 보낼 수만 있다면 아, 그렇다면 그 절대의 바다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그 절대의 바다는 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됨과 동시에 상이 획 돌려져서 저를 향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증조모님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밥을 올리고 수저를 올렸던 그쪽의 상이 나에게로 획 돌아서는 그런 느낌이 들 때 저는 관념적으로 알았던, 이론으로 알았던 그런 모든 것보다 너무나 가슴이 시원함을 느끼면서 그 순간 번개같이 번쩍 번쩍 번쩍 그 느낌의 의식들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를 스쳐 갔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산이 산이라는 그 관념만 깨고 물이 물이라는 그 고정관념만 깬다면, 산으로 물이 흐르는 소식과 진흙소가 강물을 건널 수 있는 그 소식이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며칠이 또 흘렀습니다. 그런데 또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큰스님 말씀이 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법회에서 수없이 들었지만 무심코 들어 넘겼던 그 말씀이 그 순간 너무나 아프게 저를 찔러 댔습니다.

큰스님! 말로 할 수 없는 그 자리를 굳이 말로 이렇게 질문을 올려야 하고 대답해야 하는 큰스님의 고통을 정말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큰스님의 그 말씀, 떠오른 그 말씀이 도저히 제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절대의 바다마저도 마셔야 하고 마신 것을 토해야 하고, 토한 것을 함께 더불어 먹여 살려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 절대의 바다까지 오기에도 너무나 너무나 힘들었는데 그 절대의 바다마저 삼키고 토하고 더불어 먹여 살리라는 그 엄청난 도리를…. 가도 가도 너무나 막연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큰 바다 위에 한 방울의 물로 나투어진 저희들이 현상계에 머무는 이 짧은 기간에 그 엄청난 도리를 어떻게 하면 좀 쉽게 알고 갈 수 있을는지 큰스님의 높으신 법문을 바랍니다.

큰스님 우리는 지금요, 시공을 초월해서 살고 있어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살고 있다고요. 그런데 그것을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예가 여러분은 없을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산다. 넘어서서 산다. 우리가 정신이 아니라면 몸을 어떻게 이끌어 가겠습니까? 저 언덕이라는 그 자체가 바로 정신계거든요. 그리고 내가 항상 말했죠?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툰다. 고정된 게 없이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일거수일투족 그렇게 생활을 한다. 걸어오는 발자취가 앞으로 걷지 않았으니깐 없고 뒤는 자꾸 가니깐 없고, 현재에도 공해서 떠벅떠벅 떼어 놓고 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생활을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로 아까 말마따나 ‘물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이만하면은 아주 족한 것을….’ 하는 그런 말이나 똑같은 얘깁니다. 그리고 또 고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하고 이러한 뜻을 가지고 이렇게 실천을 하려고 애쓰고 가는 이 마당에서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또 천차만별의 만 가지 일을 연구를 한다 해도 손색이 없다. 지금 과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해서 발명해서 발표를 하고 이랬지만 이 부처님 법이란 아주 심오하고도 묘하고 광대하고도 무변해서, 즉 말하자면 내가 누구든지 하고 싶은 대로 그것이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거는 연구해서 되고 어떤 거는 안되고 이런 게 아니라 모든 거….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느 거 하나 건지지 못하는 게 없다. 왜냐?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도, 하다못해 물 한 방울도 안 돼 보신 분이 아니다 이거야. 물 한 방울조차 돼 봤던 분이기 때문에 물 한 방울에도 그 이름이 거기에서 솟아오른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그 천차만별의 이름들을, 천차만별의 모습들을, 천차만별의 마음으로써 연구하고 사는 그 모습들이 모두가 부처님 한마음에 들어 있으니, 그 마음 하나에서 다, 천차만별의 가지가 가지가지마다 거기에서 풀리고 나온다. 우리가 뭐를 한 가지를 연구해서 발표를 하고 발표를 해서 남들이 다 알게 하는 어떤 조그마한 걸 하나 만들어서 놓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본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살기 때문에 본래 정수에 컴퓨터로, 자동적인 컴퓨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거든지 능히 주어지니까 내 마음을 마음대로, 내 마음으로 마음대로 넘어서라 이거예요. 내 마음이 주저주저하지 말고 마음대로 넘어설 줄도 알아야 된다. 걸을 줄도 알아야 된다. 내 마음이 깊은 물 속에도 들어갈 줄 알아야 된다. 내 마음이 우주법계를 돌 줄 알아야 된다. 그리고 다섯 가지 오신통이라는 거를 그냥 굴릴 줄도 알아야 된다.

이 모두가 전체, 바로 그 도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그대로 합류화돼서 돌아간다는 수레와 같은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 거를 알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이 오신을 다 한데 합친 통을 굴려서 마음대로 적응하고 마음대로 연구하고 마음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문제도, 그것을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만 연구해서 내놓을 줄 알았지, 더 깊이 들어가서 정말 실질적으로 우주의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느냐 이런 문제입니다. 우주의 에너지는 건당 나오는 게 아닙니다. 우주에도, 이 우주 삼라만상에도 생명들이 꽉 찼기 때문에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1(여) 한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법당에 새벽에 와서 이렇게 앉아서 꽃꽂이 해 놓은 걸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아까 어떤 거사님은 화엄을 얘기하셨습니다마는 저는 거기에서 거대한 불바퀴를 보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언젠가 말씀하신 그 불바퀴가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각양각색의 색깔로 나투어진 그 큰 하나의 나툼, 그 어마어마한 나툼의 도리를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꽂으신 분이, 뭐 여러 가지 각자의 보는 차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마는 저는 큰스님께 무시이래로 물 한 방울도 보태짐도 줄어짐도 없는, 움직임도 없는 그런 언어도단의 자리이지만 그 자리의 나툼이 굳이 우리 현상계로 생각을 한다면, 감도 있으며 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 생각하면 아무 작용이 없을 것 같지만 무한한 작용으로 저렇게 나툼의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는 그 성품의 묘한 작용에 대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허허, 댁이 알아듣기만 하면 될 줄 알지만 그게 아니에요. 실천을 하는 데 그렇게…. 알고 있으면 먹어 봐라 하는 뜻이죠. 즉 말하자면 보고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는 말들은 모두 잘해요. ‘물이 컵으로 하나 가득 들어 있으니 이거를 먹어 봐라.’ 하고선 말들은 잘하시는데, 아무 말 없이 말을 하면서 ‘이거를 갖다 먹고 갖다 먹일 줄은 모르더라.’ 이런 말이 있어요.
물론 내가 잘났다는 사람 잘난 거 하나도 없죠. 못난 거든지 잘난 거든지 부처님께서는 일체를 다 다복하게 인연을 지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알고 보고 듣고 했다면 실천을 하라.” 실천을 하기 위해서 육조 스님은 십여 년을 노고를 했다 이거야. 그게 점수야. 면벽을 하는 것도 그냥 면벽을 하는 게 아니라, 세상천지에서 내가 나를 던질 줄 알고 행할 줄 알고, 늘일 줄 알고 줄일 줄 알고, 그렇게 굴릴 줄 아는 바로 이름 없는 이름이 돼야 되겠죠. 그러니까 하나하나 보살이 지금 그렇게 안다면 ‘마음이 뛰어넘어서 실천을 하는 데에 노력을 해라. 말만 앞세우지 말라. 알았으면 해 봐라. 길을 걸을 줄 알면 뛰어 봐라. 뛸 줄 알면 날아 봐라. 날아 보면 두루 돌아 봐라.’ 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 게재가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못났다 잘났다, 여자다 남자다 이걸 떠나서, 권세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이것은 마음공부니까, 하여튼 아무 말 없이 그냥 실천을 하나하나 해 나가 보세요.

질문자2(남) 스님! 이렇게 뵙게 돼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스님 뒤에 계시는 불상이 보기 좋아 선원에 다녔고, 그 다음에는 스님의 모습이 좋아서 선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솔직히 말해서 더디더라 그거예요. 왜? 모습과 상은 분명히 내 생각을 만드는 것뿐이고, 마음을 밝혀 주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되더라 그거예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계속 스님께서 설해 주시는 그 법문을 되뇌다 보니 ‘모든 것을 눈 뜨고 보는 것 이전에 마음을 봐라.’ 그 말씀이 생각이 나서 계속 마음으로 돌리다 보니까 지금은 뒤에 계시는 부처님 상과 앞에 계시는 스님의 모습 이전에 제 마음속에 있는 한 분의 스님과 제 마음속에 있는 한 분의 부처님이 생각이 나더라 그거예요.

그래서 그 마음속에 계시는 스님과 그 마음속에 계시는 부처님께 진심으로 계속 공양하다 보니 더불어 제 마음 또한 밝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데 제 스스로 그렇게 하다 보니까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이 제 상(相)을 떼는 그런 모습을 또한 느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저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정진해 나가고 있지만 그렇게 정진해 나가는 제 모습이 잘못됐다면 가르침 바랍니다.

큰스님 모습을 또한 무시해도 안 되죠. 허허허.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이 모습도 있어야 바로 상대성의 이론이 되니까요. 그래서 모습이 안 보여도 무효고, 또 몸이 만약에 죽는다면, 없어진다면 무효다. 정신만 있으면 남들이 보지 못하니 무효다 이 소리예요. 또 정신이 없으면 몸이 송장이 되니깐 무효고. 그러니까 정신과 물질과 둘이 아니게끔 이렇게 움죽거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대로 여여해야 된다 이 소리죠. 그러니까 이거는 만 가지를 들이고 내서 만 가지를 연구할 수 있고, 만 가지라는 숫자보다도 천차만별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 자체를 말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과학자가 한 가지를 연구한다면 마음공부 하는 분들은 만 가지 천 가지 천차만별로 다 할 줄 안다, 다 할 수 있다 이게 나와요. 그런데 내 마음 도가니 속에서 뛰어넘질 못해요, 여러분이. 마음도 몸뚱이 체 안에 딱 갇혀서 마음이 벗어날 줄을 몰라요. 내가 차 타고 가다가 말입니다. 아파트에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려 놨는지 몰라요, 돌아가면서 벽에다가. 그림을 이렇게 벽에다 그려 놨는데 넓게 보이게끔, 나무도 넓게 선 것대로 그렇게 잘 그려 놨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좋았는지 거기를 한번 들어가 봤어요. 여러분이 거기를 들어가 봤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생각하는 대로 철철 물 흐르는 바다였어요. 그리고 나무들이 우죽같이 들어서고 푸르르고 말이에요. 그것은 내 안에서 만드는 작업입니다, 순간. 그러니까 어느 어느 할 수 없는 일도 내 마음이 나를 수만 개로, 큰 일에는 수만 개를 내놓고 작은 일에는 조금, 거기 용도에 따라서 좀 던져 봐라 이 소립니다. 이 몸 안에서 옴쭉을 못하는 마음을 좀 툭툭 던져 봐라 이겁니다.

옛날에 어느 사람이 그랬대요. 병원에 가서 무엇을 잘라 내는데 그거를 마취를 하고 자를 수가 없다고 하더래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 앞에 나무가 우거진 그림이 있고 물이 내려가는 개천이 있고 배 한 척이 있고 그렇더래요, 그림에. 그래서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배를 타고 앉았었대요. 그랬더니 수술을 다하고 나서 깨우더래요. 그랬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무엇을 못하리까 하는 소리예요. 무엇인들 못하리까. 이 내 몸과 마음이 분리가 된다면 무엇인들 못하리까. 분리가 됐다가 같이 했다가 하면서도 그냥 분리되지 않고 이렇게,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고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내가 그렇게 많아서, 나 아님이 없는 것이 그렇게 많아서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또 꺼내서 쓸 때에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는다. 그 마음에서 큰 군사를 일으켜도 해당되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지금 과학자들하고는 정반대의 크나큰 부처님의 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 아무것도 아닌 건 줄 알지만, 지금 내가 생각을 한다면 너무나 크고 너무나 광대하고 너무나 묘한 도리가 돼서 사람들이 몇 생을 죽었다 깨어나도 그것을 보기가 어렵다, 하기가 어렵다, 느끼기가 어렵다 이런 겁니다. 이런 걸 지금 우리가 쉽게 이렇게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가 지금 어디 가서 있는지를 아십니까? 어디 서 있는 사람인지. 하치않은 스님도 될 수 있고 여러분이 생각 못하는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이건 가지각색으로 나투는 까닭에 어떤 거라고, 위에 앉았다 아래 앉았다, 천하다 고귀하다, 지위가 높다 이런 것도 묵살되는 자립니다. 그러니까 자유스럽죠? 때로는 아주 속상하고 갇혀 있으면 ‘아! 새처럼 좀 날아가 봤으면….’ 이런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자기는 자유로이 날아다닐 거 다 날아다니고 할 거 다 하고 이렇게 하니 구족하죠. 그러니까 함이 없이 그렇게 천차만별의 뜻을 가지고 하고 있다.

여러분이 지금 걸음을 걸어서 올라왔는데 걸어옴이 없이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걸어오는 사이가 없이 걸어왔습니다.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면서 걸어왔습니다. 그 당시 당시 없어지는데 뭣이 걸어온 자리가 있겠습니까? 한번 이해를 잘해 보십시오. 걸어오면서 한 발 한 발 없어지는데 뭐가 남아서 고가 있으며 뭐가 남아서 업이 있겠습니까? 이 마음 하나만, 아주 정말 시쳇말로 점프를 해서 내가 응용할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이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냥 지금이라도 벗어나서 한번 실험을 통해서 실천을 해 보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이런 말을 해도 알아들으실 수 있겠지만 전자엔 이런 말도 못했습니다. 알아듣질 못하니까요. 지금은 그래도 ‘마음을 벗어나서 던져 봐라.’ 이래도 알아들으실 수 있죠? 허허.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묘한 것입니다. 여름에 무척 무더워서 목욕을 좀 해야 할 텐데 바다가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한 찰나입니다. 물속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나오면은 땀이 다 걷힙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만날 고가 많고 업이 많고 팔자 운명이 있어서 만날 아프게 울고 발버둥치는 그런 삶을 볼 때 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여북하면 ‘고는 없다’ 이랬겠습니까? 사실은 고는 없는 거죠. 아까 얘기했죠? 일거수일투족 살림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걸어온 발자취 없어지듯 하거든요,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보면 딴 거 또 봐야 하고, 들으면 딴 거 들어야 하고, 이렇게 고정된 게 없이 자꾸 가 버린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붙을 게 뭐 있어서 고라고 합니까?

고라고 말씀하는 거는 여러분이 지어서 고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팔자 운명이라는 소리도 여러분이 지어서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이러는 거죠. 그거를 굴릴 줄만 안다면 내 팔자야 할 것도 없죠. 어떻게 생각하면 답답할 것도 없죠, 내가. 그냥 ‘물 흐르는 대로 흐르겠지.’ 하면은요. 하지만 나 아님이 없는데 딱 나로만 생각한다면 허, 조금 좀 그래요. 마음이 좀 그럴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요, 제발 좀….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맘대로 왜 못합니까? 왜 도가니 속에서 찌들려서 살겠습니까?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여러분은 그러시겠죠. “그럼 거기서 마음을 벗겨 내면 뭘 어떻게 하느냐?” 이러겠죠. 마음을 던질 줄 알고 마음을 벗어나게 할 줄 안다면 자기가 지금 생활하고 가는 그것이 모두 뭡니까? 지금 마음의 주인이라고 그랬는데 자기가 주인이 돼라 이 소립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서 자기 몸을 이끌어 가면서 이 모두를 행하면 함이 없이 생활을 하니 고가 없고 세상에 남이 뭐래도, 이 천지를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가 있는 겁니다.

옛날에 군사를 늘여야 할 텐데 늘일 수가 없거든요. 옛날이야기 책에 있었던 얘기인데 다 모릅니다만 ‘박씨 부인전’이라던가 뭐, 예전에 얻어들은 겁니다. 적군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를 해서 초당에 죽 둘러서 노간주나무를 심었죠. 그 이파리 하나하나를 군사로 다 만들었답니다. 그러니 그것이 딴 사람이 볼 때는 환상이지만 그냥 기함을 할 거 아닙니까? 그래 다 물러가더랍니다. 이게 방편 아닌 방편이다 이 소립니다. 책에 방편이라고 해 놓고도 방편 아닌 방편 이렇게 썼죠. 실천을 하면서도 그게 방편이고 방편이면서도 실천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큰가. 헤아릴 수가 없이 크죠. 마음이라는 그건 말로 헤아릴 수 없이 크죠. 그러나 말로 헤아릴 수 없이 작기도 하답니다. 그러니 일체 허공의 생명들의 마음이나 산하대지의 생명들의 마음이나 마음을 한데 합쳐서 좁쌀 알갱이에다가 전부 넣어도 손색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이걸 꺼내서 이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다 풀어 놔도, 좁쌀 알갱이에서 다 꺼내서 풀어 놔도 손색이 없다는 얘기죠. 이렇게 광대하고 무변한 도립니다. 이런데 생활에서 좀 굴려서 쓰시라고 이렇게 가르쳐 드려도 그 마음 하나를 딱딱 굴릴 줄 몰라서 그냥 벌어지는 일 다 벌어지게 하고 죽을 맛이 나 가지곤 나 죽겠느니 살겠느니 한단 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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