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 니체의〈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붓다’ 자평했던 니체
저서 〈짜라투스트라〉 통해
‘위버멘쉬’ 개념, 대중에게 전달

인내·관습과 대립·몰락 과정 거쳐
인간은 초인으로 거듭날 수 있어


▲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의 모습.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대표 저서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짜라투스트라라는 페르시아 현자의 문학적 부활을 통해 자기극복의 고통과 기쁨을 갖는, 자유정신과 육체와의 통일이 마련하는 건강한 미래의 인간을 제시한다.
“나는 유럽의 붓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에 붓다가 있다면 유럽에는 니체가 있다고 말이다.”
-니체 〈유고집〉-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하면 일반적으로 위버멘쉬(초인)의 철학자, 특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짜라투스트라)의 저자로 알려져 있듯이, 이 저술이 니체의 대표작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니체는 매우 압축적이고 간결한 언어 속에 많은 비유와 암시, 상징들을 직조(織造)하면서, 마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도 흡사한 설교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읽기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마치 손으로 움켜쥐어도 어느새 빠져나가버리는 미끄러운 물고기와도 같이, 그 본래 의도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또한 이 책은 니체의 사상적 편력의 원숙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이전에 쓰인 비중있는 작품들―특히〈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아침놀〉, 〈즐거운 학문〉 등―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는 점도 이 책에 대한 이해를 간단치 않게 만든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짜라투스트라의 토대가 되는 니체 사상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붙여보고자 한다.

니체의 인식비판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낯설고 혼돈스러웠을 것이며, 따라서 세계는 인간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인류가 언어를 발명하게 되자, 언어는 이윽고 세계에 ‘인위적’으로 질서를 부여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나아가 사람들은 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들인 개념, 이념, 정의, 논리, 공식, 이론 등을 고안해서 사용하면서 이에 매료되어 결국 이것들을 ‘진리’로 신봉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본래 ‘현상’을 표현하고 지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수단들을 ‘현상’ 자체보다 훨씬 더 높은 의미의 진리라고 여기는 전도(顚倒)가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언어적, 수학적 진리를 신봉하게 되면서 사물의 실상(참다운 진리)으로부터는 오히려 멀어지는 역설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니체는 특히 논리학과 수학, 자연과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논리학은 고대 이래로 진리획득의 규칙이라고 간주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태인 ‘사물들 사이의 일치’, ‘상이한 시점(時點)에 놓인 동일 사물의 동일성’ 등을 가정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개념은 전통형이상학의 실체(實體: Substanz)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데, 실체란 대상에 내재해 있다고 믿어지는,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근거 내지는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자체로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변치 않는 실체라는 것도 없다. 따라서 논리학이란 비논리, 즉 관념적 허구위에 세워진 자기모순적인 학문이다.

수학과 자연과학도 니체의 비판을 피해가지 못한다. “수(數)의 법칙의 발견은 몇 가지 동일한 사물이 있다는 오류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만일 애초에 자연에는 정확한 직선이라든가 진정한 원, 절대적인 크기의 척도 따위가 없다는 것이 알려졌었다면 수학은 성립조차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화학적 생성과정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일종의 기적으로 나타난다.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힘의 충격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단지 존재하지도 않는 순수한 사물, 즉 선, 면, 물체, 원자, 분할 가능한 시간, 분할 가능한 공간 등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이다” 〈즐거운 학문〉. 
 
도덕비판  
도덕이란 요컨대 행위에 대한 가치평가로부터 생긴다. 자신이나 남이 내린 가치평가를 받아들여서 행위의 기준이 되고 삶의 양식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 도덕이다. 그런데 도덕의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도덕은 대개 실용적, 상황적인 필요에서 시작되었거나 우연과 자의(恣意)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나아가 욕망, 증오, 질투, 악의(惡意) 등까지도 도덕의 형성에 참여했다.(〈즐거운 학문〉·〈도덕의 계보〉)

그런데 한번 생긴 도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면서 이상화, 절대화 되어 종국에는 인간 삶의 최고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날 인류는 도덕들이 생성되었던 오랜 과거의 상황들과는 매우 다른 상황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전승의 도덕은 여전히 사람들의 삶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도덕은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 삶에 부자연스러운 억제를 가함으로써 삶의 기형화, 평균화, 왜소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니체의 항의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계몽운동을 통하여 전승의 인식문화와 도덕문화 속에 들어있는 오류들을 찾아내어 극복함으로써 이러한 오류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고 니체는 선언한다. 이렇게 해방된 정신이 ‘자유정신(Freigeist)’이다.

위버멘쉬
자유정신은 〈짜라투스트라〉에 와서 ‘위버멘쉬(?bermensch: 초인[超人])’사상으로 발전한다.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정신(영혼)은 세 단계의 변화를 거쳐야 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가 되어야 한다. 낙타는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기존의 진리들에 대한 냉철한 재검토와 검증된 진리들에 대한 충실한 실천이 포함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정신은 ‘사자’로 변하여, 지금까지 섬겨오던 용(龍)에 대항하여 일전(一戰)을 벌인다. 용의 비늘들은 수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치’들, ‘너는 해야 한다’라는 가치들로 번쩍이고 있다. 사자가 되어 용과 싸운다 함은 전승의 가치들에 수동적,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던 태도를 버리고, 전통 가치들의 허구성을 꿰뚫어보고 무력화시킴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자주적인 삶의 범위와 역량이 증대되어 간다. 그러나 낙타의 단계를 통해서 충분한 역량을 기르지 못하면 용과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할 수도 있다.

용을 물리친 정신은 이제 세 번째 단계에서 몰락(沒落)하여 어린 아이로 변화한다. 왜 몰락인가? 어린 아이는 새로운 시작, 창조를 의미한다.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확립된 사회적, 문화적 관행, 규범, 권위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환경세계 속에서 형성된 자아(의식)도 벗어던져야 하므로 몰락(沒落)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치 다년생 초본식물이 겨울을 맞아 땅위의 부분은 죽었으되 봄이 되면 새순이 돋아나는 것과 같이, 새로운 존재방식이 시작되는 것이므로 갓난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몰락한 자아가 어떻게 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니체는 자아(Ego)가 영혼의 근본바탕이 아니며, 영혼의 보다 깊은 층위를 구성하는 자기(Self)가 있다고 말한다.

 “형제여, 너의 사상과 생각과 느낌의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그것이 바로 자기(Self)다. 이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바로 자기이기도 하다.”

니체는 서구의 전통적 이성개념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순수한’ 사고로서의 이성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사고란 언제나 육체, 감각, 욕망, 감정, 의지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각각 힘(역량)들로 파악되며, 이러한 역량들은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종종 각축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점차로 강한 역량을 중심으로 위계와 질서가 잡히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역량들이 통일적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신체(身體: Body)이다. 따라서 신체 자체가 커다란 이성, 즉 자기(Self)이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위버멘쉬는 자신의 존재의 근본바탕인 자기(Self) 안으로 몰락하여 온전히 자기가 된 위대한 영혼이다. 그는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자주적으로 의욕하고, 판단하며, 창조한다. 그는 더 이상 곁눈질하며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거나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판단을 철회하지도 않는다. 그는 온전히 자기 안에 머물러 있으며, 자신의 세계 안에서 산다.

니체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자기(Self), 즉 신체이성(身體理性)이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신의 영감을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서 자신의 깨달음의 체험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아, 올라오고 있구나.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나의 심연이 말문을 열고, 나의 마지막 깊은 곳이 백일하에 드러나는구나! 아! 가까이 오라! 손을 달라! 아! 놓아라! 아아! 메스껍다. 메스껍다. 메스껍다. 슬프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혼절하여 쓰러진다. 그가 다시 깨어난 지 이레 뒤에 영원회귀(永遠回歸)의 교설을 설한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저마다의 영혼에게는 저마다의 세계가 있다. 저마다의 영혼에게 다른 영혼들은 일종의 피안의 세계이다.”

니체와 불교
니체는 지상적(地上的) 삶의 긍정이라는 자신의 기본입장에 서서 불교를 염세주의적, 허무주의적 종교로 본다. 그러나 그는 말기 작품인 〈안티크리스트〉 등에서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도 불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

김영래/ 고려대 연구교수·한마음과학원 연구위원
기독교는 고통과 불만에 찬 하층민들 사이에서 자라난 원한과 복수의 종교인 반면, 불교는 상류 계층에서 생겨난 귀족적인 종교로 명랑, 평정(平靜), 무욕(無慾)을 추구하는 종교로 복수심, 반감, 원한을 멀리하는 가르침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니체의 불교관은 주로 그의 정신적 스승인 쇼펜하우어로부터 습득한 것이어서 주로 초기불교에 해당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완성한지 4년 뒤에 이태리의 토리노광장에서 혼절하여 쓰러졌고, 그 후에 니체는 다시는 정상인으로 살지 못하고 정신이상자로 10년여를 요양원에서 연명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이러한 니체의 비극적인 말년의 생애를 돌아볼 때, 니체가 서구인으로서는 전인미답의 길을 혼자서 걸어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났다면 면할 수도 있었을 파국을 맞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소회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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