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 놓고 침착하게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진짜 참선

▲ 그림 최주현

어떠한 문제든지 나로부터 이 세상이 생긴 거지 나 없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 바탕인 나의 주인공의 그 뜻을 가지고
일체 만법의 마음을 내면서 활용을 하시지 않습니까?

불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
질문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불법을 배워야 하는지요? 그리고 불법에 비추어 볼 때 인생은 무엇이며,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답변 우리는 불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를 모르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왜 살아가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고, 인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즉 불법은 우리의 인생에 목표를 밝혀 주고 길을 가르쳐 줍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부자유하고 그나마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아무도 원치 않는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인생이란 길어야 백 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때의 영화도 인생이 끝나는 때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막막한 허무감에 대해서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럴 때 인간은 누구나 다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 처자, 친지, 지인(知人)들도 자기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오직 자기 혼자서 감당해야만 할 짐입니다.

그런데 죽음만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삶에 있어서의 온갖 고통과 번뇌도 깊이 생각해 보면 누구든 자기 혼자서 그것을 견디거나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의 이웃이나 벗들, 가족들이 나의 고통과 번뇌를 덜어 주기도 하고 함께 나누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짐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산다는 것을 고(苦)라고 하셨습니다. 고란 사실 우리가 가장 즐겁고 기뻐할 그때에도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수많은 현인들이 깊이 느껴 온 인생의 밑바탕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그것 때문에 많은 생각을 했고,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남긴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생의 그런 실제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제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 성취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취된 삶은 고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이고 영원한 즐거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고이며, 인생의 목표는 그 고로부터 벗어나 부처를 이루어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지전능한 부처님의 능력

질문 경전에 보면 “나는 성인 가운데 다시 성인이며, 일체 세간의 아버지이니라. 이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이고, 그 가운데 중생 모두는 나의 자식이라. 나만이 능히 이들을 구호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보잘것없는 중생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능력은 제가 흉내도 낼 수 없는 차원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지전능한 부처님의 능력을 저의 삶 속에서 실천해 낼 수 있는 것인지요?

답변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 일체 아니 되시는 게 없고 나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평발 하나로써 모두 디뎠다는 것을 표현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현재 이렇게 나와서 이 세상을 다, 여러분을 다 건졌느니라 하는 뜻에서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고정됨이 없이 공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자리가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항상 같이 있느니라, 평등하니라 하는 뜻에서, 나오셔서 휘휘 둘러보신 겁니다. 일곱 발자국을 디딘 것은 그 평등한 실천궁행이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말입니다. 여러분을 빼놓고 무슨 부처님 법이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여러분도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돼서 인간으로 이렇게 나온 것이므로 부처 될 가능성이 99%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좋고 나쁘고 더럽고 깨끗하고를 알고 평등한 진리도 알기 때문에 99% 부처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 이하의 생명들도 청각이나 시각이나 후각이 아주 발달이 돼 있습니다. 그것은 물에서부터 구름으로, 안개로, 가스로, 복사체질로 변해 가지고 시각 청각 후각을 발달시킬 수 있는 그런 모든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어진 것은 부처님의 뜻도 있지만,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자기 한생각에 중생들이 모두 건져졌느니라, 이러셨습니다. 왜 건져졌느니라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새록새록 생각을 낼 수 있게끔 돼 있으니까 말입니다.

진리는 평등하고 예전에도, 부처님 오시기 전에도 진리는 있었죠. 그러나 우리가 먹어 보지 않고 해 보지 않고 보지 못한 것은 생각도 안 납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셔서 우리의 참스승으로서 우리한테 설하신 그 뜻이 헛되지 않게, 여러분이 뜻을 가지고 행하시는 그 마음이 진실하다면 바로 불제자의 가치가 있지만 여러분이 하나하나를 분별한다면 불제자로서 자격이 없는 겁니다. 내가 벌레 속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벌레의 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두 마음으로 분별하지 말고 침착하게 놓으세요. 모르는 사람을 본다면 과거에 내가 모를 때의 그 모습으로 보시고, 아주 차원이 높은 사람을 본다면 바로 배우기도 하고 ‘바로 내 마음속의 주인공 안에서 다 같이 하고 있으니까 그 뜻을 바로 알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주인공에 감사하게 놓는 겁니다.

그리고 ‘높은 거를 봐도 높게 보지 말고’ 하는 것은, 저 부처님도 내 형상이요 부처님 마음도 내 마음이요 부처님 생명도 내 생명이니 항상 위로는 부처님을 모시고 있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리드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살림살이하는 데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을 기르는 거와 같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뜻이 그런 거죠. 그러니 위로 부처님을 모시는 거하고 아래로 중생들을 이롭게 리드해 나가는 것을 싸잡아서 나는 주인공이라고 했다 이겁니다, 주인공! 어떠한 거든 높게 두지도 않고 낮게 두지도 않고, 또 주인공 안에는 일체제불 일체 중생들이 다 들어 있으니까, 항상 같이 혼합이 돼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고정된 게 없이, 붙들어 맨 게 없이 말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기초가 단단히 돼야만 이 뜻을 알겠기에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이란 이 우주 전체의 근본이며 그 근본이 인간의 마음에 직결돼 있다 이겁니다. 그걸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믿어야 합니다. 모두가 그러하니까요. 그래서 공생(共生)ㆍ공용(共用)ㆍ공체(共體)ㆍ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고 있는 사실이 진리니까요. 그리고 생활이 과학이니까요.
그래서 자기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거기에 놓아야 하는 겁니다. 병이 났어도 악업 선업이 한데 뭉치고 어머니 아버지의 몸을 받아서 이렇게 뭉쳐진 몸뚱이니까 내가 산 것대로, 인연을 지은 것대로 천차만별의 모습을 해 가지고 악업 선업이 뭉쳐서 나왔으니, 바로 거기서 나오는 거라면 거기에서 해결을 하게끔 놔야 되지 않나. 이렇게 믿고 거기다가 맡겨 놔야 되는 거죠. 아파도 거기다 맡겨 놓으시고 거기서밖에 해결 못한다는 믿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또 기쁜 생각이 있으면 ‘아! 감사하구나.’ 하는 뜻을 가져야 됩니다. 이 두 가지만 잘 아신다면 일체 다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악업 선업으로 뭉친 게 있어서 수없이 일어나는데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그걸 어떻게 해결을 하시렵니까. 조금만 해도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화가 불끈불끈 일어난다면 그게 화탕지옥에 속하는 겁니다. 보기만 하면 싸우고 아수라장이 되는 것도 바로 지옥입니다, 아수라지옥. 그러면 지옥을 어디서 갖다 주느냐. 안에서 일어나고 바깥에서 들어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바깥에서 들어오는 세균이나 영계나 유전성, 조상이 잘못됐다거나 하는 문제 등등을 어떻게 해결을 하시렵니까? 다 보이지 않는 데서 들이닥치는데 그걸 어떻게 해결을 하시렵니까? 안에서 인과응보로 인해서 일어나는 걸 또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 유전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안에서 나오고 바깥에서 들어오고 이러니 그것을 다 해결을 하고 내가 뜻을 이루려면 그렇게 놓지 않고는 아니 됩니다.

오온개공과 오분향례에 대해서

질문 저녁예불에 참석하면 오분향례와 반야심경을 같이 독송하게 되는데, 반야심경의 내용 중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안다면 일체 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이 핵심이라고 들었습니다. 오온개공과 오분향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답변 설법을 들으실 때에, 설법 아닌 게 없지만 해당치 않은 말이라고 해서 허술히 듣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귀머거리가 천둥 번개가 치는데 딴 사람이 천둥 번개 친다니깐 천둥 번개가 어딨느냐고 고집을 부리더랍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누구나가 다 이 오묘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해가 가게 하려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물질을 방편으로 써서 얘기할 수밖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서 우리 생활에서 이렇게 부합을 시켜서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전자에는 쓰고 배우면서 공부했지마는 지금은 쓰고 배우고 읽고 그래서만 되는 거는 아닙니다. 한생각을 하고 그것도 더불어 같이 한생각을 해서 우리가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마음 한생각에서 탐구하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간 자체가 고정됨이 하나도 없기에 ‘이 사대(四大)와 세상, 오온(五蘊)이 다 공(空)한 줄 알게 된다면….’ 하는 겁니다. 그거를 알게 된다면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이 뜻을 이미 몇천 년 전에 말씀하셨다는 게 너무나 감개무량하고 참 깊은 뜻이 있다는 걸 알 겁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그냥 ‘이건 부처님 앞에 정성들이는 소리다.’ 이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한번 생각을 하면서 탐구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계향’ 하면은 우리 스님네들만 계를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스님네들과 더불어 같이 있는 거지 스님네들 따로 있고 여러분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향 한다면은 질서를 문란치 않게 하는 마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정도에 넘치지 않게 하는 것. 일체 만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생활면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한생각 뉘우치면서 남을 원망하지 않아야죠. 가정에서나 내 몸으로나 밖으로나 모든 것이 계율에 어긋난 살림살이라면 그 살림살이는 벌써 어느 한 구석이 터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향’ 했습니다.
그런데 다섯 가지를 말씀을 하실 때에 끄트머리에 꼭 다 향, 향, 향, 향, 향 했습니다. 왜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한지 아십니까? 향이라는 것이 어떠한 데에 쓰는 것이 향이냐. 우리가 향을 피우는 것만이 향이 아니라 내 마음의 아름다운 향을 피우는 것. 종합해서 일체 만법을 행하는 데에, 마음 쓰는 데에, 뜻을 행하는 데에, 뜻과 행과 말이 한데 떨어지지 않는 행의 계율이 돼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서 ‘계향’ 한 것입니다.

‘정향’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사대와 오온이 전부 공한 줄을 알았다면은 일체 만법의 마음을 내며 일체 만법의 행을 하며 일체 만법의 눈을 뜨고 빛을 보며 또 일체 만법의 염파를 들으며, 또는 우리가 몸을 움죽거리면서 행을 할 수 있는 마음을 내며, 뜻을 가지는 모두를 겸해서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면 그 주인공 자체, 그 자신의 실상, 근본을 믿고 거기에다 일임해서 맡기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물러서지 않는 것을 말해서 ‘정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든지 나로부터 이 세상이 생긴 거지 나 없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 바탕인 나의 주인공의 그 뜻을 가지고 일체 만법의 마음을 내면서 활용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모든 것이 공했다는 걸 알고, 거기다가 놓고 일임하고 믿고, 거기서 전부를 다 지켜볼 수 있는 오관을 통한 감각, 이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우리 모두 공부하는 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또 ‘혜향’ 했습니다. 혜향이라는 것은 청각이나 시각이나 또는 미각이나 촉각, 지각을 한데 합쳐서 마음 근본에 모든 것을 놓고, 돌아가는 그 자체를 가만히 안팎으로 유(有)의 법이나 무(無)의 법이나 상황을 잘 판단을 해서 지혜롭고 능동적이게 마음을 쓰게 뒷받침을, 정향의 뒷받침을 해 주는 것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마음에 거기다 뒷받침을 해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혜향’ 한 것입니다.
‘해탈향’이라는 것은 우리가 전자에부터 수없는 억겁을 거쳐 오면서 진화되고 창조되고 또 창조되고 진화돼서 여기까지 올라온 인간이지마는 아직 50%가 모자라는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모든 것을 주인공에 일임하고 맡기고 믿고 지켜보면서, 모든 것은 이 허수아비가 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놔라 이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억겁에 걸친 업의 과보라든가 억겁에 대한 죄업이 얼기설기 다 묶어진 것을 풀게 하는 것이 해탈향입니다. 그러니깐 억겁의 업보가 풀리는 그 자체가 바로 ‘해탈향’의 뜻입니다.

그러면 ‘해탈지견향’이라는 것은 뭐냐. 항상 모두를 놓고 항상 밝아서 유의 법, 무의 법이 같이 밝아서, 내 생명의 근원과 마음내는 것이 항상 밝으니까, 이 육신도 밝게 행하게 되니까, 여러 가지로 다 밝아서 통달하고 보니깐 무엇이 거기에 걸릴 바가 있겠습니까. 걸리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해탈지견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 예불에 이 오분향을 스님네들이 항상 잊지 않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죠. 그것은 또 스님들만이 아니라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놓으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뜻을 반드시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 아리송해서 ‘그거 참 이상해. 우리가 어디서 왔지? 어디로 가지?’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것을 생각해 보면 알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항상 오분향(五分香)을 합니다. 항상 그것만 잘해도,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만 잘 알아도 우린 성불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순탄한 삶을 살아가려면

질문 십여 년이 넘게 절집에 드나들면서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도 업이 많아서인지 일이 꼬이고 꼬이고 해서 단 하루도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밝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답변 생각해 보면 한 철 요렇게, 한 생을 요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러 해를 다니면서 공부했다거나 짧은 시간에 내가 공부했다거나 이런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 해를 공부해도 ‘정(定)’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뭐, 10년 20년이 가도 소용없고, 소용없는 건 아니지마는 더디다 이거죠. 그런데 몇 달 안 됐어도, 몇 해가 안 됐어도 정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더디고 빠르고가 없다는 얘깁니다. 오래 배웠고 늦게 배웠고 이것이 없다 이 소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마음 안에, 마음이라는 것은 이름이지, ‘이름 없는 마음’ 여기에는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습니다. 이것도 이름해서 방편으로 부르는 겁니다. 항상 얘기해 드리지만,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어서, 거기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연방 그냥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려고 생각을 해도 어처구니없이 나쁜 일로 돌아가게끔 자꾸 만듭니다, 그렇게 업보에 입력이 돼 있어서. 지금 현실에서 아무리 착하게 행을 잘하려고, 말도 잘하려고 하지만 앞서 입력됐던 거 때문에 자꾸 그렇게 빗나갑니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빗나가든 빗나가지 않든 무조건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 이겁니다. 무조건 맡겨 놓는다. 믿지 못하면 맡겨 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고 거기다 맡겨 놓는다면, 쉴 사이 없이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데다가 자동적으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그 어마어마하게 입력됐던 팔자 운명이 그냥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입니다.

항상 해 오는 말이지만, 저에게는 절절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아주 지극하게, 눈물이 뼈에 사무쳐 나오리만큼 안타깝습니다. 어찌 그렇게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믿지 못할까? 어찌 그렇게 과거로부터, 수억겁 광년 전으로부터 자기를 끌고 온 장본인을 믿질 못할까? 이 모습으로 저 모습으로 이렇게 진화를 시켜 가면서, 자기가 한 대로, 자기가 한 것대로 끌고 다닌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죠. 주인공 원망할 수도 없지. 주인공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나? 아, 태양이 ‘너 잘못하고, 너 잘하고’ 이런 거 말했나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서 잘못돼서 행을 잘못하거나, 마음을 잘못 쓰거나 이런 것이 속으로부터 자꾸 나오면 그것을 ‘이러면 안 돼!’ 하고 거기다가 그냥 맡겨 놓는 거죠. 맡겨 놓고 침착하게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진짜 참선입니다.

나는 어떤 땐 차를 타고 가다가도 슬그머니 이 속에서 눈물이 복받칩니다. 여러분을 생각만 하면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남인데, 자기가 아닌데도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겠지만, 우리가 수없이 변질돼서 돌아갈 때, 이것이 됐다가 저것이 됐다가, 이 부모가 됐다가 저 자식이 됐다가, 이렇게 사생(四生)의 모든 천차만별의 생명이 뒤바꿔지면서 돌아갔을 때는 어떤 것이 내 자식이고, 어떤 것이 내 부모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렁이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습디다. 뭐, 풍뎅이도 그렇고, 가재도 그렇고, 물고기도 그렇고 어떤 거를 막론해 놓고 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어요. 남녀가 있고요. 그런데 그 남녀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잘 산다 하더라도 연방 변질이 되고 연방 바뀌어서 돌아가니까 어느 때 어떻게…. 그 행복도 잠시 잠깐이죠, 알고 본다면. 그러니 그 돌아가는 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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