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진짜로 진실하게 믿어 보세요

진짜 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나고 잎과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놓을 데 없는 데다가 놓을 게 없는 것을 놔라 하는데
진실히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깊이 잘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생각해서 넘길 일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고등 동물이라고 해서 벌써 90%, 그거를 알면 90%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지마는 벌써 부처라고 이름해 놨는데 육신으로 산다면 중생이 사는 거고 마음으로 산다면은 바로 부처니라, 법신이니라 했습니다. 근본 마음으로 인해서, 또 시쳇말로 자가발전소의 에너지를 자기가 자유스럽게 쓸 수 있다면 바로 불(佛)과 법(法)이 둘이 아니어서 자유인으로서의 각(覺)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옛날처럼 낚싯밥이나 던지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게 앉아서는 도저히 우리가 생활 불교로서 이끌어 갈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부처 되기 이전에 부처 된다 안 된다, 또 앞으로 내가 부처가 될 거다 안 될 거다를 떠나서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앉아서, 어떤 사람은 법을 설할 때에 법상을 놓고 한다는데 나는 앉은 데가 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같이 법상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법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흙에 앉아서도 법상이 될 수 있고, 법상에 앉아서도 그 법이 한데 떨어진다면 그것은 법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전자에 석존께서는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봐도 이끌어 주셨고 두 사람을 봐도 이끌어 주셨고 또는 뙤약볕에 앉아서, 할 수가 없을 때는 뙤약볕에 앉아서도 그대로 설하시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심중 깊이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믿는 것은 오직 자기의 깊숙한 마음, 그 주인공뿐입니다. 깊숙이 주인공을 진실로 믿으면서 ‘세상이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니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바로 주인공, 내 주인공이 제일이지.’ 모든 그 마음이 공했을 때에 공생(共生)의 그 능력이 나에게 공심(共心)으로 돌아와서 공행(共行)을 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바로 그 액을 공식(共食)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물질적인 약만 있는 게 아니라 물질이 없는 액 자체, 그 에너지 자체의 약이 있습니다. 무의 세계에서 공식하는 거, 유의 세계에서 공식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무의 세계에서도 물질이 보이지 않는 무체액, 그 자체가 바로 공해서 공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거를 먹어야 되겠다.’ 하기 이전에 자동적으로 ‘당신이 모든 거를 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하고 있으니까.’ 할 때 그것이 바로 자동적으로 컴퓨터처럼 벌써, ‘내가 아픈 데 공식하고 있다.’ 고 생각하니깐 벌써 그 약이 들어오겠죠.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을 때에 바로 쌀이 들어옵니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것을, 유의 법 무의 법이 그렇게 무궁무진한 것을…. 그래서 무의 법으로서의 체가 없는 액이 나에게 주어질 때는 사흘을 굶어도 배고프다고 지지하게 쓰러지지 않을 거예요. 또는 어떤 거라도 먹게끔 다 들어오기 때문에 굶을 필요도 없는 거죠. 왜 굶어요? 주인이 심부름꾼을 시킬 때에 굶겨 가면서 심부름 시키는 거 보셨습니까? 그렇게 떳떳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허허바다처럼, 청정한 그 바다처럼 엔간한 똥물이 들어가도, 엔간한 흙물이 들어와도 뒤집힐 필요가 없고 끄떡없이 금방 가라앉고 조화가 되고 그러죠. 그런데 조그마한 연못, 우물에는 들어가면 그냥 활랑 뒤집히죠. 금방 가라앉았대도 또 뒤집히죠. 그러니까 마음을 넓게 쓰시고 항상 주인공에서 나온 거, 공에서 나온 거 공에다가 놔야 되겠다 하는 믿음을,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진짜로 진실하게 깊숙하게 믿어 보세요. 싸움할 것도 없고 괴로울 것도 없고, 굶었다고 배고플 것도 없고 내가 발버둥치지 않아도 바로 스스로서 가져온다 이겁니다.

질문자3(여) … 의정을 내는데요, 제가 선택을 아직, 처음이 돼서 잘못하는 것 같아요. 어떤 거는 너무 많아서 어떤 걸 선택할지, 또 의정을 내다가 해결이 될 때도 있지만 안될 때는 또 딴 거로 밀고 나가는데요, 어떤 길을 선택해야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십시오.

큰스님 보살님은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러시는데 오신 지 얼마 안되는 분들은 찬찬히 자주 나오시면서 자꾸 질문을 하시고 그러세요. 그런데 꿈도 꿈이고 현재 생시도 꿈입니다. 저 달이 말입니다, 강에 비쳤다 이겁니다. 강에 비쳤을 때에 그 강에 비친 달은 하늘에 있는 달과 둘이 아니면서 그림자예요. 내가 지금 몸뚱이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내 모습을 내가 마음으로 요렇게 생겼고 내가 요렇게 있다 하는 걸 알고 그것이 바로 잠재의식 컴퓨터에 책정이 된 겁니다. 그래서 꿈을 꿀 때는 항상 그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나가서 하루 온종일 살다가 들어왔는데도 한 시간도 안 됐더래요, 온종일 살았는데. 꿈에서는 하루 온종일 살았답니다. 그랬는데 저녁에 밥 얼른 달라고 그러는 바람에 깨 보니까는 한 시간밖에 안 됐더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은 자기가 마음으로 자기 모습을 지어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돌아다니는 일은 지금 육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거하고 모습 없는 모습을 가지고 다니는 거하고는 빠르기가 여간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서도 없으니까, 진실은. 그러니 이 육신을 끌고 하루 종일 산 거하고 꿈에 한 시간을 산 거하고 차이가 얼마나 납니까? 그래서 꿈을 꾼다고 하는 것도 모두, 생시나 꿈이나 자기의 모습이 다니는 거니까 자기에다 놔라 이겁니다. 진짜 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나고 잎과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거기다가 그렇게, 놓을 데 없는 데다가 놓을 게 없는 것을 놔라 하는데 진실히 믿지 않으면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생시에 만나면 일가친척이고 누구고 간에, 애들의 친구든지 내 친구든지 또는 어떤 회사든지, 상업을 하는 사람이든지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데 거기서 만남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만나는 사람마다 나하고 저 사람하고 각각 보니까 상대가 생기죠? 그러니깐 업보를 짓는 겁니다, 상대로 보니까. 우리가 여여하게 살면서도 상대를 마음으로는 둘로 보지 않아야 그게 업보가 되지 않는데, 업보에 끄달리지도 않을 거고.
현실에 끄달리지 않는다면 꿈에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고 이것도 꿈이요 저것도 꿈이라면 꿈에 또 끄달리질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면 내 진짜의 마음 그 자체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억겁을 거쳐 오면서 별의별 모습을 다 가지고 자기가 살던 그 습성이 모습과 함께 자기한테 자꾸 나타나는 거거든요. 짐승이 와서 나한테 덤볐다, 또는 뱀이 나한테 덤볐다, 꽃이 화창하게 핀 걸 봤다, 또 무슨 도둑이 들었다, 강도가 들었다, 강도가 나를 죽이러 쫓아다닌다 이런 문제들이 여간 많지 않죠. 그리고 또 꿈에는 훨훨 날아다니는 사람도 있고요. 그러한 문제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죠. 콩 심어서 콩나무가 났으니까 그 작년 콩은 없어진 거죠, 아주. 없는 거죠. 그런데 미생물이 있기 이전부터, 또 미생물이 생겨서 오기까지 그것이 수백 수천 년 수만 년 그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을 거쳐 오면서 여기까지 왔어도 온 사이가 없다는 얘깁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 억겁을 거쳐 나온 바로 그분들이에요. 그런데 생각으로 살던 그 습이 남았단 얘깁니다. 짐승으로 다니던 습과 천차만별로 거쳐 온 그 습이 남았단 얘깁니다. 살아온 것이 자기 마음의 컴퓨터에 쟁여 있으니까 그것이 때로는 습에 의해서, 인연에 의해서 자꾸 인과응보가 돼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나오는 대로 그냥 주인공에 모두가 둘이 아니게 놓았을 때에는 다 녹아 버립니다. 인연법에 의해서 그 인과응보가 다 녹아 버리고 유전성이 다 녹아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습성을 기르지 않았더라면, 기르려고 그래서 기르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날까지 오면서 습성을 놓고 왔더라면, 지금 현재에 놓고 가는 건데, 그대로 여여하게 놓고 가는 것을 홀연히 깨달았다면, 억겁을 거쳐 오면서 이날까지 그 습을, 남은 것도 없고 앞으로 또 쟁여질 것도 없고 전자에 쟁여진 것도 없고 이랬을 텐데 아니, 마음으로 지어서 습에 의해서 그냥 착착 쟁여 놨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면서 어머니 만날 때 아버지 만날 때, 이런 일 할 때 저런 일 할 때 나투어서 돌아가듯이 그런 업보도 인연 따라서 올 때에, 그렇게 자꾸자꾸 나투면서 지은 것이 진화…. 그래서 ‘발이 없어. 발이 없으니 어떻게 되지?’ ‘아니, 내가 네 발로 걸어다니기보다 서서 다니는 게 편리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진화력이거든. 그 생각에 의해서 진화되는 거지 몸뚱이로 다니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돼요. 여러분도 다 꽁지 떨어진 자리가 있다고. 방뎅이 좀 보라고요, 꽁지 떨어진 자리가 없나. 이 세상의 모두가 다 그렇게 거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모습을 마저 벗기 위해서, 끄달리지 않고 마저 벗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나오기만 하면은 큰 고(苦)든지 작은 고든지 고는 고니까. 만약에 깨달으면 고가 아니지만 깨닫지 못하면 고예요. 항상 고예요. “나는 뭐 ‘고’ 될 것도 없어. 그저 모든 걸 주인공에 맡기고 놓고 사니까.” 이렇게 말들은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진짜로 깨닫지 못해,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속상한 일이고 자꾸 끄달리죠. 그런데 한 소식을 얻은 사람들은 금방 일어났다가도 금방 가라앉습니다. 금방 일어났다 금방 그냥 가라앉아 버리고 없어지죠. 그런데 그렇게, 깨달은 거하고 한 소식, 뭐 한 소식이라는 게 두 소식이 있고 세 소식이 있어서 ‘한 소식’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과정도 우리가 애 적이 있고 젊을 적이 있고 늙을 적이 있듯 한 몸이 그렇게 자꾸 변해서 가듯이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도 두 소식이 한 소식이고 세 소식이 한 소식이 돼야 됩니다. 그 한 소식마저도 없어서 내세울 게 없어야 열반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계단 없는 계단을 걸어야 하고 걸을 게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다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담선법회를 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나만 정말 약 팔게 해야 됩니까? 허허허, 물건을 어떤 걸 드릴까요?

질문자4(여) (청취 불능)

큰스님 그런데요, 이건 잊지 마십시오. 모든 의정은 안으로 굴려야지 바깥으로 질문해서 알아서는 아니 됩니다. 알려고 질문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하는 사이 없이 하라 이겁니다. 자기가 질문을 한다 하더라도 그건 질문한 사이가 없어. 한 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으니까 그대로 무심으로 하라는 얘깁니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질문을 하고 책을 보되 책을 보는 사이 없이 보라 이겁니다. 그런다면 하나도 걸리질 않아. 질문을 해도 걸리지 않고, 또 안 한다고 ‘안 해야 되겠다.’ 해도 걸리는 거고 ‘해야겠다.’ 해도 걸리는 거니 모든 걸 무심으로 돌려라 이겁니다, 주인공에. ‘모든 걸 주인공이 하는 거고 내가 거기 첨보됐으니 그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고 바로 생활이지.’ 이렇게 하고 걸리지 마세요. 질문을 하더라도 걸리질 마세요. 그대로 한 거지 뭐, 한 거 없이 한 거지. 말씀하세요.

질문자5(남) (청취 불능)
큰스님 콩으로 드는 방법, 콩나무하고 같이 드는 방법 이런 것이 있죠. 그래서 유의 법 무의 법을 다양하게, 만법을 응용해야 된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런데 뭘 그렇게 무겁게 짊어지고 다녀서 무겁소? 세상에 아무 건덕지도 붙을 자리가 없고 붙일 자리도 없는 것을.
그렇다면은 여여하게 그대로 자기의 그 진실함 속에서 스스로 샘물이 터져야, 생각하는 놈하고 생각 내기 이전 놈하고 같이 상응이 돼야 그때는 ‘아이고, 이거 무거운 줄 알았더니 무겁지도 않고 가벼운 줄 알았더니 가볍지도 않고 그렇구나.’ 하는 웃음이 나올 수밖엔 없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스승 아닌 참스승이 자기를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니 무겁다 가볍다, 이 두 마디가 다 아니면서 아니라는 것도 아닙니다.

질문자6(남) (청취 불능)
큰스님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걸로 봐서요, 지금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 선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한다.’ 고 그러겠지마는 작은 것이 있기 때문에 큰 것이 있고 큰 것이 있기 때문에 작은 게 있고, 또 주춧돌이 있어서 기둥을 세울 수 있는 거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남이 어떻게 됐든지 모두 여러분이 그저 홀연히 참자기를 계발해야 하고 또 깨달아야 할 것 같아서 서슴없이 이런 말을 합니다. 때에 따라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지켜본다는 얘깁니다.
즉 말하자면 무심으로써 자기가 진실히 자기를 믿으니까 그렇게 하죠? 이런 말이 있어요. 인천에 사는 어느 분이 있는데요, 그분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가엾어서 안됐는데 영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쪽에는 얘기도 없이 내가 그냥 해 놓고 내가 지켜봤습니다. 아, 그러니까 글쎄 이튿날 그냥 툭툭 털고 취직할 데를 마련해야겠다 그러면서 술집에 온 겁니다. 이젠 다 나은 것 같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속으로 주인공한테 ‘주인공, 감사합니다.’ 이럭하고선 감사하게 생각을 했답니다. 그러고 만나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무슨 말을 했느냐면 “아이고, 이젠 병이 나았으니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할 텐데 취직 좀….”

그래서 ‘당신이 취직도 하게 하는 거지, 뭐. 저 사람 주인공이나 내 주인공이나 둘이 아니니까 내가 이런다면 저 사람 주인공도 둘이 아닌 까닭에 잘 끌고 취직도 시킬 거다.’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나흘 만에 인천에 뭔가 하는 데 취직이 됐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공부가 됐다고, 그 사람이 잘됐건만 자기가 술을 한 잔 사 주고 싶더랍니다, 고마우니까. 자기 공부 되는 거니까. 자기 공부 대상이 됐거든, 실험 대상이 됐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렇게 실험을 해 보니 나도 좋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좋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게 다 보살행이 아닙니까? 자기는 나쁘게 되고 남은 좋게 되고, 또 나는 좋게 되고 남은 나쁘게 되고 이런다면은 그건 보살행이 아니고 중생들이 하는 행동인 겁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우리가 생각을 안 해 보고 연구를 안 하고 행을 해 보지 않는다면 늘지를 않아요. 그리고 뚫리질 않아. 이거는 보석이려니 하고 가만히 두면은 그게 줄든지 늘든지 그러질 않아요. 잘못되든지 잘되든지 한번 해 보면은 잘못되는 거 잘되는 거를 알게 되거든요. 안되어도 자기 법, 돼도 자기 법이라. 그래서 그분이 하는 소리가 나의 실험으로써 잘해 나갔는데 어느 때는 그렇게 안되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스님께서 안되는 것도 법이라더니 요놈, 되는 것만 법이냐? 안되는 것도 법이라는 걸 모르느냐?’ 요렇게 생각을 하면서 ‘주인공이 날 가르치느라고 그러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또 너무도 감사하더랍니다. 들고 나는 거, 안되는 거 되는 거 모든 것을 거기다 감사하게 믿고 놓으니까는 너무 좋더랍니다. 스스로서 자기가 벌써 생각을 하면 알게 되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 생각을 해 보니까는 내일 모레 감사가 나올 것 같더랍니다. 감사가 나오는 걸 알게끔 되니까 미리미리 착착 준비해서 감사에 걸리지도 않았다지 뭡니까. 그러니까 자기한테 닥칠 거는 벌써 착착…. 누가 움죽거리지 말라나요, 생각하지 말라나요? 생각하는 것도 움죽거리는 것도 다 공해서 돌아가는 거고 자기 실상이라고 해도 그 자리를 믿지 않으니까 그렇죠. 그렇게 해 나가면서 장부를 척척 해 놓으니까 뭐 걸릴 것도 없고, 와서 보자기를 풀어서 턱 내놓으니까 그냥 그냥 된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생활 불교는 그대로 여러분의 진실한 생활에서 움죽거리는 법입니다.

옥수수나무도 올해 바람이 많이 불고 폭풍이 일어날 것 같으면 뿌리를 깊숙하게 박아요, 그 해에는. 그렇게 알고 하는데 인간으로서 어떻게 앞으로 닥칠 거를 자기가 튼튼하게 해 놓지 않습니까? 물이 쳐들어올 텐데 내가 어떻게 둑을 쌓아 놓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아주 역력하게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사시라고 이런 공부 하라고 그러는 거지, 귀신 마구니로 살라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중생으로만 고집하지 마세요.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바로 중생입니다. 이 몸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부처를 어떻게 찾습니까? 그리고 남한테도 어떻게 물건이 있어야 보이죠? 부처님께서도 저렇게 물건으로 보이게끔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물건으로 보이게끔 해 놓고 움죽거렸기 때문에 부처님을 저렇게 모습으로 모셔 놨지 않습니까. 저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부처고요, 움죽거리면 법신이에요. 여러분도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없습니까? 가만히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때는, 무심으로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때 부처예요. 그리고 생각이 났다 하면은 법신이고요. 일어나서 움죽거린다 하면 화신이고요. 그러니 여러분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 행하기에 달려 있고, 마음 씀씀이를 넓게 쓰는 데 달려 있고 좁게 쓰는 데 달려 있으니 좁게 쓰면 업보가 더할 것이고 넓게 돌려놓으면 업보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1986년 1월 19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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