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27회- 백제의 불탑(3)

부처님 광명 영원하길 빌며
정림사지 5층탑 조성
웅장함과 동시에 균형미 자랑
예경하는 이들 신심 견고히 다져
백제 흥망성쇠 지켜보며
멸망당시 훼탑 수모겪기도

정림사지5층탑
백제시대에 조성된 ‘정림사지5층탑’〈사진1〉은 지난 호에 알아본 ‘미륵사지석탑’과 경주의 ‘분황사모전석탑’과 더불어 현존하는 3기의 삼국시대의 불탑 중 하나이다. 그 가운데서 유일하게 원래의 층수를 유지하고 있는 불탑이라는 점에서 정림사지5층탑은 큰 의미가 있다.

▲ 정림사지5층석탑. 국보 제 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8.3m 높이로 웅장함과 동시에 균형있는 체감비를 자랑한다.

백제 사람들은 불탑이 있는 사찰을 조성할 때, 3탑3금당의 미륵사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문, 목탑, 금당을 일직선으로 배열하는 1탑1금당식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경우 사리를 봉안한 목탑이 높은 위용을 드러내며 사찰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림사지 5층석탑의 경우는 금당 앞에 목탑 대신 석탑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잦은 전쟁 등으로 인한 사찰화재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의 특성 때문에 ‘영원한 예경의 염원’이 담긴 목조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백제인들은 이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안을 찾아냈다. 돌로 불탑을 조성할 수 있다면, 화마를 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탁악세의 온갖 고난이 존재하는 중생계에서도 부처님의 광명인 석탑이 영겁을 지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미 백제에는 미륵사지3탑 중 2기의 탑을 돌로 조성한 백제 장인들의 경험과 축적된 기술이 있었다. 정림사지석탑은 이 모두가 합쳐 조성된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정림사지석탑은 목탑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미륵사석탑과는 달리 독특한 양식의 5층석탑을 이루고 있다.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불탑은 총 높이가 8.33m로 웅장함과 동시에 균형 있는 체감비를 자랑한다. 여기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은 탑에 예경하는 이들에게 저절로 신심을 견고하게 한다. 그러나 이 석탑을 조성할 당시의 사찰 이름은 사료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알 수 없어 아쉬움이 들게한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660년 이전에 조성되었다는 사실과 고려시대에는 한 때 절 이름이 ‘정림사’였다는 것 정도다.

660년 이전에 조성되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는 탑의 1층 탑신에 당나라의 권희소(權懷素)와 하수량(賀遂亮)이 지은 ‘대당평백제국비명’〈사진2〉이라는 제목의 비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 정림사지석탑 1층 탑신의 비명. 660년 이전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중문을 통과하여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방향으로 사면에 조각 된 약 1800자의 내용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제목으로 시작하며, 본문 서두에는 ‘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 洛州河南權懷素書’란 내용이 있다. ‘현경 5년 8월 15일 세우고, 하남 낙주(洛州)의 권회소가 쓰다.’란 내용인데 현경5년은 당나라 연호로 660년을 말한다. 즉, 660년 8월 15일 건립하고 권희소란 사람이 글을 썼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지난날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학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이 탑을 ‘평제탑’ 혹은 ‘소정방기공탑’등으로 불려졌던 웃지못할 문화적 왜곡이 있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 의하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서 백제의 의자왕은 660년 7월 13일 수도였던 부여에서 공주로 피난했다가 3일 후인 7월 16일 부여로 돌아와 항복하면서 약 700년간 지속되어온 백제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어떻게 5층의 석탑을 조성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발달된 최첨단 장비를 이용한다 해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석탑의 무게를 지반이 지탱하려면 땅을 깊이 파서 판축을 해야 하는데 이 기간만도 수개월이 걸릴 수밖에 없다. 백제 사람들이 도성 중심부에 불심의 상징으로 조성하였던 사찰의 불탑에다 정복자의 횡포로 훼탑행위의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물론 별도의 승전기념탑을 세우고 그 앞에 탑비를 세워서 탑비에다 같은 내용을 새겼거나, 세울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는 글의 내용 때문이다. 제목에서 ‘대당평백제비명’이라고 명시하였듯이 비명이란 탑비문, 순수비문, 기공비문, 능묘비문, 신도비문, 사적비문, 사묘비문, 정려비문, 송덕비문 등에 산문으로 된 서(書)와 운문으로 된 명(銘)이 있는 것을 말한다. 내용에 의하면, 권희소는 서를 쓰고 하수량은 명을 지은 것이다.

이러한 하수량의 글 중에는 “대저 동관(東觀)에 기록하고 남궁(南宮)에 기록하는 것은 그 선행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이정(彛鼎)에 새기고 경종(景鍾)에 새기는 것은 그 공(功)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최소한 4군데 이상에 같은 내용의 글을 새겨 놓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실제로 부여 관북리 왕궁터에서 물을 담아 놓는 석조(石槽)가 발견 되었는데, 정림사5층탑에 새겨진 내용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현재 이 부여석조는 부여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사진3〉되어있다.
▲ 부여석조. 정림사지석탑에 새겨진 비명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글의 말미에 ‘간자보찰용기수공(刊玆寶刹用紀殊功)’이란 글이 있는데, 보찰(寶刹)은 탑찰, 찰주 등과 같이 불탑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탑에다 새겨서 특별한 공을 기록한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원래 있던 탑에 급히 글을 새겨놓은 증거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중국과 일본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하여 이러한 탑을 당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탑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편, 탑신의 비명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업적을 스스로 칭하는 기공문이라 잘못 알려져 ‘소정방기공탑’이라 인식된 적도 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대총관(大摠管)소정방 뿐만 아니라 부대총관(副大摠管) 유백영(劉伯英), 동보덕(董寶德), 김인문(金仁問) 3인외에 양행의(梁行儀), 축아사(祝阿師), 조계숙(曺繼叔), 두상(杜爽), 유인원(劉仁願), 김양도(金良圖), 마연경(馬延卿)등의 당나라 장수와 신라 장수들의 행실과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명의 내용으로 ‘소정방기공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일제 강점기인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이 절터에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있는 기와조각을 발굴하였다. 태평 8년은 1028년으로 고려 현종 19년이다. 즉 이시기에는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 이후 ‘정림사지 5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불탑 중에 기단과 탑신부분이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의미 있는 불탑이다. 이 탑을 조성한 백제인 들이 지어준 원래의 사찰 이름을 찾는 불사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본다.

군수리사지 목탑
사적 제44호로 지정된 부여 군수리에 백제시대의 사찰 터〈사진4〉가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인 1935~36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굴조사를 실시한바 있다. 발굴책임자는 이시다 모사케(石田茂作)였으며, 이후 ‘부여군수리폐사지발굴조사(扶餘軍守里廢寺址發掘調査)’보고서를 발표했다.

▲ 사적 제44호로 지정된 부여 군수리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사찰 터.

조선총독부는 이곳을 왕궁이 있던 곳으로 생각했으나 탑의 심초석(心礎石)과 불상이 발견됨으로써 사찰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중문, 불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조성 된 ‘일탑일금당식’ 의 백제 조탑 방식이 최초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목탑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사각형 기단의 고층누각식이였다는 사실만 추측 될 뿐 외형적인 모습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부여에서 발견 된 사택지적비편(砂宅智積碑片)의 내용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금을 뚫어 불당을 건축하고 옥(玉)을 다듬어 불탑을 건립하니 높고 높은 그 모습은 신비한 빛을 발하고…’ 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수도 부여에 높고 화려한 모습의 목탑들이 즐비한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목탑지의 기단 아래에서는 금동보살입상〈사진5〉와 석조여래좌상〈사진6〉, 금가락지뿐만 아니라 1,150여 점에 달하는 옥기류가 출토 되어 목탑 조성 당시의 놀라운 불탑신앙의 면모를 확인 할 수가 있다. 일설에 의하면, 백제와 일본의 교류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칠지도가 함께 출토 되었다고 하나 보고서에는 그 내용이 생략되어 있어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다음 호에는 신라시대의 불탑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은 높이 11.5cm 의 금동 불상이다. 구리로 만든 후 도금했으며, 보물 제330호로 지정되어있다.
   
▲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329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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