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가 일임해서 놓고 믿어라!

▲ 그림 최주현

만약에 내가 독불장군으로서
그냥 ‘내가 했고, 내가 살고, 내가 모든 걸 줬고, 내 것이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 이 물건 이 색(色)이, 내 몸 육신이 나라고 산다면
그렇게 나라고 했으니 수많은 생명의 능력은 한꺼번에 한마음에 들어 주지 않습니다.

사회자 금주 법회부터는 담선법회식으로 진행하니 모든 불자님들께서 생활상이나 혹은 공부하시는 가운데 여쭐 말씀이 있으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우리가 한 손바닥만을 쳐서 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양쪽 손바닥을 쳐야 이 소리 저 소리가 나고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서부터는 담선법회를 하겠습니다. 내가 서두를 꺼내죠. 물론 마음을 깨닫고 안 깨닫고를 떠나서 나 역시도 여러분이 밥을 배불리 먹고 자유스럽게 살게 하기 위해서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담선법회로써 서로서로 대화를 해 가면서 길을 가는 이 진리를 이해를 해야 믿는 것도 철저히 믿을 것 같습니다. 자기로부터 이 우주 천하가 생겼다는 것도 알고요, 자기로 인해서 모두가 있다는 점도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로 인해서 생활도 조화를 이루고 화목하게 갈 수가 있는 거고 또 사회적으로 나가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모든 게 내 한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그 점. 그런 게 실감이 안 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담선법회로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하는 이런 도리를 취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도리를 취하는 것은 길을 가는 데에 손목을 잡아 주고 이리로 가야 된다고 일러 주기는 하지만, 바로 가서 느끼고 맛을 알고 먹어 봐야 안다는 그 점은 본인이 해야 하지요.
하지만 마음이 좁고 넓고를 말할 때에 넓은 강은 구정물이나 더러운 물이나 똥물이나 다 들어가도 들어간 사이가 없겠지만, 좁은 물에는 구정물이나 똥물이 들어가 한번 뒤집히면 가라앉기가 어렵습니다. 가라앉는다 할지라도 조금만 건드리면 금세 구정물이 되고 떠오릅니다. 적은 물 큰 물, 이것을 비유해 볼 때에 우리 마음이 지혜가 넓으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러지만, 또 이해만 해서도 아니 되고 공(空)에서 나오는 걸 공에다 다시 놓을 수 있는 그 지혜력, 지혜가 없다면 허공에도 바늘구멍 하나 안 들어가듯이 그렇게 좁은 물밖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큰 물과 같이 구정물이 때에 따라서 들어가거나 흙물이 들어가거나 똥물이 들어가도 그것을 그대로 슬기롭게 넘길 수 있는 그런 사랑과 도의, 의리를 포함해서 지혜롭게 맡겨 놓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대천세계(大千世界)의 강물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서부터 담선법회로써 우리가 서로 토론해 봅시다.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여) 부처님의 말씀을 다 이해는 못하겠는데요, 제게 현재 어떤 사건이 생긴다면 그것이 과연 흔히 듣고 있던 어떤 인과에 의해서 그런 것이 생기는 것인지요. 그리고 그것이 전생의 업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요. 그러니까 현재가 과거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되는지, 그리고 전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큰스님 이렇게 밝고 밝은 세상에 그것을 이해를 못하시면 안 됩니다.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나와 있는 사실은 아마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유전공학이니 뭐니 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지내면서도 그것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고정된 관념이 없고 고정된 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렇게 짤막짤막하게 한 토막씩 찰나찰나 넘어가니깐 그렇지,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바로 일생, 칠십 평생 팔십 평생 넘어가는 이 때에 우리는 그 물에서 떴다가 그 물에 가라앉을 뿐입니다. 가라앉았다 뜨고 떴다가 가라앉고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인생이 그런 거밖에는 안 됩니다. 떴다 가라앉고 떴다 가라앉고 하는 그런 동안에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어저께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오늘까지 울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거를 비유해 보십시오.

내가 잘되겠다고 일을 했는데 그것이 안돼 버리고 망했을 때 그렇게 자기가 저질러 놨기 때문에, 엊그저께 저질러 놓은 일이 오늘에 닥치니까 막 울죠? 그리고 이렇게 망할 줄은 몰랐는데 망했다고 남을 원망하고 저 사람으로 인해서 이렇게 망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업을 지어 놓고 자기가 받는 거죠. 그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진화를 해서 우리가 모습을 바꾼다고 하는 창조력은 우리가 금방…. 요거를 이해를 해 보십시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어머니를 만났을 때에 어떠한 생각이 듭니까? 어머니 만났을 때 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딸의 행동과 딸로서 말이 나갑니다.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남편에 의해서 말이 나가고 행동이 나가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럼 어머니 만날 때하고 남편 만날 때하고 찰나에, 내 마음은 전체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그 행까지도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생활 불교로써 이끌어 가려니까 이렇게 내가 말을 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서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에 뛰어든 것입니다.

옛 선사들처럼 낚싯밥을 던져서 하기 보다는 그냥 여러분하고 뛰어들어서 같이 죽을 쑤든지 밥을 쑤든지 같이 앉아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칠십 평생 팔십 평생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어머니 만날 때의 그 모습하고 남편을 만났을 때 그 모습은 변화가 돼 가는 것입니다. 찰나여서 자기 자신들은 변한 거를 모르지만 시계 초침 하나 똑똑똑똑 가는 대로 변화돼 가는 것입니다. 금방 엄청나게 변화가 돼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변화된 걸 모르고 갈 뿐입니다. 찰나찰나 나투고 가는 것이죠. 화(化)해서 자꾸 변화되어 가는 것이죠. 그런데 어머니 만날 때에 말과 행과 마음이 동시에 융합이 돼서 무심으로 그냥 무행을 했는데, 그렇게 한 자체와 칠십 평생이나 팔십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 또다시 이 세상에 나는 것이 순간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칠십 평생 팔십 평생, 백 살을 살다가 죽든지 애 적에 죽었든지, 죽어서 다시 태어나서 인연 따라서 또 만났다 할지라도 그 순간, 어머니 만날 때에, 즉 말하자면은 그 삼합(三合)이 동시에 움죽거려서 자기가 행을 하는 거.

남편 만날 때에 또다시 그것이 홀딱 바뀌어서 아내로서의 생각이 들고, 딸로서의 생각이 들거나 며느리로서의 생각이 드는 거. 며느리로 살다가 금방 아내로 살았어. 이것을 바로 윤회라고도 하고 인연법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한번 축소해서 생각을 해 보시도록 하고요, 모르시면은. 우리가 그런 게 존재하느냐고 하는데 진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자기가 저질러 놓은 것은 자기가 받게 마련이니까요. 지혜가 있다면 다 놓을 수 있고 굴릴 수 있고, 지혜가 없다면 바늘구멍도 안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좁은 마음은 그걸 능가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이, 어머니 만날 때도 내가 만났다고 하고 남편 만날 때도 내가 만났다고 합니다.

벌써 시계 초가 하나하나 갈 때마다 내가 변화된 거를 모르고 있을 뿐 벌써 딸이 됐다가 남의 집 며느리가 됐다가, 금방 남의 집 남편이 된 그 사이가 찰나인데…. 그것을 우리가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또 한 번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사는 걸로 비교를 해 보십시오. 축소를 하면은 앞서의 그게 되고, 만약에 대의적으로 따진다면은 죽고 또다시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사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진화나 또는 모습의 진화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에 이렇게 자유스럽게, 아까 얘기했듯 어머니 만날 때의 마음과 아버지 만날 때의 마음, 동생 만날 때의 마음이 이렇게 아주 묘하고 자유스럽게 무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깐 우리는 90%가 부처라고 합니다. 왜 90%가 부처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벌써 부처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자기 부처를 우습게 생각하고 남의 부처만 부처인 줄 알고 위대한 것만 위대하게 보고 낮은 건 낮게 보고서 아상을 높이고 권세를 부리고 또는 버리고 얕게 보고 이러는 까닭에 우리는 고가 많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음이 그래서지요. 마음의 생동력 있는 능력, 그 능력이 공해서 공심(共心)으로써 공생(共生)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때에 따라서 조그만 일이든지 큰 일이든지 다양하게 능력을 쓸 때에 항상 우주 천하 삼천대천세계의 생명들의 능력은 바로 내가 한생각 낼 때에 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같이 들어와서 수많은 능력이 한데 한마음에 응시 되니 한생각에 우주 천하가 들리고 말죠. 그런데 우리가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물건이 있고 여러분과 같이 드는 물건이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독불장군으로서 그냥 ‘내가 했고, 내가 살고, 내가 모든 걸 줬고, 내 것이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 이 물건 이 색(色)이, 내 몸 육신이 나라고 산다면 그렇게 나라고 했으니 수많은 생명의 능력은 한꺼번에 한마음에 들어 주지 않습니다. 무량한 발전소, 즉 비유해서 자동적으로 돼 있는 자가발전소가 있다면 자유스럽게 남에게도 전기를 넣어 줄 수가 있죠. 항상 들어오는 불이기 때문에 꺼지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유스럽게 스위치를 가지고 쓸 수가 있는 건데 그거를 못 쓰게 되는 원인도 바로, 무량한 자가발전소를 모르고 전기가 들어온 것만 가지고 내 것이라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 전기를 내가 자유스럽게 켤 수가 없어. 그런데 그 자가발전소가 바로 나라면 내가 자유스럽게 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좀 널리 지혜 있게 써서 내 육신이 생기고부터 이 세상이 모두 공한 거를 알았고, 나로부터 전체가 공한 거를 알았고, 내가 이 세상에 난 것이 태초요, 내가 난 것이 바로 화두니까 그 화두로 인해서 이 세상이 있고, 세상에 진리가 있고 세상의 진리를 내가 탐구하고 깨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바로 제놈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제 속에서 모든 것이 나오는 거, 그 자리에다가 믿고 일임해 놓지 않는다면 천차만별로 된 부처님의 그 광대무변한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을 내가 헤아릴 줄 모른다면 부처님은 아마 알지도 못하고 맛도 못 보고 보지도 못할 겁니다. 부처님의 삼천 년 전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일 겁니다. 사람이라는 두 글자는 똑같겠죠. 삼천 년 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뭐가 다른 게 있습니까? 모습이 조금 다르게 돌아갈 뿐이죠.

질문하실 분이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한 사람 질문에 여러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여러분에게, 달이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땅속에 있다고 한다면은 여러분이 거기까지 이해를 못해서 저이 미쳤다고, 만날 남이 못 알아듣는 말만 한다고 이럴까 봐,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알게끔 하기 위해서 거기까지 끌고 가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로 가까이 자꾸 접근하고 대화를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홀연히, 나중엔 나를 만나지 않을 때도 만나지 않는 대로 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항상 자기가 하는 일마다 ‘아, 이게 공했으니까 내 주인공이 하는 거로구나. 내 육신과 더불어 같이 공했으니까 주인공이야. 즉 내가 주인공이지. 모두 내가 한 거 나한테다 놔야지.’ 하고서 모든 걸 놓게 됩니다.
그럴 때에 홀연히 단맛이든 쓴맛이든 다 합친 능력이 스스로서 나와서 자기가 그 생명수를 맛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그대로 못 알아듣는 말 할 게 없이, 우리 지금 이 세상 얘기도 버릴 말이 없습니다, 잘됐든지 못됐든지. 여러분이 좀 더 의정 나는 것을 물어서 서로 대화를 함으로써 그게 이해가 깊어질 때에 진실하게 놓을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질문자2(남) 저의 전생이 있다면 여기 모인 신도님들의 전생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전생과 전전생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떤 길이 있는지 말씀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이런 말이 있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랬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물을 봐도 우리 인생의 진리를 알 수 있을 텐데, 또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봐도 전생이 있고, 전생이 없다면 지금 현생이 없겠죠. 그런데 전생과 현생이 없다는 것은 전생이 바로 지금 현생과 더불어 한데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심이 현재심과 동시에 합쳐졌다는 겁니다.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거를 아시면 전생은 반드시 있죠.

작년의 콩씨가 있었기 때문에 올해 심어서 콩나무가 난 거죠. 그걸로 비유를 해 두고요. 그런데 콩나무가 났기 때문에 콩씨가 또 열리죠? 그 콩씨로 인해서 콩나무가 나고요. 연방 되풀이하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콩나무가 자기라고 하기 때문에 콩씨는 여차가 된 거죠. 콩씨가 있는데도 본래 콩씨가 자기한테 있는 것도 모르고 콩나무가 자기라는 겁니다. ‘콩나무가 자기라고 하지 말고 콩나무가 있기 때문에 콩씨가 있고 콩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있는 거니깐 둘이 아니다. 그러니 공했다.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가 일임해서 놔라. 믿어라. 물러서지 마라.’ 이러는데도 그걸 믿지 못합니다.

또 인과응보라는 것은 바로 콩나무가 나라고 하기 때문에 인과응보입니다. 콩나무가 나라고 할 때는 바람에 맞고, 모든 것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너무 끄달리기 때문입니다. 끄달리기 때문에 쫄쫄이가 되죠. 사는 데 그건 부자가 못 되고 아주 가난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생활도 가난하고 육신도 가난하고 모든 게 가난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에 빠져 허덕이면서, 자기에게 본래 창살이 없건만 마음으로 창살을 만들어 놓고 그 감옥에서 헤매고 돌죠. 그럴 때에 자기 마음으로 지어 놓은 업보가 바로 넝마의 차원이냐 금의 차원이냐 무쇠의 차원이냐 그 말입니다. 마음으로 인연 지어 놓은 것이 깡통 인연을 지어 놨다면 깡통끼리 모여서 부딪칠 거고 넝마 인연을 지어 놓았다면 넝마끼리 모일 거고, 만약에 금의 인연을 지어 놨다면 금끼리 모일 겁니다.

이 세상을 잘 보십시오. 금끼리 모이고 넝마끼리 모이고 깡통끼리 모이고 무쇠끼리 모이고, 이 세상 사람들도 자기 배운 것만치 자기 차원대로 전부 모이지 않습니까? 상인은 상인대로 모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경험하고 행하고, 배우고 듣고 보고 이런 차원에 의해서 바로 우리가 오늘날 그대로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식구로서 살면서도 그렇고, 깡통은 깡통끼리 모였기 때문에 소리가 분잡하게 나죠. 소릴 안 내려고 가만히 했는데도 소리가 나는 거예요. 말다툼이 되는 거죠. 그래서요, 금이라는 거는 조그마하면서도 항상 속에다 지니기 때문에 말도 없고 부딪칠 필요도 없고, 항상 몸에 지니지 않으면 장 속에 넣어 놓고 이러니 부딪칠 리가 없어요. 그것이 한 차원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기가 보이지 않는 데 마음으로 지어 놓은 것은 보이지 않게 받을 것이고 또 보이게 육신으로 저질렀다면 육신으로써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 놓고 우리가 받는 것이지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는 것이 없죠.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 돌아가는 거를 잘 파악해서 잘 생각해 보신다면은 견성성불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게 공해서 돌아가되 자기가 지어 놓은 대로 깡통이 되려면 깡통이 되고, 자기 마음먹는 대로 자기가 마음먹고 행하는 데에 달렸으니 전생 후생을 따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전생에서도 그러한 차원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에 태어나서 요렇게 차원대로 모였고, 내가 지어 놓은 것만치 가지고 탤런트처럼 팔자 운명이 거기 붙어 돌아가고 윤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전성’ 하는데 아니 글쎄, 할아버지께서 목병을 앓아서 돌아가셨는데 아래 손주 대에 손주가 목병을 앓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게 왜 그러냐. 아까 얘기했죠? 차원이 깡통이라면 깡통끼리 모여서 살기 때문에 그 가정에 모인 인연들이 전부 깡통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 만나서 보는 사람도 고(苦)고 당하는 사람도 고입니다. 그러니까 고가 있다 없다, 윤회가 있다 없다 이걸 떠나서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팔자 운명도 없을 것이고 유전성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건 왜? 자재할 수 있으니까요.

이 세상을 한번 보세요. 우리가 거기까지 생각지도 않고 있지마는 팔만대장경, 법구경이 다 어디 있나. 이 세상 돌아가는 게 바로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다양하게 색색 가지로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법구경 아닙니까? 그 법구경을 누가 이루고 다니나요? 자기가 바로 마음을 내서 이 생명과 육신이 움죽거리고 돌아가니까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데 우주의 섭리도 다른 혹성도 은하계도 모든 게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바로 샛별이며,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 마음의 샛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별성도 옷을 입고 있어요. 별성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별을 볼 수가 있는 거지 옷을 입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별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별성도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옷에 의해서 반사가 돼서 마음으로부터, 생명으로부터 반사를 이루고 또 그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서 물에도 비치는 겁니다.

우리도 마음의 근본인 자기의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가 있고, 낼 수 있기 때문에 육신이 움죽거릴 수가 있고 또는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고, 지혜로운 마음을 비춰 줄 수도 있고, 스스로써 보이지 않는 데 서로가 서로에 상응할 수 있고, 무수히 천차만별로 돼 있는 보이지 않는 생명들에게 서로 상응할 수 있고, 보이는 마음들하고도 같이 상응할 수도 있고, 모습하고도 같이 모이면서 헤어지고 헤어지면서 모이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세세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이 이치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하나하나가 만약에 지혜로운 마음이 없고 자기 깨달은 바 없다면 모든 것이 겉돌아 가고 항상 걸리고,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리고 그럴 겁니다.

저런 날아다니는 새들은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고, 옥수수밭의 옥수수도 내일 어떻게 될지 내년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거늘, 우리는 인간으로서 내일 일을 모르고 모레 일을 모르고 어저께 일을 몰라서 눈이 캄캄하고 귀가 먹고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전생이 뭔지 후생이 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거조차 몰라서 어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제자라고 하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렇지 못한 인간이라면은 다시 모습을 바꿀 때에 마음의 차원이 만약에 넝마라든가 깡통이라든가 이렇다면은 그 차원대로 나올 것이고, 또 사람 구실을 못했다면 요다음에 좌천해서 짐승의 모습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짐승의 모습을 쓰고 나와서도 사람 행을 한다면, 정말 참마음으로써 남한테 해롭지 않게 하는 아리따운 마음을 가졌다면 다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르고 살기 때문에, 애들이 모르고 살듯이 우리도 모르고 살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운 법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무서우면서도 바로 자비하고 자비하면서도 무서운 것을 우리는 깜박 잊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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