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보배와 능력이 있는데 어디서 찾는 겁니까

▲ 그림 최주현

허공중의 공 하나가 둥둥 떠 있는데 그 공 속에서 우리는 갇혀 살고 있어요.
우리가 그 육법공양을 올리는 원인은
‘ 이 공 속에서 좀 벗어나게 해 주소서.’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한 말씀 해 주세요

질문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국민소득은 올라가고 있다고 하는데 서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인생살이에 희망을 갖기보다는 암울한 현실에 좌절하는 이가 많은 지금의 시기에 물질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분들을 위해서 위로의 말씀이나 희망의 말씀을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답변 나는 자기를 자기가 알고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줄 알고, 자기를 믿고 거기에 맡겨 놓을 줄만 안다면 윤택해지리라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데 50%와 보이는 데 50%가, 100%가 한데 합쳐져서 서로 공용(共用)을 하기 때문입니다. 공용을 하기 때문에 항상 그 공덕이, 이익이 많이 가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수없이 수십 년을 해 왔으니까요. 즉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데서 공해서 돌아가는 이 세계의 그 도리를 모른다면, 자기가 지금 공생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모른다면 극히 어렵습니다. 믿는 것도 바깥에서 찾죠, 말을 해도 만날 음파가 바깥으로 나가죠, 만날 원망을 하죠. 그러니 자기에게 이익 될 게 없어요. 그러니까 고생만 자꾸 하죠.

그래서 미국에서 나한테 전화를 합니다. “스님, 내가 지금 3년째 취직을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통스러워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난 “알았습니다.” 이런 거밖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 이 공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한 번 죽어 나를 만나고, 내가 두 번 죽어 둘이 아님을 알게 됐고, 내가 죽어 둘이 아니게 나툼을 알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구경경지요 그것이 바로 자유인이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천백억화신이 나툰다 하는 것은 내 배 속에, 내 몸속에 있는 것만 해도 의학적으로 본다면 간단히 비유를 한대도 10억, 13억이라고도, 간단히 볼 때 그렇게 볼 수 있죠. 그러나 그 속에 또 있거든요. 그리고 그 의식 속에서 하나의 의식이 만 개도 될 수 있고 10억도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러한 도리를 알기 위해서, 자기 자(子)는 부(父)를 상봉하기 위해서 모든 걸 부에게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 라는 그 믿음을 믿었을 때 바로 일차적으로 죽는 겁니다. ‘나를 죽여 나를 발견한다.’ 이거죠. 그렇게 한다면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쥐고 가는 사람들이 그냥 모두 성취를 하고 갑니다. 그래, 어느 여자 신도 말이 그렇습니다. “스님한테 말씀을 드리니 스님은 ‘알았다’고 한마디 하시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금방 취직을 시켜 주시고 지금은 공부도 하게 만들고, 이렇게 잘되게 했습니까?”

나는 그거밖엔 없어요. “네 주인공을 네가 믿고, 한마음 주인공을 네가 믿고 거기다 맡기고 거기서만이 나를 이끌어 준다고 믿어라. 모든 용도에 따라서 그것을 재료로 알고 믿어라. 그리고 맡겨라. 그것이 연구하는 거며 바로 실험하는 거며, 그것이 체험하는 거며 무에서 유로 나오는 법이다.” 라는 걸 얘기해 줘요. 그것은 내가 잘나서 병을 낫게 하고, 내가 잘나서 사람을 많이 오게 하고, 내가 잘나서 무슨 가난을 면해 주고 이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체 만법을, 만생을 다 한마음으로 이끌어서 나갈 수 있는 그 능력을 기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육법공양의 의미

질문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육법공양을 올려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스님께 그 의미에 대해서 여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것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려는 보살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보리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화엄경』에도 쓰여 있다고 하시면서 제일가는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부처님 전에 올리는 등, 향, 차, 꽃, 과일, 쌀은 일반 서민들도 접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물건들인데 어떻게 이것이 그렇듯 귀중한 공양물이 되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답변 공양을 올린다고 할 때 초공양, 향공양 이거를 제일 먼저 하죠. 그래서 초공양을 할 때 이 초에 불을 켜고 자기 모습을 태우듯이 태우고 가죠. 그렇게 자기 모습을 태우듯이 촛불을, 마음의 불을 켜기 때문에 모든 업보와 또는 인과성, 유전성 또 영계성, 세균성 이 모두가 다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이 불을 켜듯이 내 몸을 태운다. 이것은 무명도 벗기고 모든 욕심, 집착, 관습 이런 것을 모두 태우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 우리가 초를 켜는 거와 내 마음의 불을 켜는 것을, 마음의 불을 켜는 것을 방편상 보이게끔 이렇게 초를 켜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초 켜는 거와 내 마음의 불을 켜는 거와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그렇게 초를 켜서 무명을 다 사르고 나면은 향공양을 올리시죠. 향을 공양을 올려서 그게 두루 향내음이 날 때 비로소 그것은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다, 이 모든 향내음으로써 공식을 삼는다. 즉, 양식을 삼는다. 그런데 공식이란 건 전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양식을 삼는다 하는 소립니다. 이것을 우리가 공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 올리는 것이 꽃공양입니다. 마음의 꽃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꽃을 예뻐서 갖다 놓는 게 아니라 마음의 꽃을 올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서 상징이 되는 것이 꽃입니다. 가섭 존자도 꽃을 드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얼굴로서 꽃을 피웠다고 하는 얘깁니다. 그거와 다름없는 꽃공양. 꽃을 그냥 올리는 게 아니라 꽃공양이라고 그랬습니다. 두루 한다는 뜻이죠. 꽃공양을 올리게 되면은 마음의 그 꽃을 피워서 이 한 단계가 넘어가면은 열매가 맺는다.
그 뒤에는 과일공양이 올라갑니다. 과일. 그래서 그 마음의 꽃이 피는 데에 그 단계가 올라가면은 열매가 맺어서, 이 모습을 나무라고 한다면 제 나무에서 스스로서 무르익은 과실은 일체 중생이 먹고도 남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갖은 각색의 과일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꽃과 과일을 공양 올리는 것은 그러한 뜻에 있는 것입니다. 이거 그냥 무턱대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또 떡공양을 올립니다. 모가 나지 않게 둥근 떡을 올릴 때는 떡이 떡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지구의 공기주머니에 들어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듯이 둥글게 그냥 떡 하나입니다. 떡공양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느냐. 둘로 보지 말라. 너의 생명같이 생각하라. 너의 모습같이 생각하라. 너의 아픔같이 생각하라. 네가 배고픈 것같이 생각하라. 또 내 부모와 같이 생각하라. 내 자식과 같이 생각하라. 내 형제와 같이 생각하라. 이 전부 둘 아닌 도리, 즉 말하자면 공생이며 공심이며 공체며 공용이니 공식으로써 이렇게 전부 두루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떡 하나가 그렇게 귀중하다. 이 세상을 다 주고 바꾸려도 바꿀 수 없는 떡 하나다. 이 떡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도 방편이다 이겁니다. ‘한 점’이라고 해도 되고 ‘한 떡’이라고 해도 되고 ‘한 꽃’이라고 해도 되고 ‘한 물’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것은 뭐, 이름은 이름이지 그거는 진실한 실천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불러 놓는 겁니다. 떡은 표현, 방편을 여러분이 잘 알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마는, 우리 지구를 볼 때도 이게 떡과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그 떡 안에 우리가 다 살고 있구나. 그리고 우리가 그 떡을 지금 공양 올리는 건 모두가 같이 하고 있다는…. 그렇기 때문에 떡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다기 올리죠. 맨 마지막이 다기예요. 모두들 그저 먼저 올리고 나중 올리고 그러지마는 이 뜻으로 볼 땐 그렇단 말입니다. 다기는 이 큰 바다와 같은 겁니다. 이렇게 다기, 조그마한 그릇의 물 하나지마는 큰 바다로 비유합니다. 부처님한테 올리는 다기는 그렇게 크단 얘기죠. 그래서 이 다기공양을 올린 때 이것이 바다에 구정물 흙물 고름물 송장물 뭐, 별의별 것이 바다에 다, 고기 썩는 물 다 들어가도 여여하게 아무 지탄 없이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바다에서는. 싫다 좋다 말 없이 말입니다. 지금 시쳇말로 하면 다 받아들여서 수증기로 올린다 하죠. 그 요만한 그릇의 다기 하나가 큰 바다로, 바다가 돼서, 바닷물이 돼서 어떠한 물이든지 모두 다 바다에 한데 합쳐져서 수증기로 올라가서 정화를 해서 다시 내려온다면 요만한 풀 한 포기도 안 먹여 살리는 게 없다. 생각해 보세요. 바닷물이 수증기로 정화돼서 다시금 내려올 때는, 풀 한 포기도 물 안 먹고 못 견디죠. 작은 건 작은 것대로 먹고 큰 건 큰 것대로 먹고 양껏 먹죠, 모두.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그렇게 먹일 수 있느니라 한 뜻입니다.

그래서 다기공양을 올리고 떡공양을 올리고, 밥공양도 마찬가집니다. 밥을 해서 공양을 올리는데, 공양미로 올리는데도 한 공양입니다. 한 그릇의 공양. 떡 하나를 가지고 지구 하나다 이래도 되고, 밥 한 그릇을 가지고 지구 하나다, 우주 하나다 이렇게 해도 됩니다.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생명들이 다 살고 있으니까요. 그곳에 다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는 허공중에 공 하나가 둥둥 떠 있는데 그 공 속에서 우리는 갇혀서 살고 있어요. 갇혀서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 육법공양을 올리는 원인은 ‘이 공 속에서 좀 벗어나게 해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본래 선악이 없는지요?

질문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선과 악이 있어서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일반인들의 윤리이고 도덕인데 불교에서는, 특히 선 공부를 하는 분들은 애매모호하게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스님, 진정 선도 없고 악도 본래 없는 것인지요? 스님께서는 선도 악도 없다고 가르치시는데, 본래 선악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요, 아니면 차원이 높으신 분들의 차원에서만 그런 것인지요. 그렇다면 저희 같은 범부에게 선도 악도 다 놓으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또한 어떤 뜻인지요?

답변 우리가 생각해 보면 필수적으로 이것을 믿고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세상만사가 돼 있고,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참나’인 자신의 뜻을 중시하고, 항시 그 뿌리를 믿으십시오. 거기에다 거름과 물을 줘서 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가지와 잎새가 아주 싱싱하게 자라서 제 나무에서 열매가 무르익는다면 그 맛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리 따서 그런 거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뿌리가 썩어 들어가면 나무가 무성하질 않아서 열매도 맺지 못하는 반면에, 열매를 맺는다 하더라도 익지 못해서 그냥 말라 버리는 형상이니까 맛이 날 수가 없죠. 그와 같이 우리 마음공부도 역시 그러합니다. 한 치도 에누리가 없는 공부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 무슨 판결을 내려서 1년, 2년 또는 3년, 5년, 10년 이렇게 법에 의해서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이건 자동적으로 요만한 거 하나도 에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예전에 해외 지원으로 바쁘게 휘몰아치고 그러니까 그 지원 자체 내에서도 정신이 없어 합니다. 회장이고 부회장이고 총무고 뭐, 거기 신도들도 그렇고 스님네들도 그렇고 아주 정신이 없어 합니다. 너무 바쁘게 돌아치니까요. 그래서 저기서 설법을 하고서, 비행기를 금방 타고 와서 또 여기서 설법을 하고, 그렇게 바쁘게 다니니까 저녁나절에는 피곤함이 좀 옵디다. 그래서 바람을 쐬려고 스님들하고 모두 산책을 하다 너무나 기가 막힌 장면을 본 겁니다. 항상 알고 있고, 항상 하고 있고, 뜻으로도 항상 그렇건만 말입니다. 새카만 사람이 새카만 어린애를 데리고 가는데 새카만 초콜릿을 손에 쥐여서 이렇게 물리고 가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냥 웃음이 터지는 겁니다. ‘야! 이 세상에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구나.’ 하하하…. ‘이게 모두 철칙 같은 법이고 조금도 에누리가 없구나. 흑인이 백인 낳는 거 봤나?’ 하면서, 속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딴 사람이 모르거나 안 본다고 해서,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을 못해 보고 갑니다. 그렇게 에누리가 없건만. 요 조그마한 데서부터 끝까지, 끝에서부터 또 끝까지 돌아가면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그걸 새삼스럽게 본 건 아닌데 말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혼자 껄껄껄껄 웃었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허허허…. 그러고는 궁둥이를 탁탁 털고 일어서서 오면서 같이 산책 나온 스님네들더러 그 얘기를 하니까 모두 우습다고 웃고들 들어갔습니다마는, 그걸 생각을 하면 이 세상만사, 삼천대천세계, 우주 전체가 그렇게 그러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항상 얘기도 하고 그러지마는, 여러분은 천당 지옥이라는 것을, 천당이라니까 천당인 거고 지옥이라니까 지옥인가 보다, 이렇게들 그냥 멋들어지게, 아주 유유히 그렇게 생각하고 갑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에누리 없는 우리의 인생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게, 한마디로 아주 쉽게 말을 해서 독사같이 살면 독사의 모습으로 나올 것이고, 소같이 살면 소 모습으로 나올 것이고, 사람같이 살면 사람으로 나올 것이고, 개같이 살면 개로 나올 것이고…. 하하하.

그런데 오간지옥이니 칼산지옥이니 또는 독사지옥이니, 이 모든 지옥의 이름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옥이다’ 하면은 짐작으로만 그냥 ‘지옥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마음으로 살다가 땅속에서 기어다니는 벌레의 모습 속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지옥이죠? 그래서 독사같이 살았으면 자동적으로 땅속으로 다니는 독사 소굴에, 독사의 암컷 수컷이 행하는 거기다가 그 영령이 집어넣어져서 그냥 독사의 모습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런데 독사가 그냥 독사로 살아왔으면 별 문제인데, 사람으로 살던 의식이 독사로 들어가서 독사의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산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처럼, 개같이 살았으면 개로 살듯이 어떠한 한 목어치만 살게 되어 있죠. 그런데 ‘오간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말은, 전부 헌갓쟁이 모양으로 다니며 그저 악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은 땅속 깊이 뚫고 다니는 이런 것들 소굴에다 그냥 넣어진다고 하는 말입니다. 넣어진다면 땅속으로 기어다니는 벌레가 될 테니까 그 의식이 어떻겠습니까? 지옥이죠? 그 조그만 데로 들어갔으니까. 그것이 진화돼서 또 인간까지 벗어나려면 얼마만큼 헤매야 된다는 얘깁니까? 그런데 이거를 조금도 생각을 안 하는 거죠.

그래서 “공덕을 쌓아라, 공덕을 쌓아라. 좋은 일 하고, 좋은 생각 하고, 좋은 행동해라.” 이렇게 부처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셨고, 사대 성인들도 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다가 여기에서는 한술 더 떠서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악한 일을 하는 것도 다 놔라.” 이랬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쁜 일이 또 거기 끼어들게 마련이니까 나쁜 일도 놓고 좋은 일도 놔라.”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공부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점에서 그런가. 나쁜 일 좋은 일을 막론하고, 그 생사윤회 속에서 완전히 해탈해서 벗어나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한 철 좋은 일을 해서, 그 선덕으로 인해서 좋게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산다 하더라도 그게 해가 가고 시간이 지나면은 또 나쁜 일도 하게 되니까, 또 짓게 되니까 아예 ‘생사윤회 속에서 그냥 벗어나라.’ 이런 뜻에서 부처님도 말씀하셨고 또 지금 나도 길잡이로서 이렇게 길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말씀을 들려주시는데

질문 스님! 저는요, 절에 다닌 지가 10년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아빠가 사업을 하다 전부 실패를 해서 오고 갈 데가 없어졌거든요. 그랬는데 어느 봄날 인제 떡집에다 갖다 판다고 쑥을 뜯어 가지고 시장에 가져갔는데 토큰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 토큰 하날 가지고 차를 탔으니까 이제 토큰이 하나도 없죠. 그래 시장 앞 떡집에 갔더니 떡집의 문이 닫혔어요. 그러니 올 차비가 없잖아요. 그런데 차에서 딱 내리자 토큰이 내 발에 딱 밟혀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집에 왔는데, 저도 누군가가 나를 보살펴 줘서 참 고맙다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또 한 번, 제가 다니는 절에 갔는데, 제가 또 벌어야 되니깐 삼 일 동안만 가서 기도를 하면 부처님이 저를 도와주려니 생각을 하고 삼 일 동안을 갔는데 마지막 회향날 오천 원을 줬어요. 아빠가요. 그랬는데 법당에 가서 절을 한 번 하고 나니까 누군가가 목소리로 나한테 들려주는 거예요. “야, 나가라. 나가, 나가.” 그래서 제가 “부처님, 저는 너무나 답답하고 너무나 살 길이 없어서 삼 일 기도를 했는데, 절이라도 세 번 해야지 어떻게 한 번 했는데 저를 나가라고 그러십니까?” 그러고 제가 이렇게 세 번을 하니깐 어떤 아이가 와서, 내 지갑을 요렇게 놨는데 지퍼를 착 열면서 그 돈을 마저 가져가요. 그래서 ‘아휴, 부처님이 그 돈을 지키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나?’ 그러고 불전에 가서 천 배를 했는데도 한 한 시간밖에 안 한 거 같은 기분이 나요, 너무 감사해서.

근데 어딘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다가 보이지 않게 나에게 말씀을 들려주시는 그분이 바로 영원한 그 부처님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맞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말씀하신 대로 귀에서 들린다고 해도 모든 것을 놔 버리셔야 됩니다. 귀에서 들리지 않고 마음에서 스스로서 그 맛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으셔야 될 것입니다. 보인다거나 들린다거나 이런다고 해서 내가 ‘이게 부처님이지.’ 이렇게 알아서는 아니 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향기와 빛을 스스로 내가 바로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스스로 맛을 볼 수 있어야 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바깥으로 찾아서도 아니 되고, 바깥에서 들려도 아니 되고, 바깥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 됩니다. 그것은 안으로 바깥이 보여야 되는 것이고 그 보이는 것도 안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보이기만 하고 끄달리고 돌아다닌다면 아니 되고, 바깥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안으로 놔야 되는 것입니다. 일심에서 만법을 응용하는 것이 일심으로 든다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그렇게, 바깥으로 보이는 건 안에다 놓고, 안에서 나가는 거는 나가는 것대로 또 여여하게 걸림 없이 사시면서 또 안에다 놓고 감사하고,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마음으로 전달하신 부처님의 뜻을, 우리 선배 부처님의 뜻을 아마 똑바로 진행하실 겁니다. 우린 그 뜻을 똑바로 받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도, 만약에 그것이 지금도 산다 그러면 살고 죽는다 그러면 죽고 그런다면 허, 이것은 타의에서 하는 소리지, 자의에서 그대로 빛이 나오고 향기가 나오고 또 맛이 나는 건 아닙니다. 자기 마음 가운데서 스스로서 자기 능력이, 빛이, 지혜가, 향기가 나오면 그 맛을 스스로서 아는 것이 바로, 바깥으로 내 몸도, 승보도 그러하다 했으니, 그것도 일으키려면 일으키고 만약에 죽이려면 죽이는 거죠. 죽는 게 죽는 것이 아니니까. 옷을 벗으려면 벗고 말려면 마는 것도 자기예요. 자기한테 다 보배가 있고 자기한테 그 무수한 능력이 있으니 자기한테 맡겨 두면, 그리고 시봉만 잘 들어 주면 혹 옷을 천천히 벗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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