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24〉 불명산 화암사 극락전

단향목과 복수초 설화의 꽃 절
중세 수도원 같은 폐쇄와 고요
섬세함과 정교함이 빼어난 닫집
겨울바위 핀 연화는 관음의 자비

극락전 내부 닫집과 중앙칸 및 측면칸 천정세계다. 우물반자에는 범자종자불을 심은 육엽연화문과 선학, 일월성신 문양 등을 베풀었다. 닫집은 범어사 닫집과 닮은 빼어난 수작이다.
영혼의 씻김 있는 통과의례의 길 

15세기 금석문 기록인 화암사 중창비(花巖寺重創碑)에 불명산(佛明山) 화암사를 이르기를 ‘고요하고 깊은 성처럼 잠겨 있어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둔 복된 땅’이라고 묘사했다. 예나 지금이나 화암사는 인적이 드문 깊은 골짜기에 있다. 불명산 시루봉 남쪽 18개의 연봉에 둘러싸인 800평 분지 속에 화암사가 입지해 있다. 화암사는 꽃의 절이다. 뛰어난 향을 지닌 단향목을 비롯해서, 겨울의 바위에 핀 연꽃(복수초) 설화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그윽한 내력을 간직한 절집이다.

화암사 가는 길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이고, 끊어지듯 이어지는 형용이 맺고 푸는 가야금 산조가락처럼 오랜 여운을 남긴다. 그 길은 계곡의 물길과 바람이 이은 무위(無爲)의 길이고, 궁구를 추구하는 선(禪)의 길이다. 희미하고 아련한 그 길을 지나면서 우리는 영혼의 씻김이 있는 정화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실날처럼 간신히 이어지던 길의 끝은 수직의 폭포를 거슬러 하늘로 비상한다.

하늘이 열리고 산 속 깊은 암반 위에 연꽃 한 송이 피어 있는 형국이 나타난다. 불현전(佛現前)으로 현현하는 화엄경의 ‘화장세계(華藏世界)’처럼 극적인 경로다. 기승전결 방식의 진입동선이 대단히 깊은 인상과 감명을 자아낸다. 바위 위의 절집은 돌담의 성곽을 두른 채 깊은 고요와 선정 속에 있다. 중세 수도원 같은 폐쇄성과 내부로 향하는 단호함의 결기가 강하게 읽혀진다.

꽃비 내리는 우화루(雨花樓)의 뜨락에서도 길은 모퉁이 외길로 이어진다. 모퉁이를 돌아 ‘좁은 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외양은 견고하고 폐쇄적이며 내부는 내밀하고도 깊다. 강고한 바위 위의 성채같은 절집 분위기는 적묵당 뒤쪽 장독대 공간에 가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절집의 터가 거대한 암반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삼척 죽서루처럼 강한 바위 기운이 느껴진다. 극락전 진입은 중앙부 진입이 아니라, 우화루 서쪽 모퉁이의 문간채를 지나 적묵당 기단을 따라 진입하는 구조다. 건물의 측면 및 모서리를 따라 진입하는 독특한 동선이다. 좁은 문 너머 불명산 화장세계의 연꽃, 극락전이 있다. 화암사 극락전은 깊은 계곡 바위 위에 핀 사찰건축의 꽃, 건축의 화암(花巖)으로 빛난다.

극락전 천정에 장엄된 문양들이다. 범자종자불을 심은 육엽연화문은 통도사 대웅전과 봉정사 대웅전 문양과 닮았다.
기능과 장엄미학 갖춘 하앙구조

극락전은 종도리 묵서명 기록에 의할 때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1605년에 중수한 건물이다. 극락전이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 목조건축중에서 유일하게 갖춘 하앙(下仰)구조 때문이다. 하앙은 공포와 서까래 사이에 처마와 나란히 끼운 긴 목재다. 공포를 중심으로 지렛대 역할을 하면서 외부로는 길게 나온 지붕처마를 받쳐주고, 내부로는 중도리 등에 결구되어 지붕의 하중을 받아내는 건축부재다. 하앙에 외목도리를 얹어 처마 길이를 더 빼낼 수 있으므로 처마를 깊게 하고, 또 내부공간의 높이, 혹은 공간적 깊이감을 확장하는데 유용해 보인다.

하앙식 목조건축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두루 나타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화암사 극락전이 유일해서 건축사적 희소성과 중요성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구조는 대단히 미학적이며 상징성이 뛰어나다. 앞면과 뒷면의 하앙구조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앞면의 하앙장치는 극락전 내부의 신령함을 표출시키려는 분명한 의도로 용의 형상을 취했다. 하앙의 비스듬한 목재장치 자체가 여의주를 움켜쥐고 뛰쳐나가려는 용의 기세다. 여의보주를 취하고 처마 밑에서 여덟 용의 군집이 일제히 뛰쳐나오려는 형상은 미증유의 사례다. 구조기능의 하앙장치를 이용한 절묘한 종교장엄에의 미학적 해석능력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건물 뒤쪽 하앙은 기능에 충실한 형태로 꾸밈없이 뾰쪽하게 다듬었다. 직각삼각형의 빗변처럼 비스듬히 잘려진 쐐기 형태로 보다 구조적인 정형성을 갖추고 있어, 그 비대칭적 경영의 안목에 탄복할 따름이다.

목재부 재질분석을 통한 연대측정에서 하앙의 목재는 소나무로 밝혀졌고, 기둥, 하앙목재 모두 1604년 겨울에 벌채한 것으로 조사되어 1605년 중수기록을 뒷받침 하였다.

윗줄은 외부 순각판에 입힌 주악비천, 공양비천 벽화이고, 아랫줄은 닫집에 장엄된 비천조형과 외부 포벽에 그린 여래도이다.
정면 순각판에 베푼 비천벽화

극락전 건물에서 또 하나 주목을 끄는 것은 현판의 독특한 구성이다. 넓은 판재로 켠 현판이 아니라, 어칸 공포 사이에 ‘극-락-전’의 배치처럼 자그마한 나무판에 한 자씩 써서 끼워넣었다. 그러한 현판의 해체형식 덕분에 극락전의 정면 장엄이 가려지는 일 없이 온전하게 드러난다.

글, 그림, 하앙 건축장치가 일체화 된 평등구조를 이루었다. 정면 순각판에 장엄한 벽화의 아름다움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극락전 단청은 순각판 묵서명에 ‘강희53년 단청기문(丹靑記文)’의 기록이 전하는 바, 1714년의 단청 절대연도를 밝히고 있는 중요한 사료다. 즉 순각판의 벽화와 극락전 단청이 적어도 300년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면에 조성한 순각판의 벽화 사례는 매우 희귀한 것으로, 일곱 판벽에 주악비천상 5기, 공양비천상 2기를 베풀었다.

주악비천상은 횡적과 태평소, 바라, 장구, 비파를 각각 연주하고, 공양비천상은 과일과 향의 육법공양을 올리는 장면으로 표현했다. 채색에 사용된 주된 색상은 붉은색 계열의 석간주와 초록계열의 하엽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천의자락이 여성적 부드러움과 우아함으로 넘친다. 몇 몇 천인의 머리장식은 보살장엄의 화려함 수준에 미치고, 어깨에 두른 숄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벽화에서 나타나는 형식으로 대단히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벽화장엄에서 천의무봉의 필력이 묻어난다.

그런가하면 극락전의 내부첨자 및 살미 표현방식도 매우 독특하다. 내3출목으로 단출한 편이지만, 살미부재들을 밀고, 당기고, 포개서 천정면까지 굽이쳐 쌓아올린 방식이 각양각색으로 놀랄만한 변주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일반적인 교두형이나 초각형이 아니라, 밀어내고 품고, 포개서 밀어올리는 축조방식에 가깝다. 특히 외부의 사선으로 뻗친 하앙양식을 내부의 살미에서는 수평형태로 포갰다. 형상은 용이 보주를 움켜쥔 순간포착으로 외부와 동일한 모티브를 취했다. 하앙장치와 함께 내부공포의 결구와 포작방식이 그동안 익숙한 장면과는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백제계 양식의 고유성과 독자성의 면면으로 와닿는다.

극락전 공포와 지붕 사이의 하앙구조. 국내에서 하앙장치를 갖춘 건축은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 유일하다. 왼쪽의 용두 하앙은 앞면장치이고, 오른쪽의 빗변 하앙은 뒷면장치다.
관음보살상, 의상스님 친견한 자태 그대로

극락전 내부장엄에서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닫집이다. 수직성의 위용과 장식성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수작으로 범어사 대웅전의 닫집과 영락없이 닮았다. 형태는 물론이고 용과 봉황, 연꽃, 비천, 오색구름 등의 소재 배합에서도 서로를 분별할 경계의 문턱이 없어 보인다. 닫집건축과 조형 낱낱에 섬세함과 정교함의 공력을 쏟아부어 일체의 대상들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닫집공간은 굵은 연꽃줄기의 수직내림과 넝쿨의 새싹들이 붉은 촉을 내밀어 생명의 영속성을 담지한 대자대비의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똬리를 튼 거대한 용과 봉황, 오색구름이 상서로움과 신령함의 기운을 암시하고, 꽃을 든 두 비천은 부처님 공덕에 대한 예경과 찬탄을 드러내고 있다. 순환의 운동성이 담지된 독특한 모자를 쓴 채 표대 자락을 몸에 휘감고, 꽃가지를 들고 가는 두 비천조형에서 환희지의 기쁨이 묻어난다.

천정엔 300년전의 단청 빛이 갤럭시의 행렬을 이루었다. 그 오래된 빛은 고요하고 내밀하게 간직해온 적밀(寂密)의 빛이다. 우리는 창을 통해 세계를 본다. 동양의 세계관에선 네모난 땅에서 둥근 하늘을 본다. 첨성대의 우물격자 너머 검은 천공에 별들이 빛나듯이, 우물천정 칸칸이 진리와 부처님의 세계가 빛난다. 사찰 천정의 직사각형 우물반자는 부처님의 세계와 진리를 관조하는 창이다. 그런데 그 창은 현상계를 비추이는 색계(色界)가 아니라 마음의 창이다. 본질적으로 내 마음을 바라보는 창이다. 우물천정은 깊은 관념의 형이상학적 세계이며, 방편반야의 상징세계다. 천정의 꽃은 꽃의 현실적 관념을 버려야 비로소 보인다. 불교조형을 바라보는데 있어 연꽃인가, 모란꽃인가, 당초문인가를 분별하는 만큼 어리석은 태도는 없다. 단지 체(體)를 드러내기 위해 상(相)을 차용할 뿐이다. 따라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은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다.

극락전 우물천정에 베푼 핵심문양은 여섯 연잎의 형상을 가진 육엽연화문이다. 천정의 꽃은 본질적으로 깨달음의 꽃이며, 부동의 진리이고, 부처님의 자리다. 곳곳의 육엽연화문에 범자 종자불(種字佛)을 심었다. 종자불의 양식은 양산 통도사 대웅전 천정과 안동 봉정사 대웅전 천정에 심은 범자종자불 양식과 매우 닮았다.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극락전의 당호에 맞게 연화의 중앙에는 주존이신 아미타불의 종자자를 심고, 여섯 연잎에는 관세음보살의 ‘옴 마니 파메드 훔’의 육자대명왕진언을 심었다. 화암사 중창비문에 따르면 극락전에 모신 관음보살은 의상스님이 도솔천을 관하면서 친견했던 수월관음의 용모와 자태 그대로의 등신불(等身佛)로 기록하고 있어 경이로움을 더한다. 겨울 바위에 피었다는 연화가 수월관음의 자비임을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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