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26회-백제의 불탑(2)

미륵사지 삼탑…한국 유일 3탑3금당
모두 성불한다는 미륵하생사상 근거
누구나 쉽게 부처님 친견할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미륵삼존불탑’ 조성

석탑이되 목조양식 취한 건축 기법
복잡한 구조 설계 현대인도 감탄
백제인들의 높은 건축 능력과
장인들의 미륵신앙이 더해진 ‘수작’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한 미륵사지 삼탑은 현재 복원<사진1> 중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삼탑삼금당’ 형식의 가람 형태로 중앙의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석탑이 있었다. 이처럼 3기의 불탑들이 조성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 무왕(武王)조의 내용과 미륵사상이 도움이 된다. 삼국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진1>미륵사 복원 모형도(3탑3금당식 가람구조)

백제의 제30대 무왕의 어머니는 홀로 사는 과부로 연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서동(薯童)을 낳았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선화공주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경주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고 그들을 꾀어서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밤마다 뭘 안고 서동방에 간다.” 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노래가 신라 전역에 퍼져서 궁궐 안에까지 들리자 신하들이 임금님에게 강력히 말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다. 궁을 떠나는 선화공주를 위하여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하였다. 공주가 귀양지로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공주에게 절을 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인사를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공주는 그를 따라가면서 정을 통했다. 함께 백제로 와서 왕후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이게 무엇이오?"라고 크게 웃으며 말을 했다. 그러자 공주는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서동은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중략).....백제의 무왕이 된 서동이 어느날 부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부디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하며,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불상을 만들고 불전, 불탑,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 했다.

이처럼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와 무왕의 간절한 사랑이야기와 미륵사 창건에 대한 사연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시대의 일반적 가람배치는 ‘1탑1금당식’인 반면 미륵사는 특이하게도 ‘3탑3금당식’의 사찰구조를 띠고 있다. 왜일까? 이는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출현했다는 것과 절의 이름이 ‘미륵사’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풀이해볼 수 있다.

미륵신앙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륵’이라는 제자에게 미래에는 반드시 성불할 것이라는 약속을 근거로 한 신앙이다. 즉, 미륵신앙은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이라는 경전에 의하며,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 그리고 성불(成佛)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설하고 있다. 이 중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入滅)하여 56억7000만 년이 지난 뒤, 미륵은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미륵부처님이 된다. 이 때 미륵부처님은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하여 단지 세 번의 설법을 하신다. 그 순간 설법 장면을 보고 들을 수 있는 272억이나 되는 인간들은 누구나 성불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미륵하생사상이다.

그렇기에 미륵부처님을 한 사람이라도 더 쉽게 친견하기위해서는 다른 부처님과는 달리 그 모습이 크고 웅장해야하며, 가부좌로 앉아있는 것 보다는 두 발로 서 있는 편이 낫다. 이것이 ‘미륵보살상’은 반가부좌상이 많은 반면 대부분의 ‘미륵불상’이 입상으로 조성되는 이유다.

‘미륵삼존’이란 미륵부처님과 좌우에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의 세분의 존상을 동시에 일컫는 말이다. 백제의 무왕과 선화공주는 미륵삼존을 각각 세 곳의 전각에 모시고 그 앞에는 누구나 쉽게 부처님을 멀리서도 친견 할 수 있도록 ‘미륵삼존불탑’을 각각 조성한 것이다. 즉 미륵삼존 중 주불인 미륵부처님 앞에는 9층의 목탑을 세우고, 좌측의 법화림보살과 우측의 대묘상보살 앞에는 각각 9층의 석탑을 세워서 양쪽의 석탑 2기가 목탑을 협시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륵 불사를 통하여 모든 중생들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염원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창건된 미륵사는 약 2만평(66,000㎡)에 달하는 삼국 제일의 규모를 가진 거대한 사찰이었다는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고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사찰은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미륵삼존탑’ 중 단지 서쪽의 석탑 하나만이 반쯤 붕괴 된 채 남아있게 된다.<사진2> 이 석탑은 많은 건축학자나 미술사학자들에 의하여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

▲ <사진2>1910년대의 미륵사 서쪽석탑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유물 중에서 미륵사 석탑처럼 오로지 돌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9층의 빌딩을 만들어 낸 유사한 사례가 있었던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석탑이 왜 ‘세계7대불가사의’에 포함되지 않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재에도 등록 되지 않는지 의문이 든다. 미륵삼존탑은 단순히 돌을 작게 다듬어 쌓은 것이 아니라 수십 톤이 넘는 바위들을 다듬어 목조건축물을 세우듯 만든, 9층의 대 역사를 이룩해 놓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탑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일반적인 목조건축물은 기둥과 보 및 도리를 기본적인 부재로 하여 부재를 서로 결구시켜 만드는 가구식(架構式)방식으로 조성한다. 그러나 미륵사의 석탑은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구조 방식을 취했지만, 외형상 목조 건축물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건축적으로 놀라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발달된 석재 건축 장비를 이용하여 외형을 모방할 수 있다. 1980년대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동쪽 석탑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탑의 탑상부에 놓여지는 ‘노반석’등 석탑의 부재가 일부 출토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93년도에 높이 27.67m, 기단 12.4m의 9층 석탑을 복원하였다.<사진3>

▲ <사진3>복원된 동탑.1993년도에 높이 27.67m, 기단 12.4m의 9층 석탑을 복원하였다

하지만 기계를 이용하여 겉모습만 재현하였을 뿐, 복원조성에 따른 소요경비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내부의 복잡한 공간 구조 설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로지 1,400년 전 불가사의한 백제인들의 기하학적 설계능력과 고도로 발달된 건축공학 기술에 미륵부처님의 출현을 간절히 염원한 장인들의 미륵신앙이 더해져 가능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6층만 남아있던 서쪽 석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1915년 콘크리트로 수리<사진4>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붕괴 위험에 처해져 2001년부터 완전 해체작업에 들어가 현재는 복원이 한창이다. 해체 과정에서 680점의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도 2009년 1월 탑의 중심기둥 중앙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등의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 <사진4>1915년 콘크리트로 수리복원된 서쪽석탑

가로15.5cm 세로10,5cm의 금판에 글씨를 음각하고 붉은색을 칠해 글씨가 잘 보이도록 한 금제사리봉안기<사진5>의 내용은 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탑을 조성한 연유를 기록한 봉안기의 내용 중에는

▲ <사진5>탑의 중심기둥 사리공에서 출토된 금제 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초략)....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동안 선한 인연을 쌓아 금생에 태어나 뛰어난 업적으로 만민을 보살피시고 불교의 기둥이 되셨기에 기꺼이 정재(淨財)를 보시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639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봉안하였다.
원하오니, 이 탑에 세세생생 영원히 공양하여 이 공덕으로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업적은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불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오니, 왕후의 몸과 마음은 거울과 같이 맑아서 온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중략)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성불하게 하소서!

라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하면 창건연대가 다르고 발원자가 선화공주가 아니고 백제 귀족중 하나인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조성하였다는 사실이 아직도 학계의 연구주제로 남아있어 결말을 궁금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탑을 조성한 목적이다. 왕의 수명장수를 염원하고 정법으로 정치해 만백성들이 존경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위로는 불법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구보리하화중생’의 목적과 모든 중생을 성불케 한다는 ‘자타일시성불도’의 대원을 이루고자 불탑을 조성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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