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25 백제의 불탑(1)

도읍 중심으로 불사 성행 추측
서울 풍납토성 내 판축법 유구
부여 백제목탑지 축조방식과 동일
현재 확인된 백제 불탑 10 여기
능산리사지목탑 最古 백제 불탑
목탑터 이중기단 5층으로 추정

사리공양 신앙 왕실서 봉행은
당시 불교사상 드러내는 자료
불탑조성의 공덕 왕실서 적극수용

백제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된 시기는 인도 스님 ‘마라난타’가 동진(東晋)에서 백제로 들어온 침류왕 1년(384)이다. 왕은 마라난타라는 외국 스님을 환영하여 궁중에 모신 것으로 보아 얼마나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세계불교문화사에서 작지 않은 영역을 차지할 만큼 훌륭하고 뛰어난 불교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다. 불교신앙과 종교문화의 합일체인 불탑의 조성에 있어서도 백제는 초창기부터 도읍을 중심으로 불사가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에 서울 풍납토성 내에서 목탑으로 추정되는 유구(遺構)가 발견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4월, 한신대학교 박물관 발굴팀은 서울시 송파구에 소재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재발굴 조사에서 목탑지로 추정되는 유구를 발견하였다.

이 유구는 한 변의 길이 10m, 깊이 3m 정도의 방형수혈을 굴착한 후 내부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점토와 사질토를 교대로 판축 한 다음 다시 그 위에 점성이 적은 사질점토를 성토한 유구가 확인됐다. 즉 판축법에 의한 이 유구는 충남 부여의 백제목탑지 등에서 보이는 것과 동일한 축조방식이다. 특히, 이 유구는 조성 연대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기로 추정되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지로 유추되어 백제 초기 불탑조성의 면모를 상상 할 수 있게 한다.

당나라시기에 편찬된 중국의 역사책인 〈주서(周書) 권49 열전(列傳)〉에 의하면 ‘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라는 기록이 있다. 즉 백제는 스님과 절과 불탑은 매우 많지만, 도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없다! 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될 만큼 불탑이 많은 불교국가였다. 특히 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정한 뒤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많은 목탑을 조성하였다. 현재 까지 유적 발굴을 통하여 확인 된 백제의 불탑은 10여기에 달한다. 〈표 참조〉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성 년대가 밝혀진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능산리사지 목탑〈사진1〉이다. 충남 부여에 소재한 능산리사지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형식의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 절은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왕실사찰의 절터로서 일명 ‘능사(陵寺)’로도 불린다.
▲ <사진1>조성 연대가 밝혀진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능산리사지 목탑(기단부)

1993년 발굴조사에서 ‘백제금동대향로’〈사진2〉가 출토되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목탑터는 이중기단으로 5층으로 추정되며 남쪽과 북쪽에 계단시설이 있으며, 현재 백제문화단지 사비궁에 모형이 복원되어있다.〈사진3〉
▲<사진2> 능산리사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 <사진3>백제문화단지 사비궁에 모형 복원된 능산리사지목탑

1995년 발굴조사에서 중심부의 심초석 위에서 명문이 있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사진4〉이 출토되어 조성 연대와 불탑조성을 발원한 주인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명문의 내용은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로서,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에 만들어졌으며, 성왕의 딸이자 창왕의 누이 혹은 여동생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위덕왕(554~598 재위)의 이름은 창(昌)이며, 백제 제27대 왕으로, 성왕의 맏아들이다. 위덕왕의 ‘매형공주’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사리를 구해서 석조사리감에 봉안하고 목탑을 조성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기에 사리를 공양하는 신앙이 왕실에서 봉행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불교사상을 엿 볼 수 있는 큰 의미가 있다. 이처럼 능사의 목탑이 조성되고 10년 후인 577년에는 ‘왕흥사지(王興寺址)목탑’이 조성되었다.
▲ <사진4>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왕흥사지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백제의 국찰이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무왕조에 의하면, ‘三十五年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무왕35년(634년) 봄 2월에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었으며 채색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사루었다.’라는 기록과, 〈삼국유사〉흥법 제3 법왕금살(法王禁殺)조에 의하면, 백제 29대왕인 법왕은 왕위에 오른 뒤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반포하고 즉위 다음해인 600년에는 도승(度僧)30명을 두고 당시의 수도였던 사비성(현재 부여)에 왕흥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기 시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고자 불사를 시작하여 수십 년이 지나서 완공을 보았다.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도 했는데 산기슭에 위치하고 물가에 임하였으며 꽃과 나무들이 빼어나고 고와서 춘하추동 사철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절에 들어가 그 경치가 장엄하고 화려한 것을 구경하였다.
라는 기록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미륵신앙의 신봉자였던 무왕의 영향으로 왕흥사를 한때는 ‘미륵사’라고 호칭한 것인지 익산의 미륵사와 혼동한 것인지는 명확히 밝힐 수 없지만, 1934년 ‘왕흥(王興)’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됨으로써 왕흥사 자리임이 밝혀졌다.

그 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백제문화권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왕흥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4년 왕흥사는 탑지와 금당지가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1탑1금당식’의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 학자에 따라 이 목탑은 5층이라는 설과 3층이라는 설이 양분되어 주장되고 있다.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엄구는 목탑지 발굴 조사 때, 심초석의 남쪽 부분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부에서 발견되었는데, 높이 10.3㎝의 청동사리함과, 6.8㎝ 높이의 은제사리호, 4.6㎝의 금제사리병 등 3중〈사진5〉으로 구성되어 있다.
▲ <사진5>왕흥사지목탑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이처럼 삼중으로 사리를 봉안하는 것은 불교경전의 경설〈본 연재 제2호, 2014.1.15일자 참조〉에 입각한 당연한 신앙심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아함부’의〈대반열반경〉에는 부처님의 장례절차에 대하여 제자들이 질문하자 부처님께서는 전륜성왕의 장례보다 더욱 여법하게 행하라고 하시며 전륜성왕의 장례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전륜성왕의 유체는 새로 짠 무명과 고운 모직물로 몸을 천 겹을 싸서 금관에 넣고, 또 은관을 만들어 금관을 넣고, 또 동관을 만들어 은관을 넣고, 또 철관을 만들어 동관을 넣은 후에, 많은 미묘한 향유(香油)를 넘치게 붓고, 또 관의 안쪽에는 향을 바르고 꽃을 뿌리고,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찬패를 읊어 덕을 찬탄한다.

라는 경설에 의하여, 왕흥사지 사리함 외에도 동남아를 비롯하여 중국이나 우리나라 등 모든 불교국가에서 불탑을 건립하고 사리함을 봉안할 때 사리를 외함으로 3중, 4중으로 보호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왕흥사지 금제 사리병은 굽이 있고 아래로 갈수록 볼록해지는 호리병 형태로 만들었다. 뚜껑 가운데 보주형 손잡이가 있고 그 주위에 6개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은제 사리호는 목이 길며 낮은 굽을 갖춘 항아리 형태이다. 뚜껑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손잡이가 있고 주변은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청동제 사리함은 바닥이 납작한 원통형이며, 본체의 상부와 하부에는 두 줄의 선을 그어 3단으로 구분하였다. 사리함 뚜껑에도 같은 형태의 음각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에 달린 연꽃 봉오리 모양의 손잡이는 부러진 채 발견되어 현재는 복원을 하였다.

청동제 사리함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표면에 6행 29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사진6〉 명문은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라는 것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탑을 세웠고 2매였던 사리가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라는 내용이다. 이 명문은 몇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 <사진6>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새겨진 명문

첫째,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무왕 때인 634년에 왕흥사가 완공되었다고 하여 사리기의 기록과는 무려 57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잦은 전쟁 등 내외적인 정치적 상황이거나 또 다른 이유에서 불사가 늦어진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혹은 위덕왕은 사리를 구하여 사리함만을 먼저 조성하여 봉안하고 있으면서, 혜왕, 법왕으로 이어지는 불탑불사의 유훈이 비로소 무왕 때에 회향을 한 것으로도 이해 할 수 있다.

둘째, 위덕왕은 자신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난 왕자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불탑을 조성하였다는 사실이다. 경전 마다 설해진 불탑조성의 공덕을 백제 왕실에서는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실현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망(亡)자를 삼(三)자로 해석하여 세 명의 왕자를 위하여 탑을 조성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셋째, 사리의 증식을 통한 종교성의 강조이다. 2개였던 사리가 신기하게도 3개로 증식되었다는 사실은 종교적 성찰이 없이는 쉽게 이해 될 수 없는 것이다. 왕흥사 사리뿐만 아니라 사리가 저절로 번식한 사례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종종 일어났다. 그럴 때 마다 백성들은 이 신비한 사실에 감동하여 불심으로 결속하는 예를 보이곤 했었다. 특히 삼국이 대치되고 당의 세력을 견제해야 하는 백제의 위덕왕 치세시에는 불탑 조성의 불사를 통하여 국력을 다지고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왕흥사 목탑 불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라 짐작 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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