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이웃 돌보는 의사 조남인 보살 가족

조남인 원장(사진 가운데)을 비롯한 가족들은 어머니 대도행 보살부터 수십년 째 자비보시행을 실천하고 있다. 조 원장이 노인요양원과 복지관의 의료진료 등 주중 대부분 봉사를 나가지만 가족들이 가사일을 나눠가며 돕고 있다. 또 각자의 분야에서 봉사와 전법을 함께 하고 있는 불자가족이다. 사진 왼쪽은 남편 정지현 거사. 오른쪽은 딸 정인조 원장
16년째 요양원·복지관서 의료봉사
여든 나이에도 환자들과 함께 노래
“진료는 몸치료가 아닌 마음치료”

어미니 대도행 보살 불심에 감동
치과의사 손녀딸까지 봉사 나서
성운 스님 “4대째 보살행에 감사”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구랍 20일 토요일, 삼천사 인덕원 노인요양원의 어르신들의 방에서 난데없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진료봉사에 앞서 의료진이 노래를 부르는 것,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들과 지켜보는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환희심이 묻어난다.

특히 의료진을 이끄는 조남인 병원장(80·법명 능인성)에 대한 어르신들의 찬탄이 이어진다. 목수술을 하고, 말을 못하는 어르신부터, 기력이 없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까지 웃으며 다가가는 손길에 서로 웃음꽃이 피어난다.

“환자들이 너무 예뻐요. 할머니들도 저만 보면 좋다고 뽀뽀하고 난리에요. 사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저를 너무 좋아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니까요.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것도 복이 많은 것 같아요.”

조남인 병원장은 가정의학 전문의로 개인병원을 운영하다 의사인 딸에게 병원 운영을 맡기고 1997년부터 재능기부를 시작했다. 밝게 웃는 그 모습에서 자비보살의 모습이 비춰진다.

조 원장과 함께 하는 의료진은 총 6명. 정서옥·안옥분·이영자·이경자·송재희 씨로 30년 이상 근속한 수간호사들로 이뤄진 이른바 ‘드림팀’이다. 이들의 활동은 벌써 16년째다. 자원봉사자들은 서부병원, 서울시의료원 등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수간호사 출신들로 은퇴 후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평소에 서로 여느 동네아주머니들처럼 수다를 떨다가도 진료시간에는 처방과 차트작성, 주사, 조제 등의 역할을 나눠 현역과 다름없이 전문적으로 일한다.

목수술을 해 말을 할 수 없는 어르신이 조원장을 보며 활짝 웃고 있다.
조 원장은 의료팀과 함께 토요일과 수요일에는 삼천사 인덕원 노인복지시설,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삼천사가 수탁 운영하는 은평노인종합복지관, 돌봄노인요양원 등 매주 5곳의 복지관을 찾아 하루 100여 명의 환자를 돌본다. 조 원장을 비롯한 이들 봉사단은 복지관 방문이 어려운 어르신들은 직접 찾아가는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검진·처방·주사·조제를 해주고 일일이 등을 쓰다듬어 안아주는 것은 사실 고령의 이들에겐 힘든 일이다. 요양원에서는 직접 변비에 걸려 고생하는 어르신들이 쾌변을 보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용변 후에는 씻겨 드리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을 목욕시키는 일도 진행한다.

여든의 나이에도 건강이 좋지 않은 어르신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환자들을 가족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따듯한 관심, 말 한마디에요. 사실 이들이 아픈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사회에 있을 때 고위직에 있던 분들이건, 힘들게 사셨던 분들이건 몸이 아픈 자신을 모시지 못하는 자식들에 대한 마음 등 아픔을 간직하고 있어요. 가만히 가서 밝은 모습으로 손을 잡아주면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치매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어르신들이라도 따듯한 마음은 압니다. 그 마음이 전해져서인지 항상 저희를 기다려요.”

조 원장을 비롯한 의료팀은 어르신들이 많을수록 일도 늘어난다. 인덕원 노인복지시설 자원봉사자실의 벽 한쪽은 봉사 스케줄로 빽빽하다.

하지만 조남인 원장은 “병원을 운영할 때보다 봉사하는 지금이 더 좋다”며 “그동안 의사생활 중에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조남인 원장과 의료팀. 이들은 16년간 함께 손발을 맞춰 봉사해오고 있다.
조 원장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몸이 힘들어지지만 꾸준히 봉사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기다리는 노인들이 많아 봉사를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한다.

기자가 찾은 이날에는 기초수급자인 한 어르신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남인 원장은 어르신의 손을 잡고 편안히 좋은 곳에 가실 것이라며 다독였다.

조 원장은 “요양원은 대부분이 중증환자들이고, 연고가 없는 분들도 많다”며 “생의 마지막 과정으로 있는 분들이 많기에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차남 인덕원 노인요양원 원장은 “조남인 원장님은 집으로 말하면 용마루 같은 분”이라며 “조 원장님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정말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조남인 원장이 기초수급자인 한 어르신의 임종을 지키고 있다. 40년간 사찰에서 봉사한 이 어르신은 연고가 없었다.
어머니 대도행 보살의 감화로 불교에 입문

사실 조남인 원장이 어려서부터 불자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서초구의 자택에서 다시 만난 조남인 원장은 불법에 귀의해 살아가는 평범한 불자 가정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 사는 거야 다른 불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죠. 부처님 법에 따라서 그냥 사는 거죠.”

하지만 이들 가족은 유마거사라 칭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남편 지원 정지현 거사와 능인성 조남인 원장, 딸 정인조 씨는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불법을 닦고 또 실천하고 있다.

특히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한 남편 정지현 거사는 1950년대부터 불교를 공부해오며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전법활동을 펼쳤다. 청담 스님이 조계사에서 강연한 모습에 발심해 현직에 있을 때는 동국대 총장 백성욱 박사의 강연 등 유명한 강의라면 주변의 이들을 이끌고 발 벗고 찾아갔다. 딸인 정인조 씨도 병원 운영 틈틈이 캄보디아, 티베트 의료봉사를 비롯해 우리는선우 활동 등으로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들 가족이 불교에 열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불자이지만 마음뿐이었다고 정지현 거사는 고백한다. 온 가족이 실천하는 불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독실한 불자였던 조 원장의 어머니인 대도행(大道行) 보살의 영향이다. 대도행 보살은 삼천사 성운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을 십시일반 후원하고, 지역의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보시행을 펼쳐온 보살이다.

“어머님은 평소에도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먹을 게 없다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없는 곳간에도 모두 털어 도왔던 분이셨어요. 특히 스님들이 학비며 생활비 등이 부족하다고 찾아오면 마을에 내려가 돈을 빌려서 보내드리곤 하셨죠.”

정지현 거사는 “평소 장모님의 자비실천행을 보며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모님은 평소에 인과의 법칙, 그리고 업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큰아들이 어려서 아팠는데 10살 전에 수술을 3번이나 했어요. 장모님의 추천으로 선업을 쌓기 위해 방생을 하며 불교에 대해 새롭게 느끼게 됐습니다. 보시행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요. 결국 아이도 건강해졌죠. 나중에 한마음선원 대행 스님을 찾아가니 스님께서 아이 옆에 화엄신장이 지키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니 대도행 보살이 남긴 편지에는 출재가와 남녀를 떠나 용맹정진할 것을 당부하는 글이 담겨있다.
조 원장이 봉사의 삶으로 나서게 된 계기도 어머니 대도행 보살의 입적이 계기였다. 어머니의 자비심이 넘치는 따듯한 삶의 모습을 보니 불교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열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비보시행은 자녀들과의 갈등을 낳기도 했다. 조남인 원장은 어머니와의 일화를 털어놨다.

“제가 의사생활을 하며 받은 월급을 어머니에게 맡겼는데 항상 어머니에게 가보면 없었어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썼기 때문이었죠. 젊었을 때는 ‘다른 집은 자식 잘되라고 훔쳐서까지 자식 앞으로 하는 세상인데, 우리 집은 반대’라며 불만이 많았죠.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당시 조남인 원장은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대도행 보살은 딸이 낙태수술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조남인 원장은 “수많은 태아들에게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그 업을 자신이 대신 풀어주길 바라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조 원장이 의료봉사에 나서게 된 것도 어머니의 49재에서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의 법문이 결정적이었다. 대도행 보살과 생전에 인연이 있는 설정 스님은 조 원장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삼천사에 자리한 대도행 보살의 사리탑. 성운 스님은 대도행 보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발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큰 스님께서 ‘도둑질 한 업과 착한 일을 한 업은 상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셨어요. 어머니께서 행하신 선업은 그 업대로 어머니에게 가서 좋은 곳으로 이미 가셨다고 하시면서 자식과의 업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에게 어머니를 용서하겠냐는 말을 하시는데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용서할 것이 있나요. 어머니 덕분에 이렇게 지내는데……. 그때부터 저절로 봉사의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조 원장은 만학도의 마음으로 산부인과 전문의 외에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도 취득했다. 그길로 의사의 길을 걷고 있던 딸에게 병원을 물려주고, 봉사의 길로 나섰다.

“처음에는 얼마만큼 일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이제는 정이 들어서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픈 어르신들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남편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봉사활동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고 집안일도 도와줍니다.”

딸 정인조 씨는 “할머니께서 생전에 보이신 모습은 집안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며 “이모님이 계신데 밴쿠버 서광사에서 신도회장을 하실 정도로 독실하시다. 사실 할머님의 법은 그쪽으로 전해졌다”며 웃었다.
정인조 씨는 대도행 보살이 남긴 편지를 소개하기도 했다. ‘용맹정진’이라 붙여진 편지에는 ‘불타의 진리는 언제나 새롭다. 망망한 대해는 모진 풍파에 돛대가 부러져도 건너야 할 길이다. 깨끗하고도 아름다운 연꽃, 우리의 희망은 이와 같다. 남성도 여성도 분별치 말라. 부처님도 보살님도 여기서 생하신다’고 적혀있었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노인요양원
성운 스님과의 인연으로 재능기부 나서

대도행 보살과 삼천사 회주 성운 스님과의 인연은 봉사의 길을 발원한 조 원장에게 방향을 제시해줬다. 삼천사 성운 스님은 젊어서부터 대도행 보살을 어머니처럼 모시며 따랐다. 대도행 보살은 스님들을 시봉하는 한편, 혹여 다른 길로 새지 않을까 스님들이 여법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질책도 많이 했다고 한다. 조 원장은 인덕원 노인요양원이 들어서기 전부터 삼천사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성운 스님은 “대도행 보살은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하고 불법을 따르려고 노력한 한 분”이라며 “자신이 출가해 수행하고 싶었는데 수행을 못했기 때문에 다른 스님을 시봉해 큰 스님으로 만들고자 원을 세우셨다”고 회고했다. 스님은 이어 “임종 때 활짝 웃는 모습으로 ‘큰 스님이 되셔서 널리 부처님 법을 전파해 달라’는 마지막 남기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스님은 “어머니에 못지않게 조남인 원장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여든의 노구에도 복지시설에도 자발적으로 재능기부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주변 의사와 간호사들도 개종시켜 부처님 법을 믿고 실천하게 하는 등 전법에도 앞장서고 있다”고 전했다.

조남인 원장은 “평소 어머니는 스님들이 큰 스님이 되도록 주변에서 힘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미약하지만 힘 닿는 데까지 스님을 도우며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조남인 원장의 가족들은 새해를 맞아 새롭게 자비보시행의 서원을 세우고 있다. 멀리 미국에 있는 아들도 불심을 유지하며 생활한다고 한다. 봉사를 통해 금슬이 더욱 좋아진 부모님을 보며 딸도 존경스럽고 좋다는 말을 건넨다. 치과 인턴과정 중인 조남인 원장의 손녀딸도 요양원을 찾아 봉사를 한다. 뒤돌아 나오는 길, 연꽃 향내가 그윽하게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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