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이익하게 마음을 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 그림 최주현

‘말은 하면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이 있기 이전에 모든 사람들이 천차만별로 아픔을 당하고 있는데, 말은 하면 뭘 하나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듭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하늘을 쳐다보고 어떤 때는 눈물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는 어떻게 걸어가는지 그것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냥 무심히 가는 걸 보면 아예 말하기도 싫을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여러분과 같이 나도 아픔을 겪나 봅니다. 보면 보는 대로 딱하고 그렇게 안됐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그래서 좋은 말을 하기 이전에 생활 속에 여러분과 같이 뛰어들어 같이 아픔을 나누고 같이 행을 해서 조금이나마 아픔이 해소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때로는 크고 작은 일을 다양하게 이끌어 나가면서 삶이 좀 더 편리해지고, 화목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온 집안에 따뜻하게 돌아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에서 이렇게 이 말 저 말 하고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답답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답답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죠.

집안이 화목지 못하거나 또는 한 가정 속에서 누가 괴롭다면은 서로가 한마음이 돼서 이끌고 갈 수 있어야 나도 쉽고 서로가 다 쉬울 것을, 그렇지 못한 채 그저 자기 하나만 알고 자기 아픔만 알고 마음으로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서로 뭉치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집안에서 조금만 누구가, 부부가 서로 한마음이 됐더라면 내가 더욱 쉬울 텐데, 나도 쉽고 그 집도 쉽고 서로가 쉬울 텐데 이렇게 답답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이거는 높은 부처님의 뜻과 말씀이 있기 이전에 우리들의 아픔 속에서, 그 조그마한 소용돌이 속에서 알아야만 하죠. 그걸 모른다면 부처님 말씀의 그 큰 뜻도 알 수가 없는 거죠.

여기 처음 오던 해입니다. 어머니가 혼자 딸을 하나 데리고 사는 집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상당히 완고하셨습니다. 아버지 없는 대신으로 엄마 몫 아빠 몫을 다 하면서 딸을 귀중하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따님이 참 예쁘장하고 잘생겼는데 대학을 다니던 도중에 어느 사람을 사랑했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알고는 “왜 엄마도 모르게 아무나 그렇게 만나러 다니느냐? 왜 사랑할 것 같으면 탁 털어놓고 그 집 부모와 서로 알게끔 하지 않느냐.” 하니까 엄마가 알면 거부할 거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깐 따님을 늦게 다니지 못하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나가고는 싶은데 나갈 수는 없고 그러니깐 음료수에다가 잠드는 약을 좀 타서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조금, 그저 주무실 동안에 내가 갔다 오리라 생각했는데 그만 너무 약을 많이 탔던 모양입니다. 나갔다 들어오니까 아, 어머니가 돌아가셨잖습니까. 그런데 그 따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보니깐 이제 그 사랑하는 남자와 자기 마음대로 하게끔 됐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끌어들이고 어린애를 하나 낳았습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그쪽 남자의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여자 쪽 부모도 없으니 거기서 그냥 살도록 했습니다. 결혼을 시켜서요.

그랬는데 어느 날은 어머니가 꿈에 턱 나타나시더니 “네 사랑을 위해서, 네 남편을 위해서 나를 죽이고 살맛이 나느냐?” 하시더랍니다. 너 하나 잘못된 생각으로 그것이 어느 만큼 화를 미치는지 너는 짐작도 못할 거라고 하면서 “나는 저 사람이 싫다.” 그러더랍니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 깼답니다. 그런데 사흘 되던 날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배고 있던 어린애를 낳았는데 어느 날 그 집의 시어머니가 또 꿈에 보이더랍니다. 시어머니가 하는 소리가 “네 남편을 잡아먹고 잘 살 것 같으냐?” 하더랍니다, 또. 그 시어머니는 살아 있는데도 꿈에 보이더니 어린애를 빼앗아서, 내 자식이니깐 내가 데리고 간다고 그러면서 빼앗아 안고선 물로 들어가더랍니다.

그 꿈을 깨고서는 앞서도 어머님이 그랬는데, 시어머니로 보이면서 이렇게 되니까 너무 놀라서 어린애를 하루 종일 부둥켜안고선 놓지를 않았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경기를 하면서 숨을 몰아쉬더랍니다. 그래서 병원으로 달려가니까 병원에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그냥 진찰하는 도중에 죽고 말았더랍니다. 그 후엔 혼자 살다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후에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 한 생각이, 그 따님의 한 생각이 그런 불씨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끊어지느냐 하면 끊어지지 않습니다. 내내 연결되고 얽히고설키게 되죠.

우리에게 현재 생기는 문제들은 우리들이 지어 놓은 것이지 지금 새삼스럽게 다가온 게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가 끊는 게 아니라 녹이면서, 앞으로 개척하고 계발해서 내 마음의 차원을 질적으로 높여 가야 합니다. 그렇게 질적으로 높아졌을 때 미래에 다가올 것을 다 녹이고 윤회 속, 유전 속, 업보 속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벗어나야 어디고 아니 닿는 데가 없는 손 없는 손, 눈 없는 눈이 돼서 방방곡곡 어디에고, 누구한테나 이익을 줄 수 있고 불쌍한 사람들을 다 거두어 줄 수 있는 능력의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거죠. 남을 건질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보살행이거든요.

우리가 꼭 머리를 깎고 안 깎고 간에 생활 속에서 이익이 없다면 왜 종교를 가져야만 합니까? 종교라는 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내 마음으로부터 이루는 것이고 내 마음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넓으면 넓은 대로 우리가 한데 합쳐진 공(空)한 세상을 공하게 보고, 공하게 돌아가는 이 살림살이를 공한 데다가 다시 맡겨 놓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 산다면 급급하지도 않을 겁니다. 가난해서 밥을 굶는다 하더라도 급급한 생각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옛사람 말처럼 ‘나물 먹고 물 마시니 이만하면은 만족할 것을 그렇게 그랬다.’고 말씀하실는지도 모르죠.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도 되지 않고 말입니다. 없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압니다. 각자 없는 것도 더 잘 알고 아픈 것도 더 잘 알고 매사의 문제들을 본인 자신들이 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픈 걸 알기 때문에 어딘가 모르게 공심(共心)으로 돌아가는 능력으로써 우리는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여축해서 먹으려고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이겁니다. 여축해서 먹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오히려 구덩이에 빠지는 수가 허다합니다.

이 부처님 법이라는 건 그렇게 묘한 법이고 광대무변한 법이며, 불가사의한 법입니다. 그리고 그 법이 우리들 생활에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생활에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생활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그 마음의 능력은 누가 그것을 좇아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보배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바깥으로 돌고 ‘내가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 그만 거기에 눈이 어둡게 되고 귀가 밝지 못하게 되고 또는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뭘 하나.’ 하는 생각에서 회의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이 법을 소상히 알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맘대로 죽습니까, 살았다고 맘대로 삽니까? 그렇지만 그런 틈바구니에서도 한생각은 저 강물 흐르듯이 여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물은 없어지라 해서 없어지고 생기라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죠? 물은 우주를 덮고도 남고 싸고 돌아도 남습니다. 그렇듯이 한생각의 법도 여여합니다.
또 물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지혜롭다면 내 몸의 피도 물 흐르듯 흐르고, 만약 지혜가 모자란다면 피도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피가 잘 소통되질 않는다, 어디가 잘못됐다, 눈이 어둡다 하는 게 다 어디서 오겠습니까? 내 한생각이 매사에 적합하지 않게 자꾸 일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속상해하니까 은근히 그것이 누적이 되는 것입니다. 누적되어서 찌꺼기가 되고, 이렇게 마음이 지혜롭지 못하니까 위막이나 장막이나 간막에 음식을 먹어도 찌꺼기가 항상 누적이 되게 돼 있습니다. 마음이 누적이 되니까 역시 물질도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병이 오는 것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군데가 아프다 그래서 꼭 거기서 고장이 난 게 아닙니다. 딴 데서 고장이 나서 거기까지 오는 것이지.

이런 문제 등등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우리 생활 속에 다양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마음이 천차만별로 찰나찰나 화(化)해서 돌아가는 이 만법의 진리를 우리는 생활 속에서 알아야 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이 이렇게 돌아가는 진리를 말입니다. 그게 바로 참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 한 번만 속 끓여 보십시오. 숨이 차고 벌써 눈이 게슴츠레해지고 귀가 멍멍하고 보이는 게 없고 누구가 잘하든 못하든 벌써 보면 신경질이 납니다. 이런 지경에 이를 때는 자기 몸을 자기가 긁어서 피를 내는 거나 같죠. 그러고 아파서 애를 쓰는 거죠.

어저께 텔레비전에서 ‘추적 60분’을 보니까 맨손으로 수술하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여러분도 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너무 요지경 속 같아서….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거는 요지경이다 이거예요. 부처님 법은 손이 가지 않고도 손이 갈 수 있는 마음의 법인 것이지 요술꾸러기처럼 하는 그것은 마술과 같은, 인간의 자비성이 아니라 그것은 사기성이에요. 그런 예가 있었다고요. 그랬는데 어저께 텔레비전에 그런 문제들이 나오더군요. 그러니 얼마나 요지경입니까? 인간의 마음들이 진실치 못하고 남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낫는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중한 것은 마음입니다.
또 그렇게 남을 속여서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속고 또 속고…, 자기한테도 속고 남한테도 속고. 그것은 허영심과 욕심 때문이 아닐까 봅니다. 또는 기독교인들이 안수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뼈가 부러지도록 안수 기도를 해서 죽이고 또 안수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도 그냥 마음을 이리저리 돌려서 마취시킨 것처럼 해 놓고선 하는 문제들….

또 한 가지는 온통 날뛰고 손을 들고 입으로 떠들고 그러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너희가 마구니 짓을 하기 때문에 죽어서 요다음에 다시 생산이 된다 하더라도 마구니로밖에는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이 있음으로써 선신도 있고 마구니도 있지, 인간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느니라. 너희가 마음, 행, 말 이 세 가지를 다 하기에 달린 것이다.” 라는 얘기죠. 그렇게 별나게 마음을 쓰고 별나게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에이그, 세상은 요지경 속이야. 저 사람네 마음들이 왜 저럴까? 저렇게 짐승같이 사는 사람은 요다음에 짐승의 모습밖엔 또 쓰고 나올 게 뭐 있겠나.’ 이러는 겁니다.

물론 부처님이 법을 가르쳐 주시고 그 뜻을 행하시고, 행하는 걸 가르쳐 주시고, 여러분이 다 그렇게 해 나왔으니 선종(善種)일 테지만 그 도리를 지키지 못하고, 인간 도리도 지키지 못하고 생활 속에서 진실함이 없는 사람네들이 있기 때문에 선신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마구니도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부처님 제자라고 한다면 바로 부처님은 자기 마음 가운데 깊숙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가 너무도 잘 압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이렇게 나도 약을 팔고 있습니다마는 이 약 파는 소리가 한데로 떨어지지 않도록, 여러분도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그 점을 아시고, 나한테 닿지 않는 말이라고 해서 비웃고 나한테 닿는 말이라고 해서 간직하고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스무드하게 그거는 그것대로 받아서 한번 굴려놓고 좋은 말도 한번 받아 굴려 새겨 놓고 항상 그릇이 비어야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럼 질문하실 게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예전에 큰 조사 스님네들은 말씀도 안 하시고 법상에 앉으셔서 주장자를 한번 꽝 치고선 “이 눈이 보이느냐.” 하시곤 낚싯밥을 던져서 건지게끔 하는 말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은 너무들 말로는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부처님 법이 어떤 것이냐.” 하면은 손가락을 드는 사람도 있고 춤을 추는 사람도 있고 일어나서 걸음 걷는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많습니다. 그리고 “참 맛이 좋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물을 떠다 놓는 사람도 있고 합장하는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많아요. 그것은 생략하고, 그런 말을 아무리 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가슴에 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로 여러분의 그 깊은 잠재의식 속에, 참나가 공(空) 안에 들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에게 맡겨 놓으라고 하는 그것도 내가 공했고 이 세상이 다 공했으니 포함해서 공한 주인공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게 보이는 게 있기 때문에 부처도 이루고 세상이 공한 줄 알았고 나도 공한 줄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일체 생활을, 들이고 내는 것을 다 몰락 놓고 ‘다 당신이 하는 거, 들이고 내는 걸 바로 당신이 하는 거니까 당신이 다 알아서 길잡이가 돼 주실 거다.’ 하고, 또 길잡이가 될 거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도 안되는 거는 나를 테스트해 보는구나 하고선 놓고, 또 되는 거는 감사하게 믿고 놓고. 모든 것을 맡겨 놓을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은사 아닌 은사, 참 은사를 만날 것입니다. 진짜 은사. 자기를 수시로 이끌고 다닐 수 있는 참자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가졌을 때 그것을 한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죠? 땅에서 싹이 나오는 거와 마찬가지고 어른들이 어린애 낳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입니다. 어린애를 출산했을 때 갓 나와 가지고 어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한 소식 얻었다 할지라도 어린애 갓 낳은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내가 한 소식 했다는 말 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내가 갓 나와서 사리를 알고 판단을 할 정도로 커졌을 때는 이 세상 돌아다니면서 크고 작은 걸 알기 때문에 자기가 체험하면서 놓고 다시 또 체험하면서 놓고, 참자기가 그렇게 거침없이 여여하게 돌고 행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어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한 소식 얻었다고 결론지어서 꽂아 놓지 말라는 얘깁니다. 한 소식 얻었다고 해서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될 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고 늙었다가 또 애가 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우리는 어른이 하는 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심부름도 해 주고 심부름 하는 걸 받기도 하죠. 우리가 지금 높은 일만 합니까? 어린애를 낳아 가지고 똥 기저귀도 빨고 똥을 씻기도 하고, 어린애를 기를 때에 별의별 일을 다 합니다, 궂은 일을. 어른이 돼서 애의 밑을 씻어 줘야 하고 애는 애기 때문에 또 애 노릇을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높아도 높은 게 없고 얕아도 얕은 게 없이 평등한 진리의 그 뜻을 항상 생활 속에서 파악하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스스로 샘물이 솟듯, 솟아나는 그 샘물의 맛을 알고 역력하게 나를 끌고 다닐 수 있는 나의 참주인공이 진짜 생기는 것입니다, 홀연히. 그저 생산이 되기만 하면은 그때 가서는 언젠가는 성불할 단계가 오고 언젠가는 열반할 단계가 오죠. 어린애만 낳아 놓으면 저절로 어른 되고 늙어지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서 그 차원을 알고 차원이 높아져서 나중엔 백지로서 크고 작은 게 없고 내세울 게 없을 때는 또다시 요다음에 모습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여러분이 내 모습이기 때문에 따로이 모습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자유스럽게, 여기만 내 집이 아니라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다 내 집이니 그저 한 찰나에 이 집도 내 집이요, 저 집도 내 집인데 따로이 내가 내 몸을, 내 모습을 그려서 또 내놓을 게 뭐 있겠습니까?

알아듣기 쉽게 요렇게 말을 해 드리는 건데 이 차이가 어느만큼 크고 귀중한 뜻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죠. “이 도리를 완벽하게 안다면 내가 당신이 될 수 있고 당신이 내가 될 수 있으니….”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모습은 다를지언정 마음이야 어찌 다를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마음이 둘이 아닐진대 당신 하나가 이 나라의 임금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어떠한 문제가 잘못돼 돌아갔을 땐 내가 그 대통령 속에 들어가서 내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거를 잘 지켜 나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커버해 나갈 수 있고. 대통령의 마음도 그렇겠지마는 그 마음과 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마음으로부터 오관을 통해서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기가 잘못 끌고 간다는 걸 알게 됨으로써 그것을 확 고쳐서 잘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모습을 따로이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매한가지인 이런 세상에 내가 그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그 속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여기 저기 나 아님이 없다 이겁니다.

그 뜻은 미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선신에 이르기까지, 부처에 이르기까지 어디고 아니 닿는 데가 없이 내 몸 아닌 게 없다는 얘깁니다. 내 자리 아님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 이런 것이 옳다 저런 것이 옳다, 이런 것이 좀 낫다, 이것은 정법이 아니다, 사법이다, 무당이다, 이렇게 흉볼 것도 없고…. 만약에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높이 보이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런 거를 흉보지 말고 ‘저런 거는 이렇게 해야 할 텐데….’ 마음속으로. 겉으로 입 밖에 내어 구업을 짓지 말고 항상 이익하게 마음을 내 주는 데 목적이 있다는 얘깁니다.
어린애들을 기를 때에 사랑하는 자녀들이라면 그 자녀들이 잘못한 거를 드러내겠습니까? 도둑질을 했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숨길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내 자식을 사랑하듯이 숨기면서 거죽으로는 말없이 안으로 굴리면서 이익하게 마음을 내 주는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며 부처님의 뜻이며 바로 보살의 행이라고 봅니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우리가 남을 해하게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아마도 억겁을 거쳐 가면서 요만한 거 하나라도 내가 한 것만치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세상에 만약에 조그마한 소나무가 없다면 중치 소나무가 없고 중치 소나무가 없다면 큰 소나무가 없고, 또 삐뚤어진 게 없다면 바로 선 게 없을 겁니다. 조화가 이렇게 이루어져서 진리라고 이름을 지었고 산천초목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자연의 조화가 이렇게 보기 좋다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삐뚤어진 사람, 똑바로 곧게 올라간 사람, 옆으로 굴려진 사람, 땅 끝에 붙어서 자라지도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게 많습니다.
사람의 모습은 그렇지 않지만 마음이 그러해서 우리의 삶도 그렇게, 그런 행을 하면서 돌아가고 있는 거죠. 그 마음이 중하지 몸이 중한 게 아닙니다. 마음에서 비롯되어서 모든 것을, 몸은 행하게 되고 앉게 되고 서게 되고 말하게 되니깐요. 우린 부처를 이룬다 하기 이전에, 깨치기 이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깨쳐도 ‘아하, 다 이렇게 하나하나 나투어 가면서 놓아 가고 돌아가는 이 텅텅 빈 그릇을, 괜히 여기다가 내 마음으로 담아 놓고 무겁게 애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 것입니다.
하나하나 이렇게 우리가 자세히 서로 토론하지도 않고 담선법회를 안 한다면은, 주장자를 열 번을 들면 뭘 하고 백 번을 들면 뭘 하고, 또 저 해가 거꾸로 있어서 땅 속에 있다고 해도, 저건 해가 아니라 똥덩이라고 해도 여러분이 그 뜻을 알아야 어떻게 해 보죠. 그 말은 해서 뭘 합니까? 그것은 약 파는 데 쓰이는 방편이라고 봅니다. 뭐든지 그 방편에 속지 마시고 진실하게 내가, 조그만 거라도 진실하게 체험하면서 내가 한번 굴려 보고 지켜보고, 지켜보고 또 굴리고 하다 보면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해 보십시오. ‘부처님 법에 하고 안 하는 게 어디 있느냐.’ 이러지마는 우리가 만약에 마음만 있고 육신이 없다면 그것은 혼백만 있는 거지 실상이 못 됩니다. 상이 없다면 부처를 어떻게 이룹니까? 움죽거림이 없어서 어떠한 계발도 할 수가 없고 더 높은 차원의 지혜를 넓힐 수가 없어서 부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이 있을 때 비로소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그 차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높다고 높다랗게 앉아서 움죽거리지 않는 게 아닙니다. 거기엔 바로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몸으로 움죽거리며 행하는 것이 있고, 생각하고 몸 아닌 몸으로서 움죽거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한생각이라는 건 모습도 없거니와 상대방이 모습을 바랄 때에 그 모습을 보여 주는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산신이시여, 나를 도와주소서!’ 할 때에, 마음은 착하고 곱고 인정 있고 진정한 사람인데 고만 모르니깐 ‘산신님, 나 좀 살려 주시오.’ 한다면 그 사람은 모르니깐 산신의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뿐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납득하고 ‘어이구, 산신이 도와주셨구나.’하는 믿음이 생길 거 아닙니까? 그래야 믿고 방황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러는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으로 보이고 산신으로도 보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로도 보이고 마리아로도 보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걸로 인해 믿게 하고 알게 하는 거죠. 지성스런 그 마음으로 산신이 나타나서 나를 살려줬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부처님을 믿게 되는 미끼가 돼 가지고 다시금 이 길을 더위잡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공부를 하게 되면 ‘아, 그 모습도 없는 것이구나. 내 마음에서 스스로 모습이 천차만별로 화하는 거로구나.’ 하는 걸 알게 되겠죠. 그때는 바로 ‘자기가 마음 쓰기에 달려 있고 참나의 생명수의 맛을 보게 하는 나의 스승이 바로 내 마음에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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