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下

▲ 쌍계사 돈오문 오르는 계단
진감국사와 최치원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한 사람의 뛰어난 행적이 떨치는 향기가 무궁하면 그 역사 또한 끝이 없는 것이다. 쌍계사의 무궁한 역사, 그 출발점에 진감국사와 최치원이 있다. 진감국사는 중국에서 수학하고 돌아오며 범패의식을 들여와 이 땅에 봉불(奉佛) 의식의 비조가 되었다. 역시 중국에서 유학한 최치원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학식과 문장으로 신라사회의 우뚝한 거목이었다. 그가 남긴 많은 문장 가운데 빼어난 비문 4건을 사산비명이라 하는데, 쌍계사 진감국사 비문이 그 중 하나다. 비문의 말미, 최치원이 찬한 진감국사 비명의 앞부분은 이렇다.

 

두구선나(杜口禪那) 귀심불타(歸心佛陀) 귀심불타(歸心佛陀) 근숙보살(根熟菩薩) 홍지미타(弘之靡他) 맹탐호굴(猛探虎窟) 원범경파(遠泛鯨波) 거전비인(去傳印) 래화사라(來化斯羅) 심유선승(尋幽選勝) 복축암등(卜築巖?) 수월징회(水月澄懷) 운천기흥(雲泉奇興) 산여성적(山與性寂) 곡여범응(谷與梵應) 촉경무애(觸境無碍) 식기시증(息機是證)

 

입 다물고 선정 닦으며/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나니/ 근기(根機)가 성숙한 보살의 차원에서/ 도를 넓힐 뿐 다른 뜻이 없었다오/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고/ 고래 물결에 멀리 배를 띄워/ 가서는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와서는 신라를 교화했다오/ 그윽한 곳 찾아 승경을 가려/ 바위 벼랑에 터 잡고 쌓은 뒤에/ 물과 달을 보며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샘물에 감흥을 부쳤다오/ 산은 성과 더불어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골에는 범패(梵唄) 소리 메아리치는 가운데/ 부딪치는 경계마다 걸림이 없었나니/ 기심(機心)을 쉬는 이것이 증입(證入)이라.

 

시로 영그는 선비와 스님의 교류

결국 쌍계사의 역사는 진감국사와 최치원이라는 빛나는 영웅을 발판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그 역사의 흐름을 이어 온 후대 사람들은 쌍계사에서 그들의 업적을 찬탄했고 쌍계사 자체에 대한 경배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

 

운간은약수고잠(雲間隱約秀孤岑)

정대유인불염심(正對幽人不染心)

천분설화송경습(泉噴雪花松徑濕)

일홍람기석당심(日烘嵐氣石堂深)

한회발화향생전(寒灰撥火香生篆)

정야지주경발음(靜夜持珠磬發音)

연좌백년변도안(宴坐百年?到岸)

란번천게시장음(瀾?千偈試長吟)

 

구름 사이 숨었구나 빼어난 봉우리

그윽한 사람 상대하여 마음도 깨끗하네.

샘물은 하얗게 뿜어 오솔길 적시고

햇살은 아지랑이 쪼여 석당에 깊구나.

차가운 재에 불씨 찾아 향을 피우고

고요한 밤에 염주 잡으니 종도 울리네.

백 년을 좌선하면 피안에 이르나니

번뜩이는 일천 게송 길게 읊조리누나.

 

조선 중기 유학의 높은 봉우리였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시다. <고봉집>제1권에 전하는 이 시의 제목은 ‘쌍계사 승려 성북에게 주다(贈雙溪僧性默)’이다. 고봉은 이 제목 아래 두 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 중 두 번째 시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논쟁’을 12년 동안 이어가며 자신의 학문 세계를 드높였던 당대 유학의 거봉이 쌍계사 스님과 교분이 있었다는 것부터 흥미롭다. 시도 맑고 그윽한 가운데 스님에 대한 존경과 정감이 절제 속에 드러나고 있다.

 

상인상방악양변(上人相訪岳陽邊)

비석선선별의견(飛錫僊僊別意牽)

산사중봉근오어(山寺重逢勤晤語)

상종편욕도여년(相從便欲度餘年)

 

스님이 악양루 가로 나를 찾아왔다가

표연히 떠나갈 제 이별의 정 아쉬웠지.

산사에서 다시 만나서 정담을 나누니

서로 사귀며 남은여생 보내고 싶구려.

 

기대승 보다 100년 뒤에 태어난 이현일(李玄逸 1627~1704)도 쌍계사 스님과 교류하는 가운데 스님과 잠시 헤어지며 아쉬움을 겪고 다시 쌍계사에서 스님을 만나 반가운 마음을 이렇게 시로 승화시켰다. 이 시의 제목은 ‘쌍계사 총상인에게 주다’이며 그의 문집 <갈암집>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서로 사귀며 남은여생 보내고 싶다’는 선비의 마음이 그윽한 산사와 넉넉한 스님 앞에서 한 무더기 목단으로 피어나는 듯하다.

 

연재를 마치며

1년, 50회에 걸쳐 ‘산사에 깃든 선비의 시심’을 더듬어 보았다. 한시는 고사하고 현대시에도 밝은 눈을 갖추지 못한 채 시작한 이 연재가 한 해를 이어오면서 받은 사랑은 과분하기 그지없다.

이 연재를 통해 필자는 물론 독자들도 △사찰에 전하는 시는 아주 많다는 것. △유학을 연마하는 선비들이 사찰을 수행의 공간으로는 여기지 않았더라도, 수행자들에게 더 없이 귀한 곳이 절이라는 것을 함께 인식했다는 않았다는 것. △산사의 풍경과 역사 그리고 스님들의 수행이 선비들의 현실적 갈증을 적셔주는데 적지 않은 감로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뿐이겠는가? 사찰이 시 창작의 문화공간으로 크게 활용되었다는 사실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글에 표현되지 않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에 동의한다면, 지난 1년의 탐구가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문들이 많이 인용되었고 기타 개인의 문집과 학위논문 등 다양한 자료들이 참고 되었음을 밝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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