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꿀 때 꿈꾸는 줄 아는 것이 진짜 공부다

내면적 멋이란

환희심에서 생겨난다.

스스로 기쁨을 느낄 때

나와 남과의 분별 사라지고

천지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며

영원한 참삶의 환희에 젖게 된다.

여기에 무한성과 영원성이 있다.  

일전에 내가 이걸 얘기했습니다. 언젠가 내가 이런 얘길 해 드려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말씀드릴 것은 연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여러분들이 다 아세요. 다 아는 겁니다. 아는 건데 문제는 어디다 두는 거냐 하는 건데, 이 불법은 생사문제 해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사문제를 해결해. 누리의 지도리를 우리가 걷어잡아. 이것인데 그리 하는데는 공부하는 내 입장으로 봐서 어떠한 경계에 닥치는 것이 이 공부가 되느냐 안 되느냐 이걸 내가 말씀을 오늘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제 철야하는 분들에게 얘길 했습니다. 얘길 했는데 인자 진짜로 우리가 공부를 합시다. 참말로 공부를 진짜로 하는 것, 풍류가 아니고 재미가 아니고 상식이 아니고 진짜로 공부를 하는 것은 좀 어렵습니다. 왜 그러느냐. 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행.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을 지켜. 이것이 어려워요. 이것이 어려운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로 공부하는 거냐. 두말할 것 없이 꿈꿀 때 꿈꾸는 줄 아는 것이 진짜 공부입니다. 왜 그러느냐. 평상시에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남을 미워한다든지 남을 좋아한다든지 남을 그리워한다든지 그 마음이 철두철미하면 꿈에도 나타납니다.

미워한다든지 좋아한다든지 뭘 해야 되겠다든지 돈을 벌어야 되겠다든지 좌우간 어떻든지 뭣이라도 좋아. 공부하는 걸 떠나서 우리가 중생계에서 마음을 굴리는 것에 대해서 간곡해. 남을 미워해도 굉장히 미워해. 저 놈이 있으면 내가 사는 것 같지 않아. 그것도 굉장히 지독한 마음이거든. 지독한 마음이 있으면 말이죠 꼭 꿈에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평상시 낮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죠. 참말로 마음에 깊이 걸려. 그러면 밤에 잘 때 헛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할 테면 이 눈 귀 코 혀 몸 뜻, 이 여섯 가지, 육근을 통해서 경계하고 닿질려. 닿질리는데 육근을 통해서 마음을 쓰는 거와 또 우리가 잘 때 꿈꾸는 것은 육근을 통하지 안 해. 잠재의식이라 해도 좋고 뭐라고 해도 좋습니다.

통하지 않아서 마음을 쓰는 것. 그것이 알음알이라고 해도 좋아요. 뭣이라고 해도 좋아요. 본바탕 진심이 있으니까 우리가 이 말 저 말 하는 것 다 아시는 거니까 말할 것 없고, 그 잠잘 때 육근, 눈 귀 코 혀 몸 뜻. 이걸 통하지 않고 내 마음을 쓰는 것이 영 다릅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참 그렇다 하고 길게 설명을 안 하더라 해도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왜 다르냐 말이죠. 다르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데 다르다 말이죠.

평상시에는 모든 경계로 더불어서 타협을 하기 때문에 걱정을 한다든지 좋아한다든지 해서 딱딱 맞아 들어가. 울 때 울고, 성낼 때 성내고, 웃을 때 웃고 이래. 그런데 그 육근을 통해서만의 사고방식이거든. 거기서 결정이 돼. 그런데 우리가 밤에 잠을 잘 때는 전혀 육근을 통하지 않아. 눈도 통하지 않고 귀도 통하지 않고 입도 통하지 않아. 그런데 남하고 얘기도 해. 보기도 해. 듣기도 해. 왜 그러느냐. 그렇다면 한마디로써 여러분이 아실 것이 우리가 평상시에 낮에 우리가 마음을 쓰는 것은 결국 육근의 놀음놀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 생각 안 하겠습니까? 왜 내가 이 말을 하냐 하면은 딱 숨 거둘 때를 말하기 위해서 내가 이 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숨을 딱 거두어버려. 말하자면 죽어. 그때는 평상시에 육근을 통해서 하던 생각이 전혀 안 나. 그것도 간곡하고 깊은 것은 있기도 있겠지요. 있기도 있겠지만 전혀 잊어버려.

거기서 알음알이가 자기의 습성에 따라서 그래서 굴리어져. 이걸 생각한다면은 말이죠 참 겁납니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됐다 싶어. 그대로 행도 해. 그런데 꿈을 꿔 보면 말이죠 전연 공부할 때의 그 사고방식하고는 전혀 다르거든. 아이고 이거 큰일 났구나. 그러면 내가 죽을 때는 어찌 하겠나? 죽을 때는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 말이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꿈꾸는 것 한가집니다. 꿈을 꿀 때에 내가 꿈을 꾼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면은 그대로 쭉 하게 내 마음을 굴려 나가. 아무 걱정 없어. 잠 안 잘 때의 마음 씀씀이나 잠 잘 때의 씀씀이나 한가지라. 한 가지이니까 우리가 육근을 버려. 우리가 숨을 거두어 버렸어. 죽었어. 그러면 숨을 거둔 다음의 마음 씀씀이 꼭 한 가지일 것 아니겠어요?

한 가지겠는데 이 공부가 철저히 못 돼. 못돼 놓으면 이 육근이 있을 때는 모든 걸 이렇다 저렇다 따지기도 하고 분별도 하고 그래 가면서 자기가 거 하는데, 아 그만 딱 하게 숨을 거둔다든지 잠을 잔다든지 이럴 때는 영 모르게 되거든. 이것이 곤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까지 공부를 해 나가야 되겠느냐. 꿈속에 꿈꾸는 줄을 알 수 있는 정도까지 공부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꿈속에 꿈꾸는 줄 알면은 꿈꾸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하니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 육근을 갖다가 믿어.

나중에 말이지 꿈을 꿀 때 그만 잊어버려. 잠을 잘 때도 잊어버리고 숨을 거두어도, 잠잘 때 잊어버리니까 우리가 숨을 거두더라도 잊어버리거든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 있어. 우리가 깨어 있어. 이 때 보고 듣고 하는 데 지나치게 치우쳐. 지나치게 치우치기 때문에 말이죠 이거 큰일 났다 이거에요. 어제 내 이 이야기했습니다. 철야하는 분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느냐. 그러면 꿈속에 꿈꾸는 줄 모르면은 대치 안이 없겠느냐. 대로 무슨 방편이 없겠느냐 이것입니다. 이 방편은 방편을 빌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평상시에 그대로 어떠한 것이 없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면 육근을 버려. 이 몸을 버려. 숨을 거두어. 거둘 때의 그 생각이나 지금 생각이나 여일해. 꿈을 꿀 때도 여일해. 이렇게 못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이 공부를 집어치워야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 요 대치법이 원을 세우는 겁니다. 원을 세워. 원을 세워도 참 지독하게 원을 세우는 겁니다. 간절하게 원을 세우는 거예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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