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저 선이라 무엇인가?

내면적 멋이란

환희심에서 생겨난다.

스스로 기쁨을 느낄 때

나와 남과의 분별 사라지고

천지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며

영원한 참삶의 환희에 젖게 된다.

여기에 무한성과 영원성이 있다.

차생활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주변 즉 살림살이하는 데 있고, 이것이 선의 편에서 볼 때는 그것이 곧 선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의선사 같은 이는 ‘무시선무처선(無時禪無處禪)’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요, 완당 선생은 “정좌처차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라고도 하고 “묘용시수유화개(妙用時水流花開)”라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지경을 우리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또 한편 차는 일상 우리 인간이 나면서부터 물기를 먹고 마시며 살아온 인간의 본능적인 식생활과 계절 따라 입어야 하는 입성생활, 그리고 집을 지어 거처하며 그 주택의 주변인 정원을 꾸며 꾸려나가는 생활의 영위를 하는 데 있어, 그 어느 것이나 살림살이 않고는 못 배기는 현실에서 크게 착안한 것임을 볼 때 차도의 너르고 너른 광장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선은 그 자체가 현실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광범하게 말하는 한편 너무 범박하고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추상적일 수도 있으므로 이 방면을 치중하여 가는 선객들이 구두선(口頭禪) 또는 야호선(野狐禪)에 떨어져 한갓 공상에 빠져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을 때로는 보게 된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선이 조주선사나 초의차성의 편에 서서 그 실다운 힘과 생생한 화로가 열렸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차로 가는 길에 선의 길이 있다 할 것이다.

 

茶와 멋

차생활은 ‘멋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차생활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우리들 인간의 기호(嗜好)나 취미에 있고, 이 취미나 기호는 바로 무한한 멋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의(草衣)는 잘 끓은 물의 건령(健靈)과 차의 신기(神氣)가 용하게 어울리어 우러난 차를 ‘신령(神靈)스럽다’고 하고, 또 음차(飮茶)에 있어서도 간 맞는 좋은 차를 혼자서 마실 때가 가장 좋다고 하여 ‘신(神)’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신령스럽다’고 하는 것은 무한절묘(無限絶妙)함을 말하고, 혼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신’이라 한 것은 신령스러운 차를 마시는 차인(茶人) 자신이 영원하고 무한한 천지 대자연과 통하고 삼매경(三昧境)의 법희선열에 젖을 수 있는 신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가 바로 내면적인 멋의 극치에 이른 지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은 ‘귀신’이나 전지전능한 신으로 표현되는 따위의 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내면적인 멋이란 참된 각성의 커다란 환희의 생활에 있으니, 이것은 ‘신난다’라는 우리말이 그 본뜻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천진난만하고 원기에 넘치는 아이들은 “야! 신난다”라고 소리친다. 이 말에는 곧 그 자신에게 ‘신이 살아난다’는 것이니, 이 순간이야말로 자기 본래성(本來性)의 진면목(眞面目)에 조금도 손상 없이 활연(豁然)히 나타남이다. 또한 이때야말로 자기와 타인생(他人生)과의 분별이 없어지고 자아(自我)가 세계, 세계가 자아로 되어 이 천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고 영원한 참삶의 환희에 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멋의 무한성(無限性)·영원성(永遠性)이 있으니 내면적인 멋의 가장 극치인 신나는 때야말로 자아의 여러 가지 한계가 없어져 무한으로 이어지고 현재에서 과거도 미래도 동시에 살아 영원으로 이어져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 계급적인 것, 모두를 포괄한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이야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때를 당할 때 아이들처럼 ‘신난다’고 소리치지는 않는다고 해도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멋있다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를 통해 우리의 선인들은 신나는 인생 멋진 삶을 누리려 했던 것이니, 함허 득통 선사(涵虛得通禪師, 1376~1433)는

 

마땅히 이 한잔 차로 한 번 맛보고

한 맛에 한량없는 즐거움을 내어야 하네

〔當用一椀茶一當一當應生無量樂〕

 

라고 읊었던 것이다.

참다운 멋의 생활은 결코 사유(私有)가 아니며 혼자의 멋도 대중(大衆)의 것이 되고 요사나 잔 솜씨나 흉내나 조작으로는 체득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제 구색, 제 장단, 제 가락이 아니면 이는 ‘설멋’에 흐르고 마는 것이니 ‘맹탕(萌湯)’이나 ‘얼간이’가 되고 말뿐이다.

멋은 대중의 것이지 결코 사욕의 자리가 아니며 차의 생활, 멋의 생활은 전 사회인이 공동으로 성취하여야 될 공동의 광장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부언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취미생활, 즉 멋을 지향하는 생활은 아무래도 정서적인 방면에서 이야기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정서적인 감각이 진리성의 진(眞)과 심미(審美)의 지경인 아름다움의 세계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지적인 추구나 의지적인 행동은 계산적인 타산과 아울러 생활에 피로를 가져다주기 쉬운 반면, 정서적인 취미의 생활이야말로 아무리 복잡한 생활과 어려운 지경에 부딪친다고 해도 그것을 잘 조절하고 무마해서 도무지 싫은 생각이라고는 없는 크나 큰 환희의 신나는 생활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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