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22〉 운서산 장륙사 대웅전

대웅전 앞면 빗반자에 베푼 주악비천상과 우물반자의 오불종자불 문양. 주악비천상은 한국 사찰에 그려진 주악비천상을 대표할만큼 아름답고 율동적이다. 오불종자불 역시 유례가 없는 도상으로 역동적이며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점선 통한 기와 순환 흐름 묘사
문수 상구보리, 보현 하화중생 상징
앞칸문양, 힘, 신성, 미 갖춘 수작
본산중심의 동일한 화풍의 화맥형성


나옹화상의 탄생 성지

7번 국도변의 영해에서 영해~영양~봉화를 잇는 918번, 920번 경북북부 지방도로로 내륙으로 향하면 깊고도 외진 심산유곡에 장륙사를 만난다. 고려말의 뛰어난 고승 보제존자 나옹선사께서 창건한 절로, 나옹선사와 관련한 성지다. 나옹선사는 인도승 지공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무학대사에게 법을 부촉했다. 고려말 조선초의 고승 지공, 나옹, 무학의 3대화상을 모신 성지는 여러 곳에 걸쳐 있다. 나옹의 탄생지는 이곳 영덕군 장수면의 장륙사 인근이고, 출가한 곳은 문경 묘적암, 불법을 펼친 곳은 경기도 양주 회암사, 그리고 밀양으로 유배 가는 길에 입적한 곳이 여주 신륵사이다. 회암사지와 신륵사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고, 장륙사 홍련암에는 세 화상의 진영과 조상을 모시고 있어, 그 인연을 가늠하게 한다. 장륙사 대웅전 내부 향좌측 뒷벽에 연꽃으로 장엄한 세 칸 위패형식의 이례적인 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앙 칸에 ‘나무나옹대화상’의 귀의(歸依) 예배문으로 공덕을 찬하고 있다.

장륙사 대웅전에서 나옹화상의 가사만큼이나 주옥 같은 미적체험으로 와닿는 것은 천정 빗반자와 측면 벽체에 베푼 별지화들이다. 사찰벽화가 아름다운 절집은 전국에 걸쳐 두루 산재해 있다. 양산의 통도사와 신흥사, 해남 미황사, 강진 무위사, 보성 대원사, 제천 신륵사, 공주 마곡사 등 조선시대 단청과 어우러져 벽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들이다. 장륙사 대웅전 천정 빗반자와 측면 벽체에 장엄한 벽화소재는 단순하고 집약적이다. 빗반자 널판에 그린 벽화는 주악비천상이고, 좌우 흙벽에 그린 벽화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대웅전 천정에 장엄된 문양 일체다. 첫째줄은 좌우측면 천정문양이고, 둘째줄은 빗반자 위 가장자리 문양, 셋째줄은 천정 중앙부분의 것이다.
율동성이 빼어난 주악비천 벽화

주악비천상은 현악기 비파와 죽관악기 대금을 각각 연주하는 한 쌍의 천인들을 정면 3칸, 뒷면 좌우 2칸, 모두 5칸에 같은 도상을 대칭적으로 반복해서 그려 넣었다. 비록 도상은 반복적이지만, 붓질을 끌어간 묘사력과 표현력은 완주 송광사 대웅보전,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합천 해인사 명부전 주악비천 벽화들과 쌍벽을 이루는 뛰어난 수작이다. 주악비천상에 베푼 주된 색상은 녹색 계열의 하엽(荷葉)과 적색 계통의 석간주(石間朱)이지만 중간색 톤의 맑고 밝은 명도로 채색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은 다분히 중성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연주하고 있는 현악기는 당비파임을 알 수 있다. 비파에는 당비파와 향비파가 있다. 〈악학궤범〉의 도해에 따르면 향비파는 목이 바르고, 줄이 다섯 줄인데, 당비파는 목이 뒤로 굽고, 줄이 네 줄이다. 장륙사 벽화에서 비파의 줄은 4줄로 뚜렷하고, 목이 뒤로 젖혀져 있으며, 연주에 사용하고 있는 술대 역시 당비파용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다른 천인이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가로로 잡고 부는 횡적(橫笛) 관악기 대금이다. 굵기가 가는 편이라 정악대금이라기 보다는 산조대금에 가까워 보인다. 채색기법은 단청의 기본배색인 상록하단(上綠下丹)과 한난대비(寒暖對比)의 기본원리를 응용했다. 뇌록과 석간주의 한난대비적 효과로 화면이 전반적으로 선명하고 뚜렷하다. 하지만 주악비천 벽화에서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천공에 휘날리는 천의 자락이다.

넓고 긴 띠의 우아한 곡선이 바람에 펄럭이는 환청을 불러 일으킨다. ‘표대’라고 불리우는 천의의 띠는 전신을 휘감고 바람결에 날리는데 대단히 율동적인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표대의 띠는 안과 밖의 색을 초록과 적색으로 달리하였지만, 실상은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 띠다. 중중무진의 연기법계이므로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위상수학적 동일성을 이룬다. 본질적으로 펄럭이는 천의의 띠는 하늘세계의 성스러운 기(氣)와 음악적 선율을 동시에 표현하는 다중적인 장치다. 펄럭이는 천의에서 청각적 선율과 리듬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다분히 공감각적인 조형기법이다. 나부끼는 천의 자락을 보고 천인의 운동방향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음도 물론이다. 그 천의의 띠 형식을 빌린 신령의 구름 영기문으로 화면의 영역을 구획하고, 또 신성의 기운을 불어 넣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칸칸의 장면이 역동적이며, 여성적인 부드러움 속에서도 남성적인 힘이 흐른다. 천정장엄의 음악성은 부처님의 자비와 진리법에 대한 예경과 찬양일 것이다. 예경을 드리는 부처님의 세계를 바로 위 우물천정 반자에 베풀어 놓았다.

보현보살 벽화
대칭, 순환의 생명생성원리 담아

주악비천상 바로 위 우물반자에 입힌 문양은 연화좌 형태를 갖춘 오방불 범자 종자불이다. 불보살의 자리는 붉은 색으로 신성을 부여했다. 문양은 힘과 에너지, 신성,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뛰어난 수작이다. 따뜻하고 찬 기운을 두루 갖춘 중앙의 중핵에서 초신성이 폭발하듯 대단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급팽창하고, 사방에 묶음으로 축적된 에너지는 씨방에 가일층 집약하여 대규모 폭발을 분출해서 사방에 꽃을 새로이 피우고 있는 형국이다. 그것은 언어의 길이 끊긴 대방광불 화엄의 꽃이고, 미묘한 불가설의 묘법연화다. 바탕은 가물 현(玄)의 천공이다. 천공에는 기가 가득하다, 기의 우주적 순환구조에 다시 행성 자체의 순환구조가 내재한다.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있는 프랙탈 구조다. 기의 순환과 흐름은 고구려 벽화고분 무용총 널방에서 점선을 통한 기의 흐름을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문양에서 대칭과 순환이라는 생명생성의 거대한 원리를 드러내고 있다. 삼천대천에 가득한 자비력의 불보살세계를 오방불로 압축했다. 밀교의 금강계 만다라 오방불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금강계 만다라의 오방불은 대일여래이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동-아촉불, 남-보생불, 서-아미타불, 북-불공성취불의 방위구도를 갖춘다. 불보살은 형상이 아니므로 범자종자로 미묘한 신성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지도 모른다. 또한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워 예술가들에게 대단히 창조적인 작품활동의 여지를 허용한다. 장륙사 오방불 문양은 그 독특한 회화적 표현의 아름다움과 강력한 힘의 분출력으로 범종의 울림처럼 긴 여운과 깊은 감명을 안겨준다. 그 때 시각적 조형언어의 힘은 위력적임이 분명하다.

문수보살 벽화
문수보살 지혜와 보현보살 자비행

장륙사 대웅전 내부에서 또 한번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장엄은 좌우 측면 흙벽에 베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별지화다. 향우측의 벽화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이고, 향좌측의 벽화는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이다. 두 보살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상처럼 양쪽 머리를 묶은 동자상이다. 두 벽화에는 마치 기둥의 주련처럼 검은 사각형 바탕에 각각 ‘문수달천진(文殊達天眞)’, ‘보현명연기(普賢明緣起)’라는 방제를 써 넣두었다. 〈대공양예참〉 전문에도 나오고,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도 인용하는 바, 문수보살은 진리의 일체종지를 깨달았고, 보현보살은 연기의 이치를 밝혔다는 뜻이다.

문수보살은 반야의 지혜이고, 보현보살은 육바라밀의 실천이며, 자비의 실천이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문수보살로부터 여러 선지식을 구하고, 보현행원을 갖추도록 권유받은 후 53선지식을 만나 가르침을 구하는 바, 긴 구도의 여정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보현보살이었다. 곧 두 보살벽화는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에서 반야의 체득과 자비의 실천을 통한 완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이 지혜를 체득하는 상구보리의 과정이라면, 보현보살은 하화중생의 보현원행이다. 즉 두 벽화는 사자후처럼 전광석화의 심검으로 일체종지의 진리를 구하고, 코끼리처럼 세상 곳곳 육도만행으로 자비행의 공덕을 닦아나가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벽화나 불화에서 두 보살을 표현할 때는 동양의 음양오행의 원리가 대체로 지켜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좌청룡 우백호의 채색원리에 따라 동쪽의 사자는 청색, 서쪽의 코끼리는 흰 색으로 채색하지만, 장륙사의 경우 코끼리의 흰색은 유지하고, 사자의 청색은 석간주의 붉은 빛의 층단식 우림으로 마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보살을 묘사한 회화적 표현은 대단히 심미적이며, 우아하다. 천의에 초빛, 이빛으로 바림기법을 베풀어서 입체감을 살렸고, 역동적인 천의와 신령한 기운의 활발한 묘사를 통해 생동감 있는 생명력을 갖췄다. 두 보살의 반가좌의 자세는 어깨 양쪽으로 뻗치고 나온 의상과 함께 정형화 된 양식의 일종이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벽화는 제천 신륵사 극락전, 청송 대전사 보광전, 파주 보광사 대웅전, 김천 직지사 대웅전 등에서 두루 나타나지만 장륙사의 경우 회화적 성취를 이룬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천정 중앙부분의 우물천정 문양은 붉은 바탕에 백묘로 묘사한 사방 연화문이다. 소란반자 내부는 넝쿨과 새싹들이 꿈틀거리는 강한 생명력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이 조형은 달성 용연사 극락전과 청도 대적사 극락전 천정에서 같은 패턴으로 나타나고 있어 대구 경북일대의 화맥의 계파와 범위를 가늠하게 한다. 본산을 중심으로 단청에서 일정한 양식적 통일의 화풍을 찾아낸다는 것은 작업의 주체가 화승이며, 지역 계파에 따른 화맥을 분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전거를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위대하고 거룩한 성보의 붓질을 남기고 간 이름없는 예술가들에게 오체투지의 삼배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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