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들었으면 벌써 봄이 왔다는 뜻이거든요

▲ 그림 최주현

이거는 이론이 아니고 실천입니다. 학식이나 이런 걸로다가 사는 게 아니라
못났든 잘났든 못 배웠든 잘 배웠든 진실된 실천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현실적 의미

질문: 반야심경은 대승 불교의 반야 사상의 핵심을 담은 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첨단의 시대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고색창연한 반야심경의 문구가 우리의 생활과 어떤 연관이 되는지, 그리고 지은 업이 많아서 하루하루가 고달픈 저의 삶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답변: 여러분이 불자로서 공부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가. 여러분의 육신 자체가, 반야심경에 있는 ‘공즉시색 색즉시공’ 이러한 말들을 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대로 공(空)이자 색(色)입니다. 색이라는 소리 할 것도 없고 공이라는 소리 할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공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육신은 항상 변모되고 있고 마음도 항상 변모되고 있습니다. 각자 생각을 잘 해 보시면 알 겁니다. 항상 내 육신이 그대로 있을 것도 아니요, 어린애 적의 나를 나라고 할 수도 없고, 전부 나라고 할 수 없이 변모가 돼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음도 역시 그렇습니다. 항상 변모돼서 다른 걸로 화해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또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자꾸 마음이 그렇게 묘하게 딴 사람이 되고 딴 사람이 됩니다. 자식들을 만났을 때는 엄하게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다스리지만 아내를 만났을 때는 그렇게 자비하고 남자로서의 아주 참, 아버지 노릇을 하고 어머니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변모해서 돌아가는, 화해서 돌아가는 이치를 아시게 된다면 그대로 공이자, 그 공에서 그대로 여러분이 한생각을 내면 법이 되는 겁니다. 수차에 이런 말을 해 드렸지마는 그것이 실천이 안되니까 이런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생각 해서 그 한생각이 그대로 법이 됨으로써 육신이 움죽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이 움죽거리게 되는 그 자체, 자기 중심이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생각해서 활용하는 것이 우리 생활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무리 죄업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과 마음이 어찌 둘이겠느냐. 물질과 마음이 둘이 아니니 어떠한 문제든지 마음에서 나오는 건 마음에다 되놔라.’ 이런 뜻입니다. 둘이 아니다. 몸이 일할 때는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 것이요, 또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부(父)와 자(子)는 어디 있는가. 불(佛)과 법(法)이 둘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뭐라고 표현을 해야만 되는가. 부가 부처라고 한다면 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겁니다. 생각할 때는 부가 자로 돼 주고 가만히 있을 때는 자가 부로 돼 줍니다. 그러니깐 둘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항상 하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하는 자체는, 짤막하게 우리 몸으로 비유해서 세운다 하더라도, 몸이 돌아가는 거는 마음으로 인해서 돌아가고 마음이 돌아가는 건 생명으로 인해서 돌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부와 자, 승보인 몸뚱이. 부와 자가 움죽거리는 바람에 이 몸뚱이가 둘이 아닌 까닭에 그대로 움죽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 하나가 없어도 아니 되죠. 우리가 마음내는 분별이 없어도 목석일 것이고 우리 몸뚱이가 없어도 남 보기에 보이지 않고 내가 할 수 없으니 그건 무효고, 생명이 없어도 아니 되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게 삼위일체로 구성돼서 회전을 하니까 주인공, 어떤 거를 세워서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주인공이라고 한 거고, ‘공(空)이다’ ‘없다’고 한 겁니다. 반야심경에도 역시 꽉 차서 돌아가기 때문에 ‘공이다’라고 했지 없어서 공이라고, 허공을 가지고 그냥 말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에 여러분 생명이 있기 때문에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것이고, 그 까닭에 공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숨쉬기를 ‘만든다’ 하면은 벌써 그건 아닙니다. 한도가 있는 것은 인위적입니다. 그러나 우린 자연적으로 생명이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공기가 들고 나서 우리는 호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씀씀이를 쓰는 데에서 전체가, 작은 거든지 큰 거든지 좋은 거든지 나쁜 거든지 거기서 다 나옵니다. 틈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머리에서 지워 주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그러한 어떤 업덩어리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게 과거로부터, 과거의 인연줄로 인해서 좇아 나온 것이니 좇아 나온 그 자체를 우리가 다시금 거기다 놓는다면 그것이 묵살되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이게 뭐 별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고 얼마나 무서우면서도 자비한 도리인지 모를 겁니다. 요만큼 하나도 틈이 없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이 이해를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축생으로 떨어지는 것은

질문: 스님 법문 중에 가축이 인간 옆에 살면서 ‘인간이 되고 싶다.’ 하고 한생각을 냈을 때 인간으로 환생을 한다고 그러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리 사람이 업이 많아 가지고 축생으로 떨어진다면 그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답변: 내가 법문 중에 그런 말을 했다고 했는데요, 축생이 사람 되고 싶어 하면 사람이 전부 된다고 그랬나요? 그것이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이런 게 있죠. 우리가 지금 부처님 공부를 하려고 그러는 것도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쳐 놓으시고 그 뜻을 설해 놓으셨으니까 부처님 그 뜻을 알 양으로 이렇게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축생들도 사람들을 많이 보고 그러면 그렇게 자유스럽게 자기네들도, 마음대로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리는 그 능력을 보고 감탄하면서 자기도 그런 거를 공부하려고, 공부라고 할 건 없지마는 마음으로 아주 새기고 새기고 또 새기고 자꾸 지혜를 넓히면서 축생들도 사는 겁니다. 인간이 되려고 말입니다.

그것 또한 지금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인간의 이 모습을, 이 모든 얽히고설킨 것을 벗어 버리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모습은 타고났다 할지라도 전자의 축생이 하던 습, 짐승이 하던 습, 자기가 그 모습을 가지고 살던 습을 놓지 못한다면, 그대로 인간이 돼 가지고도 그 습을 가지고 놓질 못한다면 다시 그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나올 수밖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 마음 자체를 자비스럽게 생각하라. 높은 걸 보고도 높다 생각하지 말고 얕은 걸 보고도 얕다 생각하지 말라. 미운 걸 보고도 밉다 생각하지 말고 예쁘고 잘생긴 걸 탐하지 말라.’ 하는 겁니다. 모든 게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올바르게 자기 하나만을 위해서 자기가 잘생겨야겠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만약에 내가 틀을 잘 만들어서 이 세상에 나와 가지고 모든 만백성을 다 살릴 수만 있다면 틀을 잘해 가지고 나올 수도 있는 거죠. 그러나 틀을 잘해 가지고 나와서만이 되는 게 아니고 마음도 틀도 잘돼서 여러분을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보살과 더불어 법신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머리 깎고 목탁을 쳐야만이 중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서, 저런 데 나가서 무슨 큰 회사를 하든지 지금 큰 대기업의 사장이나 회장들처럼 이렇게 돼 가지고도 유(有)의 법으로나 무(無)의 법으로나 지혜로써 그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감싸 주면서 살린다면, 그리고 건져 준다면, 그리고 육으로나 또는 마음으로나 모든 것을 그렇게 적합하게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된다면 그 사람들도 역시 중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유마힐 거사가 방 거사고 방 거사가 유마힐 거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들이 나와서 부처님을 모습만 보고서 찾지 말라는 그 뜻을 역력히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여러분이 몰라도,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선 생활하는 데 급급하니까, 생활하는 데 급해서 만약에 어떠한 병자 하나를 위해서 돼지를 잡는다든가 소를 잡는다든가 닭을 잡는다든가 토끼를 잡는다든가 이런다 할지라도 그것을 각각 두고 살생이 되게 하지 말고, 바로 그 살은 내 살이요 그 마음은 내 마음이요 그 생명은 내 생명이라는 그 공생 공심으로 돌아갈 수 있고, 공체로써 공용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러한 넓은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살생이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사람사람이 모두 마음으로써 ‘아이고, 저걸 죽였으니 지장보살! 저것 좀 천도해 주십시오.’ 누구더러 해 달라는 거예요? 자기가 죽여 놓고 누구더러 해 달라는 거예요? 대답하던가요, 누가? “어, 내가 천도시켜 주마.” 그러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과도 그 모든 것이 다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한 것만치, 좋게 했으면 좋게 한 것만치 나쁘게 했으면 나쁘게 한 것만치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건 자기가 하는 것이지, 누가 잘 풀어 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법입니다.

계속 교회에 다녀도 되는지

질문: 저는 미국의 한국계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하게 된 불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절에 다닌다는 것이 너무 버겁습니다. 저를 제외한 대부분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데 정직원도 아닌 제가 혼자만 절에 다닌다고 하니 바라보는 시선도 따갑고, 나이 드신 분들이나 다니는 곳에 다닌다면서 같이 교회에 자가고 회유를 많이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스님의 법문 중에 피치 못하게 교회에 가더라도 남들이 주(主)를 찾을 때, 내 안의 주인인 심주(心主)를 찾기만 한다면 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심주를 찾으면서 계속 교회에 다녀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여러분! 이렇게 발전된 세상에 자기를 이끌어 가는 정신계의 영원한 자기의 신을 모르고, 나부터 알아야 하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간다면 안 되죠. 이렇게 말한다고 “그러면 부처님한테 갈 필요도 없겠네요.” 이러겠지요. 그게 아닙니다. 가톨릭교나 기독교를 믿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더라도 주처는 바로 자기한테 있는 겁니다, 자기한테! 그런데도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기복 아닌 게 없어요. 이러니 이거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림을 보거나 형상을 보고도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부처님 믿으러 갈 게 없지, 형상을 믿지 말라니까.” 이러겠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당신들의 몸도 형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아주 한생각을 돌려서 잘 믿는 데 달려 있는 겁니다. 법당에 가더라도, 만 불(萬佛)이 놓여 있더라도 내 한마음의 일 불(一佛)입니다. 만 불도 일 불이요 일 불도 만 불입니다. 이 도리를 꼭 알아 둬야 되겠습니다.

칠성이니 관세음이니 지장이니 약사니 아촉이니 아미타니 미륵이니, 다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하시는데 이름은 여러분도 각자 얼마나 많이 가지고 계십니까? 어머니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 며느리라는 이름, 할머니라는 이름, 아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이름대로 여러분이 지금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되고 “여보!” 하면 남편이 되는데, 남편 따로 아버지 따로 이름을 각각 꼬리표 붙여 놓듯이 해 놓고 거기다가 따로따로 하면서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거와 똑같은 겁니다. 만 명이 깨쳤다 하더라도 한 부처님이지 만 명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몸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들어 있어도 한 분이지 그 만 분을 따로따로 이름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고 그래서 병원에 가거나 그러면 뭐 여러 가지 이름이 따로 있죠. 따로 있긴 하나 한 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로 부르는 한 이름입니다. 천차만별의 이름이 있지만 한 분입니다. 한 몸, 한 분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마음도 몸도 그래서 ‘한 분, 한 마음, 한 생명’ 그렇게 따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공했다고 하셨고 그래서 부처님의 몸은 아주 크다고 그랬습니다. 광대하고 무변하고 묘하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죠.

여러분이 따로따로, 약사 따로 미륵 따로 아촉 따로 관세음 따로 지장 따로, 이렇게 따로따로 생각을 하고 따로따로 부른다면 그냥 생활을 하면서 찰나찰나 앞에 닥치고 찰나찰나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어떻게 다 대치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복이 되는 거예요. 이거 놓고 빌어야 하고 여기다가 빌어야 하고 저기다가 빌어야 하고 정신없죠, 뭐. 닥치는 대로 말입니다.
한 분의 이름만 불러도 만약에 그 마음만 내 마음과 둘이 아니게끔 한다면 거기에 통신이 돼서 대뇌로 해서 중뇌에서 책정을 내리면 사대로 통신이 돼요. 그래서 안에 있는 그 의식들이 다 알고 한마음으로 따라 줘요. 이것은 심성의학일 수도 있고 심성과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를 이끌어 가는 정신계를 무시하면 물질적인 이 육신은 뭐가 됩니까? 그러니 어디가 어떻게 쓰러진다 하더라도 대치를 할 수가 없죠.

내 한마음의 한생각의 통신이면 사대로 통신이 돼서 이 안에서 다 알고 작용을 해 줄 텐데 통신이 안되니까 대치할 수가 없는 거죠. 바깥으로만, 안의 자기는 쑥 빼 놓고 바깥으로, 부처님이 높이 앉아 계신 줄 알고 ‘부처님, 부처님! 나를 잘살게 해 주세요. 잘되게 해 주세요. 삼재 없이 해 주세요. 번뇌가 끊어지게 해 주세요.’ 별 타령이 다 많지만 절대로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 해도 대신 똥 눠 줄 수도 없을 것이고 밥 먹어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잠자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아파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죽어 줄 수도 없을 것이고 깨치게 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현 시대에, 이렇게 밝게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밝게 마음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밝게 마음을 발전시켜서 위로는 조상들과 아래로는 내 몸속에 있는 자생중생들도 더불어 같이 한마음으로 빈손이 되고 빈발이 돼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고 보는 사이 없이 볼 수 있고, 듣는 사이 없이 들을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도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줄 알아야 여러분의 이세, 그 낳아 놓은 자손들을 세세생생에 멋진 사람으로서 빛이 되게 할 수 있거든요. 이거는 이론이 아니고 실천입니다. 학식이나 이런 걸로다가 사는 게 아니라 못났든 잘났든 못 배웠든 잘 배웠든 진실된 실천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까닭

질문: 석가모니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니 가섭이 웃었지 않습니까? 어느 책을 보니까 그 대목에서 가섭이 큰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왜 죄를 지었느냐 하니까 뭘 웃느냐는 말씀이죠. 이 부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답변: 그게 아니죠. 왜냐하면 까닭이 없으면 이게 돌아갈 수가 없어요. 까닭이 있기 때문에 진리거든요. 우리가 공생 공심 공용으로 돌아가는 것도 까닭이 있기 때문에 돌아가는 겁니다. 그 '까닭' 때문에 모두들 헐뜯고 뜯고 그러는데 그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그 괴팍함이지 까닭이 있어야 성사가 되는데 어떡합니까. 까닭 없이 무슨 성사가 되나요? 그러면 장속 안에 넣어 놓고 그냥 있는 셈이니 다른 혹성에서 계발 못하고 무용체로다가 그냥, 무용신으로 그냥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까닭이 있는 거다 이겁니다. 만약에 그 꽃을 들었으면 벌써 봄이 왔다는 뜻이거든요. 그럼 이쪽에서 또 웃었다 할 때는 그것도 꽃이다 이겁니다. 이쪽도 꽃을 들고 저쪽도 꽃을 들었다 이겁니다. 생면부지인데 말이에요, 이 육신으로서는.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데는 마음과 마음으로 이거를 들었지 아니, 물질을 든 겁니까, 이게? 그래 마음에 까닭이 있으니까 이걸 든 것이지요. 마음에 까닭이 없는데 들었을까요? 그래서 이쪽도 마음에 까닭이 있으니깐 웃은 겁니다.
근데 왜 들고 웃는 걸 가지고 말을 하죠? 왜 석존이 꽃 든 거는 탓을 안 합니까? 웃는 것은 탓을 하면서. 그렇게 까닭도 모든 게 없다 하면 ‘왜 꽃은 들었느냐?’ 그러고 탓을 하시지요, 왜. ‘왜 팔만대장경을 내놓고 왜 말을 했느냐?’ 이러시지. ‘아예 본래부터 그냥 있는 거 그대로 두지, 왜 이렇게 말을 해 가지고, 팔만대장경을 해 놓고 사람 속을 썩이느냐.’고 그런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마.
또 어떤 분은 내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석가모니의 사지를 찢어서 개나 줬을 거라고 하는 말을 했다던데 말입니다, 또 사지 찢을 게 뭐 있습니까? 사지 찢을 게 있나, 찢게? 그러나 만약에 그만큼 그래도 선지들이 나서서 그렇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계발이, 모든 혹성들이, 전체 계발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얼마나 고마워요?
그래서 이것이, 그래요. 우리가 마음으로 마음을 전달하는데 때로는 신도들이, 이게 우리 있는 얘기를 하지 없는 얘기를 해서 여러분의 가슴에 감응이 될 수도 없는 거고…. 참 무궁무진한 그 이치를 어떻게 다 말로 하리까? 모르는데 어떻게 말로 해!
어떤 때는 여러분이 이렇게 오실 때 “욕심 부리지 말고요, 마음속에서 푸뜩 나오는 대로 그냥 하세요. 학교를 넣는 것도 그렇고. 마음속에서요, 이게 분수를 지켜요. 언제나 여기에서 나오는 거는 항상, 자기를 속일 수 없는 자기가 있는 거예요.” 하고선 일러 준다고요. 그럼 “알았어요.” 그러고 간다고요.

그렇게 일러 주는 사람도 있거니와 어떤 때는 터무니없이 “아이고, 스님!” 시골 참, 저런 데서 와 가지고서 지금 간질을 앓아서 죽게 됐다고, 무슨 그것만 있는 겁니까? “이것도 이렇게 있고 그렇습니다.”그러면 “예, 알았습니다.” 이거는 외려 모르는 사람 앞에는 꼼짝 못하게 돼 있어요, 내가. 그냥 “네에.” 하고 심부름꾼이 돼야 되죠. 그 사람이 모르니까 내가 심부름꾼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 사람 앞에는 뭐 정성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이분이라면 내가 가서 얘기만 하면 된다.’라는 그것만 하나 가지고 오는 거니까. 그럼 일가 집까지, 저 마을의 동네까지 가지고 와요. 그러면 “안 해 주시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스님이 꼭 해 주실 거라고 믿는데….” 이런다면 어떻게 해요. 그땐 “알았어요.” 이 대답밖에는 없어요. 그거는 어떤 일로 인해서 그 사람들 나름대로…. 그러면 쳐다보고 “네, 알았어요.” 그러고 웃을 수밖엔 없는 거죠.

웃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언제나 제일 아래, 하에 있는 사람, 제일 하에 있는 그 계발되지 않은 마음. 그런 마음이 오히려 진실한 건 더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진실한 거. 요리 생각 조리 생각 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그저 미련스럽게 그냥 뚫는,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있단 얘기죠. 그럼 심부름하긴 쉬워요. 이것도 여러분과 나와, 그분과 나와 그럭할 때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벌써 그이는 그 마음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벌써 된 거예요. 얼마나 그 사람의 믿음이 돈독하면 그렇게, 얼마나 자기를 믿고 둘이 아니라고 믿었으면 왔다가 얘기만 하고 쏜살같이 가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가지각색이에요.
꼬투리 잡으려면…. 육조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테가 없는데 뭐, 거울이 어디 있고 거울이 없는데 먼지 앉을 게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막 해 버리는 것도 거기까지 가야, 그렇게 물질로 나오는 사람 앞에는 그렇게 무찔러 주고, 또 그 공부를 웬만치 해 간 사람 앞에는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 거죠. 그때 환경에서는 육조 스님이 그렇게 대답 안 할 수가 없었겠죠. 그러니까 하여튼 사람에 따라서, 근기에 따라서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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