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마음 따라 수순하고

업이 다해 번뇌 다할 때까지

불도를 닦으면 된다.

잠이 오거든 자고

잠이 깨거든 염불하라

 

이렇듯 인간다운 생활을 주장한 원효대사는 또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사람이 거저 농사를 짓는다, 장사를 한다, 공부를 한다, 이러는 것이 병신 같기도 하고, 얼빠지고, 못난 짓 하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지마는 그에게도 속으로 생각이 있고 한번 숨겨 둔 모순이 튀어나오는 날에는 수무공능 응기설화 유여천고(雖無功能 應機說話 猶如天鼓)라는 말을, 즉 비록 어느 때는 그 사람에게 무슨 공이 있는지 무슨 천재적인 포부가 있는지 알 수 없더라도 어떤 기회에 당도하여 톡 말리 떨어질 때에는 뇌성벽력 같은 소리가 난다.

학문하는 선비나 수행인이나, 지조를 지키는 남자나, 여자나, 이와 같은 이들이 자기 처지에서 기어이 자신의 뜻이 이렇다는 것을 발표할 경우에는 벽력보다도 더 큰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것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는 기생의 딸로서 제 자신도 결국 한낱 관기(官妓)일 수밖에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한 말은 하나하나 이 작품을 통해 뇌성벽력 같은 말들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향기로운 말들을 전편을 통해 말해 준다. 이런 진리를 원효대사는 간파(看破)했었다. 무리(無理)한 가운데에 지극한 이치가 있고, 그러잖은 사회에 크게 그러한 일이, 참으로 만세상이 놀랄만한 일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데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어야 한다. 아미타불은 그의 명호만 부르면 그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여 내 나라,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어 여기서 생활하도록 해 준다. 만일 이러지 못할 경우에는 나는 아미타불 노릇을 안 할 것이다 하는 비원을 세웠다. 그 원력으로서 이러한 일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스운 얘기 같지만 부모 된 생각으로는 자식을 안 키우고 못 배기는 것과 같다. 자식을 키움으로써 부모는 살고, 구원 받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음으로써 그 생명이 발육되고 동시에 어머니는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몸이 더욱 튼튼해진다. 아미타불과 우리들 죄의 업장이 많은 중생들은 이와 꼭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나마아미타불 하고 염불 생활을 한다. 이것은 거듭 설명한 바이지만 보은하고 감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미타불의 강력한 원력의 배, 반야용선(般若龍船)에 탄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저절로 가게 된다. 우리는 이렇듯이 하여 감사하고 은혜를 갚는 사람이 된다. 감사하다, 은혜를 갚겠노라는 이 소리는 ‘나는 사람 노릇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하는 말이다. 사람다운 구실을 한다는 그것이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일인가.

그의 마음과 행동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알뜰한 다음에야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보은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나무아미타불로 요약되고, 염불하는 거기에 일체의 계율과 선행은 다 포섭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포섭지의(包攝之義)가 있고 총섭해서 말끔히 다 그 원리에 거두어 들 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좋으냐. 가장 깨끗하고 훌륭하다. 홀로 높은 것이다. 독존지의(獨尊之義)가 있다. 만 인간이 이 길을 밟아야 된다. 이 길에 이르러 비로서 다들 돌아가 나무하고, 합장하고, 절할 수 있는 귀취지의(歸趣之義)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염불이란 가장 쉬우면서, 탄탄한 대로이고 틀림이 없어 백도(白道)라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한길’이란 뜻이다. 탄탄한 넓은 길을 밞아 가면 그만이다. 이런 좋은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선을 한다고 죽을 노릇을 다해 애를 쓰거나 불교의 학문을 하느라고 교리가 이러니 저러니 논하거나, 또 어려운 계율 같은 것을 지켜야 남이 우러러 본다는 둥, 그렇게 하는 난행도(難行道)를 해 나가고들 있다.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 이행도(易行道), 아무라도 다 되는, 아이·어른·남자·여자·지위 높은 사람· 낮은 사람·병신이거나 누구라도 다 갈 수 있는 이 평탄한 길만큼 안태하고 믿음직스런 길은 다시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지심귀명례 서방아미타불(南無至心歸命禮 西方阿彌陀佛) 원공제중생왕생안락국(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기쁘고 좋은 일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루 하루의 일과를 어떤 거룩한 이와 더불어 의논해 본다. 여기 조목 조목을 다시금 들어 본다면 열 가지 일을 하게 된다.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고,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여 예배드리고 모든 부처님과 중생에게 널리 지공하여 공양을 지어 올리고 업장을 참회하고, 청불 주세하고, 천천 법륜하고, 상수 불학하고, 항상 중생의 마음을 따라 수순하고, 이렇게 하기를 널리 닦아 나가는데, 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이 저지르는 그 업이 다하고 생각하는 바의 그 번뇌가 다할 때까지 한다.

우리는 항상 행(行)과 원(願)을 발해 나가면서 몸으로, 마음으로, 입으로 조금도 싫증이 없이 언제든지 이를 기쁨으로서 이룩한다. 기쁘다는 생각을 할 동안은 정진을 하고 싶고, 싫증은 날 리 없다.

‘아이고, 뭐 그따위 것을 다 하라고 해?’ 할 때엔 벌써 거기엔 기쁜 마음이 없다. 게으름이 붙고, 퇴폐해지고 허무한 데에 사로잡힌다.

그러므로 이런 부질없는 생각일랑 버리고, 항시 기쁜 마음으로서 신심(信心)을 발하고 발심(發心) 정진할 따름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람 노릇하는 일이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이며, 이렇듯 일상생활을 통해 이를 행동화하고 끝내 성취한다는 것이다. 주야 육시(六詩)로 간단없이 생각하여 우리는 이러한 의식의 지속을 갖는다. 이를테면 하루 24시간 내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잠은 언제 자느냐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또 얘기가 있다. ‘아이구, 스님, 염불하라 하시는데 잠이 오네요’ ‘잠이 오거든 자고, 잠이 깨거든 염불하지’ 이것이 자나 깨나 염불하는 생활인 것이다.

이로써 총체적 결론을 마무리며 행원례의 해설을 전부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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