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고전- 자크 라캉의 <에크리>

상징·상상·실재계 개념 통해
자아가 가진 욕망 근원 탐구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대상을 통한 욕망 충촉은 ‘허깨비’
‘궁핍한 주체에서 벗어나라’ 역설
사상 전반에 연기론·空 사상 맞닿아

▲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사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그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해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서양 사상의 소통을 많이 강조하지만 개념 차이와 학문적 방법론에서 비롯되는 상이한 관점 때문에 번번이 벽에 부딪치거나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에리히 프롬이나 스즈키 다이세쓰 같은 걸출한 학자가 있었지만 정신분석학과 불교의 비교연구는 아직 초보적 단계다. 필자는 이 글에서 현대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크 라캉의 대표작 <에크리(Ecrits)>의 사상적 의미를 불교와 연관시켜 개괄해보려고 한다. 물론 지면 제한과 불교에 대한 필자의 미력한 학식 때문에 오해를 할 수 있지만 그런 시도 자체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본다.

두 사상의 외형적 비교나 한 쪽의 관점에서 다른 쪽을 비판적으로 읽는 연구는 사실 각 사상가의 이론과 문제의식을 왜곡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제기된 지평 자체에 주목하면서 하나의 이론이 겨냥하는 목표를 서로의 거울로 읽어내는 게 필요하다. 필자는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어떤 이론적 유의미성을 지니고 있고, 불교사상과 통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상징계: 존재에 질서를 부여하기
시간적으로는 상상계가 먼저지만 존재의 질서는 언어와 더불어 시작되므로 우리는 상징계를  근원적 심급으로 인정해야 한다. <에크리>에서도 라캉은 연대기  순으로 논문을 배치하지 않고 기표(문자)의 초월성을 다룬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를 제일 첫 장에 두어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상징계는 물론 언어의 영역이지만 단순히 의사소통 공간이 아니라 존재가 구체화되는 영역이자 주체의 삶을 지배하는 구조다. 라캉은 언어가 주체와 우리의 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 물질이라는 기표 유물론 입장을 고수한다.

이런 생각은 모든 교법과 사물의 원리이면서 만유와 사물의 있음과 질서를 포괄하는 ‘다르마’(法)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대승불교가 말하는 반야가 이런 다르마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듯 라캉은 주체의 유한성과 차이를 낳는 상징계의 본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정신분석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보겠지만 라캉이 자아를 이상화하고 건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자아심리학에 극구 반대하면서 교조적 프로이트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징계는 유아론(唯我論)적 성향을 가진 자아가 마음대로 통합하거나 바꿀 수 없는 초월적 타자의 영역으로 라캉은 이를 대문자 법(Law)으로 부른다. 어머니와 합일이라는 상상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는 아버지가 대표하는 법을 받아들이고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한다. 만약 상징계에 진입하는데 문제가 생기거나 아버지의 법이 작동하지 않으면 주체는 정상적이 될 수 없는데 라캉은 이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본질이라고 재해석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대표 기표를 수용하면서 상상적 이자관계에서 어머니의 남근(phallus)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상징적 거세) 주체로 탄생하면서 욕망을 시작한다. 이후 주체의 삶은 상징계의 대리자인 대타자의 법과 규칙에 순응하면서 사회적 관계에서 역할을 부여받는데 지젝은 이런 의미로 <How to read 라캉>에서 대타자를 연출자에 비유 한다.

상징계란 초월적인 질서이자 사회적 인과성의 근원으로 기표의 그물망이 짜놓은 구조 속에서 우리를 움직이고 강제한다. 이런 상징계의 움직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도둑맞은 편지>이다. 여기서 주체들은 편지에 대한 위치에 따라 맹인(왕), 강탈자(장관), 희생자(왕비)의 역할을 수행하며, 편지가 순환함에 따라 사건이 펼쳐진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이 구조는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맹인(경찰), 강탈자(뒤팽), 희생자(장관)로 역할만 바뀐다. 편지는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고, 이 사람 손에서 저사람 손으로 옮겨지면서 모략과 갈등의 궁중 드라마를 종횡으로 엮어 나간다. 문자, 기표, 문학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편지가 모든 사건의 실제 주인공이자 의미의 근원이며 주체는 여기에 예속된다.

하지만 상징계는 절대적 세계가 아니다. 라캉은 언어가 모든 것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끊임없는 의미의 미끄러짐(편지의 순환)을 통해 욕망을 지속시키는 한계를 지님을 지적한다. 무의식이란 이런 언어의 불완전성과 기표와 기의의 반복적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개념적 유사성이나 차이가 아니라 문제의식에 주목한다면 불교가 말하는 연기론(緣起論)을 상징계를 이해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연기론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잡아함경>) 사상이다. 이것이 상징계와 연관될 수 있는 것은 상징계가 인과론적으로 주체의 발생과 욕망을 설명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모든 사태와 존재의 원인이며 언어 덕분에 주체가 구성된다. 하지만 욕망은 대상이 없고, 요구와 욕구의 불일치라는 조건과 타자를 통해 욕망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된다. 이런 심리적 인과성의 관점을 연기론적 시각으로 읽으면 라캉이 상징계를 통해 말하는 의미가 잘 이해된다.

상상계: 자아의 충만한 세계와 무아론
라캉은 주체가 자신을 인식하고 표현할 때 불가피하게 자아(ego)가 주체를 대신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아는 주체의 본질이 아니고 오히려 소외와 오인의 원인이다. 라캉의 이론이 불교와 가장 비슷한 색채를 띠는 부분은 자아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역시 ‘제법무아’(諸法無我)이론을 통해 고정된 실체로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무아론은 모든 것이 상호작용해서 발생하고, 생성소멸을 반복하고 변한다는 연기론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자아는 세계의 중심이자 사유와 행동의 주관자로 행세하면서 처음부터 자명하게 주어진 것처럼 스스로를 가정한다. 하지만 실은 거울에 비쳐진 신체이미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라캉은 ‘거울단계(mirror stage)’라는 이론을 통해 자아의 발생과 심리적 특성을 설명한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 아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이상화된 자아이미지에 열광하고 이를 중심으로 대상관계를 시작한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동일시하고 이를 완전하게 느끼는 심리는 나르시시즘으로 이후 삶에서 펼쳐질 자기중심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자아는 타자적인 것, 즉 그림자로 우리는 불가분하게 자기에 대한 인식에서 오인과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라캉은 자아가 타자화된 이미지에 불과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지만 그것이 주체를 대신하면서 유아론에 빠지는 심리를 일종의 정신병인 ‘편집증 상태’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의식의 투명성과 절대성을 가정하는 철학적 주체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자아는 이성의 담지자로 스스로를 가정하지만 실은 존재의 진실을 감추고 이상화된 세계를 투영하는 상상적 심급에 불과하다. 자아는 왜 우리가 그토록 욕망에 집착하고,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하면서 욕망에 집착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내 욕망이 실은 타자의 욕망에서 온 것이고, 대상을 통해 욕망이 충족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면서 주체를 미혹하는 것이 상상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불교가 무아론을 통해 경계하는 바와 상당히 통하는 곳이 많다. 라캉은 불안을 주제로 삼은 세미나 10권에서 욕망의 본성을 미망에서 찾는 불교사상에 깊은 친근감을 표시한 바 있다.

자아의 세계는 한마디로 충만함과 통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기중심성으로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진리를 왜곡시킨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메울 수 없는 존재결여를 구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것을 견디게 만들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이 자아의 작용이다. 하지만 라캉은 자아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상상계의 필연성을 인정한다. 상상계는 오인의 구조이지만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의미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조건 자아를 벗어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체성(subjectivity)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태도가 중요하다.

주체와 자아의 대립구도는 나중에 주체의 내적 분열이론으로 발전한다. 주체는 언어 속에서 ‘언표 된 주체’와 그것을 벗어나는 ‘언표행위의 주체’로 분열된다는 것이 주체이론의 핵심이다. 이것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으며 욕망의 구도에 라캉이 윤리적 색채를 부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욕망의 윤리는 최종 영역이자 진리의 근거가 되는 ‘실재계’로 발전한다.

실재계: 욕망의 윤리와 진리의 근거
라캉 이론에서 가장 이해가 어렵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념이 바로 실재계(the real)이고, 사상가로서 독창성이 드러나는 부분도 여기다. 만약 라캉이 자아의 상상적 본성과 상징계 이론에만 머물렀다면 여타 구조주의자들과 차이가 없었을 것이고 우리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캉은 <에크리>를 펴낸 1966년 이후 실재개념을 더 적극적으로 규명하면서 불가능한 실재에 대한 향유의지인 ‘주이상스(jouissance)’를 강조한다. 주이상스는 쾌락원리를 넘어선 극한 영역에 대한 충동이다. 실재는 욕망이 불가능한 이유이자, 욕망이 윤리적 방향, 즉 존재의 회복으로 정향되어야 하는 근거이다. 그리고 라캉이 지식과 진리를 나누면서 정신분석의 최종 목표가 증상 완화를 목표로 삼는 치료가 아니라 주체의 궁핍화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실재 때문이다. 실재는 한 마디로 상징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자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초월적 실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는 오히려 언어적 작용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언어의 한계자체를 일컫기도 한다. 실재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고, 언어를 말할 때 여기에서 벗어나는 잉여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라캉의 <에크리>에는 언어와 존재의 모순과 길항관계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는 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실재계를 점점 강조하는 이유가 된다.

라캉은 실재를 다의적으로 정의하는데 <에크리>에서는 주로 결여(lack)와 무(nothing)를 통해 설명한다. 이것은 주체가 상징계로 들어오면서 잃어버린 존재와 관계된다.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의 윤리이다.

이런 사고는 만유의 실체인 진여(眞如)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사상과 겨냥하는 바가 비슷하다. 진여를 알기위해서 우린 일체의 자아와 사물의 본성이 공(空)임을 알아야 하고, 참다운 지혜인 반야를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이 같은 공사상은 무에 대한 라캉의 사상과 통한다.

라캉은 세미나 <불안>에서 선불교가 ‘무’에 대한 생각을 심화시킨 대표적 동양사상이라고 극찬한다. ‘무’란 만유가 고정불변하지 않으며, 언어적인 것을 벗어나는 것(不立文字)으로 무한한 변화와 순환만 있다는 사유의 근거이다. 현상을 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아와 같은 실체에 매달리려는 무지의 상태 무명은 온갖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일으켜 우리를 구속하고 망하게 한다.

김석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은 언어에 의해 구체화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는 존재의 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학자 프롬은 “선은 그 본질에서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기술이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서양철학과 선>)고 말하면서 불교와 정신분석이 통한다고 강조 한다.

라캉은 욕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욕망의 사상가다. 그런데 욕망은 주체가 자신의 존재결여에 대해 맺는 관계이며, 존재는 언어에 의해 표현되면서도, 그것을 벗어난다. 존재에 대한 열망이 욕망의 참된 이유이며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윤리적 당위이다.

비록 갈애를 벗어나 성불할 것을 강조하는 불교와 욕망을 윤리와 연관시키면서 긍정하는 정신분석의 차이는 있지만 실재에 대한 바른 인식 태도와 실천을 강조하면서 인과 사슬의 기만적 굴레에 매이지 말 것을 강조하는 것은 똑같다. 이처럼 우리는 두 사상이 겨냥하는 목표를 중심으로 생산적 대화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