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천정-제 21회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백흥암 극락전 천정의 전체모습이다. 세 장의 사진을 결합했다. 채색에서 전체적 통일성과 구도에서 좌우대칭성 구현의 목적의식적 의지가 뚜렷하다.

-문화재 지켜온 비구니스님 보현행
-불단 등 고색창연한 목조건축 정수
-첨자, 살미 등에 강한 생명에너지
-후불탱, 불단, 닫집 혼연일체 색체

인종대왕 태실수호의 원당사찰

사람이 태어날 때 달고 나오는 태(胎)는 생명의 젖줄이다. 우리민족은 사람이 태어난 이후 생명줄이었던 태를 함부로 버리지않고 소중히 갈무리하여 생명의 근원을 돌아보는 풍속으로 삼아왔다. 태를 묻는 풍습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로서 생명존엄의 세계관이 그 바탕을 이룬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문화유산으로 알려진 태실(胎室)은 조선시대 왕실 자손들의 태를 묻은 시설이다. 조선왕실은 왕세자 등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당에 안치해 왕권의 안정과 무궁한 번영을 기원했다. 특히 국왕의 태실은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고, 봉산(封山) 금표를 설치해서 벌목 등을 금하게 했으며, 태실 아래에 절을 세워 태실수호와 왕실안녕을 기원하게 하였다. 선조의 오덕사, 세조의 선석사, 정종의 직지사, 인조의 정토사 등이 대표적인 왕실태실의 수호사찰들이다.

대구의 진산 팔공산 자락의 은해사 백흥암 역시 인종의 태실을 수호하며 국가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당사찰(願堂寺刹)로 중흥되었다. 왕실의 원당사찰은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역설적이게도 국가권력인 왕실로부터 절대적이며 안정적인 지원을 받아 불사를 일으키기도 하고, 세금감면과 부역면제 등의 혜택을 받았다. 각종 문헌기록에 전하는 왕실의 태실사찰, 능침사찰, 원당사찰 등이 무려 95개 사찰에 이른다는 최근의 보고는 유교국가 내면에 도도히 흐르는 불교신앙의 면면한 흐름을 엿보게 한다. 특히 왕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까지 털어 왕실 원당사찰의 중건에 나서고, 대규모 시주발원까지 주저하지 않았던 사실은 뜻밖의 놀라움이다. 이같은 왕실 원당사찰에서 오늘날 뛰어난 불화와 건축장엄 등을 보장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팔공산 중턱의 청정한 비구니도량 백흥암에서 만날 수 있는 불단, 불화, 벽화, 글씨 등 사찰건축 장엄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왕실 원당사찰의 성격에서 비롯된 산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흥암 보화루에 걸려있는 현판기록 ‘순영 제음(巡營 題音)’과 ‘완문(完文)’의 내용은 백흥암이 왕의 수결(手決)인 어압(御押)과 인종대왕의 태실을 위호하는 수호원당이니 잡역을 감면하고, 또 해당 암자의 역할을 터럭만큼이라도 침해하지 말 것을 천명하고 있다.

백흥암은 ‘백흥대난야(百興大蘭若)’다. 모든 일이 길하게 일어나는 청정도량이라는 뜻이다. 금당은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 이후 활발한 중창불사가 이루어진 통도사, 범어사 등 17세기 영남지역 바로크적 건축양식과 흐름을 같이한다. 전통의 규범에 엄격한 고전주의적 법식을 갖춘 까닭에 건축전반에 힘이 흐르고 위풍당당하다. 건축의 결구에서 내부장엄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단단한 힘이 느껴지고, 고색창연한 고전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건축내부는 물론이고 건축외부의 단청에 이르기까지 고전의 법식이 온전히 남아있다. 개채와 개축의 무지막지한 광풍이 문화재 보수라는 이름으로 불교계 전반에 유행처럼 번진 토목시대에 이렇게 온전히 고전양식이 남아있는 경우는 여간 다행이 아니다. 그것은 일년 내내 빗장을 걸고 문화재와 선원의 향기를 결연히 지켜온 비구니 스님들의 보현행의 인과다.

천정에 베푼 세 가지 연화문과 반자 틀 위의 문양.
파란 녹이 낀 청동거울의 색채

백흥암 극락전 내부는 시간에 곰삭은 진초록과 주사의 구리빛이 혼연일체를 이뤄 미묘한 색조를 자아낸다. 파란 녹이 끼인 청동거울의 구리빛 색채미감이 은은히 배여 나온다. 시간의 더께와 어둠에 길들여진 전통색채 진채가 이룬 적멸의 색조다. 그 색조의 공간은 깊고 엄숙하며 거룩함을 자아낸다. 아미타삼존불 후불탱화를 비롯해서 불단과 닫집, 벽체의 공포부재, 벽화에 이르기까지 내부의 색조는 녹슨 청동거울의 색감으로 일체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래서 내부구조는 하나로 통일된 강한 결속력을 지닌다. 모든 장엄요소들은 서로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내부공간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활성화 한다. 붉은 주사의 색채는 가구식 뼈대에 생명력의 기운을 불어 넣는다. 가구식 짜임의 공포벽면에는 하늘빛의 푸르른 붓질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고매(古梅)에 흐르는 철골생춘(鐵骨生春)의 힘을 닮았다. 소로, 첨자, 살미에 입힌 붉은 단청과 어우러져 주술적 신성과 생명 에너지의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공포짜임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공포공간은 신령한 기운이 가득한 생명에너지의 공간이며, 공포 칸칸마다 연꽃이 솟아 오르고, 그 연화좌에 설법인의 수인을 취한 여래께서 극적으로 나투신다. 잘 짜여진 서사적 플롯의 한 편을 보는 듯 하다. 여래의 존상에 베푼 두터운 진채(眞彩)의 빛이 천연스럽다. 수류부채(隨類賦彩)의 색채감각과 붓질이 대단한데, 붉은 빛의 주사와 초록의 두 색을 중심으로 단조로움 없이 저토록 풍부한 색감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치밀하고 단단한 건축짜임

공포구조를 짠 건축의 뼈대들, 예컨대 살미와 첨자, 소로 등은 경질의 벽돌처럼 짧고 간결하며 단단하다. 다양한 길이와 굵기의 나무토막으로 구조역학적으로 치밀하게 포개고 결구하고 축조해나간 방식이 성벽을 축성하듯 대단히 중첩적이면서 탁월하다. 개체들의 구조적 결구와 조합은 고저장단의 선율을 갖춰 리드미컬하고, 유기화학의 공유결합처럼 강고하기 그지없다. 특히 네 모서리 귀공포는 직선의 힘과 곡선의 역동성, 고색창연한 색채가 어우러져 한국 사찰건축의 가구구조가 지닌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준다. 구조, 형태, 색채에서 흠 잡을 데 없는 규범적 고전주의 구조미다.

천정의 구조양식은 상하 두 개층의 층급을 지닌 우물천정이다. 천정은 웅장한 아미타삼존불 후불탱을 충분히 늘어뜨릴 수 있을만큼 높고, 깊은 층급을 두어 공간의 깊이와 위엄을 갖추었다. 바깥에서 보면 극락전은 단정하고 아담한 규모로 보이지만, 막상 실내로 들어서면 공간감이 깊고 풍부하며 위엄서린 높이를 갖추고 있어 놀랍다. 천정의 의장에서 주목되는 장엄은 닫집의 형태다. 닫집의 형태는 포작이 없는 독립적인 운궁형이지만 일반적인 사각형 형태의 정형(定型)과는 자못 다른 다각형이다. 비선형적 특성을 지닌 비유클리드적 형태로 독특하다. 닫집중에 이와 유사한 다각형 형식의 닫집은 팔공산 너머 환성사 대웅전에서 찾을 수 있다. 닫집의 형태는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형국이다. 또아리를 튼 용의 몸통엔 기운이 넘치고, 몸통비늘의 묘사는 최근에 마무리한 듯 생생하면서 극히 현실적이어서 사실성을 부여하고도 남음이 있다. 닫집 내부의 우물반자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청색 빛의 청학이 천도(天桃)를 취하고 있어 이채롭다.

극락전 내부장엄. 대들보에 용의 형상을 한 횃대를 매달아 두었다.
아라베스크적 반복과 대칭

천정에 베푼 문양은 세 가지다. 관념적인 연꽃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세 가지 연꽃 형상은 마치 <관무량수경>중 제8관 ‘상상관(想像觀)’을 조형언어로 일깨우는 방편처럼 보인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저 연꽃을 자기 손바닥 보듯 일심으로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세 연꽃은 각각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그리고 대세지보살의 상징이고, 아미타여래와 두 보살은 극락세계에 두루 가득하시기에 극락전 천정에 연꽃을 빈틈없이 충만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찰천정의 화엄장엄은 다분히 아라베스크적이다. 아라베스크 양식은 꽃과 식물의 형태를 모티브로 취한 기하적 문양으로 대칭과 반복, 회전을 통해 장엄공간을 무한히 확대해나가는 조형방식이다. 점, 선, 면의 반복적인 무늬의 패턴으로 공간은 연방 생기로 가득차고, 미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반복과 대칭을 통해 종교적 신성과 무한, 일체의 진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과 불교장엄은 일맥상통하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 이르기를 하늘의 연화처럼 미묘한 꽃은 아미타부처께서 법장비구로 계실적에 세우신 48대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밝히고 있다. 저 연꽃을 보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을 보는 것이니 연화대를 볼 때는 다른 번잡한 생각을 하지말고, 하나하나의 꽃잎, 알알의 구슬, 빛줄기 하나하나, 한 송이마다의 꽃을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듯 일심으로 보라고 가르치신다. 천정의 연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선 꽃을 피우는 바탕의 근원세계가 대단히 미묘하고 아름답게 표현해서 놀랍다. 검은 바탕의 천공에 진초록, 혹은 황토색으로 넝쿨처럼 나선형으로 꿈들대는 뚜렷한 신령의 기운을 묘사하고 있다. 불가설불가설의 현묘한 힘을 우아한 넝쿨형태의 파동에너지로 그려 넣었다. 넝쿨은 동양적 생명생성의 근원인 기(氣)를 표현하는 것이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미묘한 진리의 자비임에 분명하다. 생명의 꽃, 진리의 꽃, 부처의 꽃이므로 그 꽃은 엄숙하다. 엄숙함으로 인하여 천정의 꽃은 화엄의 꽃이다. 파란 녹이 낀 청동거울에 화엄의 꽃이 엄숙히 피어있다. 백 가지 일이 흥한 백흥암에서 그것은 백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색창연한 색감과 함께 짧고 단단한 귀공포 결구에서 구조역학의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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