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上

▲ 수려한 산세와 우거진 노송 속에 자리한 진관사는 조선초기부터 수륙도량으로 이름났다.
조선최고의 수륙도량

홍무(洪武) 정축년 정월 을묘일에, 상이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 신하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의 적선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상의 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아서는 안된다. 또 신하와 백성 중 혹은 국사에 죽고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하지 못함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옛 절에도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회(齊會)를 개설하여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은 가서 합당한 곳을 찾아보게 하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이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의 신하 상충(尙忠)·양달(陽達)·승려 지상(志祥) 등과 함께 장소를 찾아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峰山)까지 둘러보고 복명하여 말하기를, “여러 절 중에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고 하니, 여기서 상이 명령하여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진관사수륙사조성기(津寬寺水陸寺造成記)’의 일부다. 〈동문선(東文選)〉 제78권에 수록된 이 기문은 조선 태조가 진관사를 국가차원에서 수륙재를 베푸는 도량으로 정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매년 10월에 대규모 수륙재를 봉행하는 진관사의 전통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진관사가 언제 건립된 사찰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고려 초기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으로 존립했던 것은 확실하다. 고려의 8대 황제인 현종(顯宗 992~1031)이 신혈사에 머물렀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우선 그 이야기와 관련된 가사(歌詞) 한 수를 보자.

 

로석몽천혼유양(老釋夢天魂悠揚)

대성촉지금황망(大星觸地金煌?)

홀변위룡린갑동(忽變爲龍鱗甲動)

비룡이인재중당(匪龍伊人在中堂)

우수파악풍뢰권(右手把握風雷權)

좌수소지천중앙(左手笑指天中央)

련화좌하굴급천(蓮花座下掘及泉)

륙정근호쟁분망(六丁勤護爭奔忙)

산전협비이망상(山前夾匕爾妄想)

무내당당천일상(無柰堂堂天日相)

수지삼각오채운(誰知三角五彩雲)

일도암접청송장(一道暗接靑松?)

세외불금상변해(世外不禁桑變海)

인간숙권미천망(人間?捲彌天網)

구가창만신혈로(謳歌唱滿神穴路)

구오공견비룡상(九五共見飛龍上)

불문곡령전두은해활

(不聞鵠嶺前頭銀海闊)

횡경협길언불상(橫庚?吉言不爽)

 

노승이 꿈을 꾸니 혼령이 보이는 듯

큰 별이 땅에 떨어져 금빛이 휘황했네.

문득 변하여 용이 되어

비늘이 꿈틀대더니

다시 보니 용이 아니라

사람이 마당에 있었네.

오른손으로 풍운 뇌우 권한을 잡아 쥐고

왼손으로 웃으면서

하늘 중앙을 가리켰네.

연꽃 자리 아래에는 땅을 깊이 팠고

육정이 부지런히 다투어 호위했지.

산 앞에 비수 품은 너희 망령된 생각을

당당한 하늘 해가 보고 있는 걸

어찌하리.

누가 알았으랴 삼각산 오색구름이

한 줄기가 은연중 청송 고개에

닿아 있는 줄을

세상 밖은 뽕밭이 바다가 되는 걸

막지 못하고

인간에는 문득 하늘 가득하던

그물 거두어졌네.

신혈사 가는 길에 노랫소리 가득해라.

구오라 용이 날아오르는 것을

모두가 함께 보네.

못 들었나, 곡령 앞머리에

은빛 바다 넓었는데

왕위에 오른다는 꿈 풀이가 틀린 말이

아니었음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의 문집 〈성호전집(星湖全集)〉 제7권에 전하는 이 가사는 해동악부(海東樂府) 가운데 ‘성변룡(星變龍)’이라는 악곡의 가사다. 악부는 중국 한나라 때 각 지방의 음악을 채집하여 정리하는 관서의 이름인데 시대가 흐르면서 악곡은 사라지고 가사만 전하여 시의 형태로 변화했다. 해동악부란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물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다.

 

별이 용으로 변한 이야기

악곡 ‘성변룡’은 별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는 뜻이다. 고려 8대 황제 현종의 불우했던 젊은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현종이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의 위험을 넘기며 젊은 시절을 보냈고, 오늘날 진관사인 신혈사에서 살아남은 이야기가 ‘성변룡’의 내용이다. 〈성호전집〉에서는 가사를 싣기 전에 그 내용을 간추려 놓았다. 시를 이해하는데 아주 요긴한 설명이다.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은 안종(安宗) 왕욱(王郁)의 아들이다.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김치양(金致陽)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김치양과 모의하여 그 아들을 왕의 후사로 삼으려 하여, 대량원군을 꺼려 강제로 출가(出家)하게 하니, 이때에 대량원군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처음에 숭교사(崇敎寺)에 머물 때에 어떤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큰 별이 절의 뜰에 떨어져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으로 변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대량원군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뒤에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머물렀는데 천추태후가 사람을 보내 해치고자 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절에는 노승(老僧)이 한 사람 있었는데 방 안에 구덩이를 파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놓아 불측한 재앙을 방비하였다. 나중에 목종(穆宗)이 승하하자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현종(顯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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